삼신불상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불로 구성된 세 구의 여래상이다. 삼신불 관련 기록은 고려 시대부터 있지만 실제 작품은 조선 시대부터이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 승려 교육기관인 강원의 설립, 화엄법회의 융성과 관련되어 유행했다. 조각보다는 전각의 후불도나 의식용 괘불도로 삼신불 작품이 다수 제작되었다. 삼신불상은 구례 화엄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유일하다. 이 작품은 1636년에 조각승 청헌이 여러 명의 장인들과 함께 제작한 것이다. 불상 뒷면에는 1757년에 그려진 삼신불도가 있다.
대승불교에서 석가세존이 열반한 후 육신은 사라졌어도 설법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세 구의 여래상으로 조각한 것이다. 삼신불은 부처의 세 가지 몸으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인 법신, 수행과 공덕의 존재인 보신,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존재인 화신을 가르키며 이는 법신 비로자나불, 보신 노사나불, 화신 석가불로 받아들여졌다. 즉 부처의 몸이 다양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여러 모습으로 변화되는데 진리를 상징하는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로 표기된다.
삼신불은 인도에서 시작하여 중국에서 유행한 도상으로 그 성립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중국의 경우 당대에는 조성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 기황후(奇皇后)가 원나라 황실 번영을 기원하며 중창한 장안사에 삼신불을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실제 작품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삼신불 중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과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불은 여래의 모습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도상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노사나불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두 팔을 어깨 너비로 벌린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보이며 중국에서는 항주 비래봉(飛來峯)에 있는 북송시대의 1022년 노사나불회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삼신불상은 불교조각으로는 전라남도 구례 화엄사 대웅전에 봉안되었으며 2021년 국보로 지정된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유일하다. 이 작품은 1697년에 간행된 「화엄사사적기」에 의해 1636년에 조각승 청헌이 여러 명의 장인들과 함께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불상 뒷면에는 1757년에 그려진 삼신불도(보물, 2003년 지정)가 있다.
불화로는 뒷면에 걸리는 탱화나 괘불도 등이 남아 있다. 1650년에 제작된 충청남도 공주에 위치한 갑사의 삼신불도는 10×8m의 대형 크기로 가장 오래된 괘불도이다(국보, 1997년 지정). 조선후기에는 의식집이 정비되면서 의식에 봉청되는 중요한 대상이었던 삼신불이 점차 괘불도상으로 제작된 중요 시기이다. 1645년의 칠장사 오불회도 괘불도(국보, 1997년 지정)와 1687년의 마곡사 괘불도, 1745년의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 괘불도가 여기에 해당된다. 삼신불을 중앙에 배치하고 관음과 대세지보살 및 많은 권속들을 함께 배치하기도 한다.
비로자나, 노사나, 석가모니불의 삼신불과 더불어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의 삼세불이 결합되어 오불로 함께 그려지는 유형도 등장한다. 조선전기 1467년의 일본 효고현(兵庫현)에 있는 주륜지(十輪寺) 오불회도(五佛會圖)와 1645년의 칠장사 오불회도(국보, 1997년 지정), 1745년의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 오불회괘불도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