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에 따라 미국과 소련 양국은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를 열고 38선 철폐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1947년 7월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 미국은 미소 협의에 의한 해결을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①한반도 총선거 실시, ②유엔임시위원단 파견, ③미소 양군 철퇴 권고를 결의하였다. 그에 따라 1948년 1월, 8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한국에 왔으나 북한에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들의 활동을 근거로 유엔 소총회는 1948년 2월 26일,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 즉 남한 단독선거를 결의하였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등 우익 세력은 이 같은 결정을 지지했지만, 김구 · 김규식 등 민족주의 성향의 주1 반대 세력은 남북협상과 같이 분단을 막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좌익 세력도 유엔 결의와 단선단정에 반대하였다. 1946년 11월 결당 후 미군정의 탄압에 맞서 비타협적 강경 투쟁 노선으로 일관했던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은 1948년 2월 7일, 이른바 ‘2·7구국투쟁’을 일으켰다. 이때 남로당의 요구사항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반대,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미소 양군 동시 철수, 이승만 · 김구 · 김규식 등 친일반동 타도, 노동법 제정과 사회보장제 실시, 임금 인상’ 주2 대체로 2월 10일까지 서울과 부산, 광주 · 대구 등 전국 주요 지역에서 시위와 파업이 잇따랐다. 일부 지역에서는 전신전화 · 철도 등의 파괴와 경찰서 습격, 방화, 주3 살포, 동맹휴업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주4 미군정에 따르면 이 사건에서 경찰서 · 지서 공격 32건, 기관차 사보타지 52건, 교량 파괴가 1건 있었으며, 1,741명이 체포되고 경찰 12명, 민간인 37명이 사망했다. ‘2·7투쟁’ 후 남로당 조직은 모두 지하로 들어갔고, 당의 주요 간부들은 북쪽으로 주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