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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감은 고려시대 성종이 관료로 선발할 인재를 교육하기 위하여 개경에 설치한 최고 교육기관이다. 문종은 국자감을 유학부와 기술학부로 구성된 종합대학으로 만들었다. 예종이 7재를 설치하면서 유학 교육이 활성화되었고 과거와 연동되어 우수한 학생은 과거 응시에 특혜를 받았다. 인종 대에 학식을 정하였으나 그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유학대학인 성균관과 달리 인재 교육이 유학에 제한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었다.
국자감 (國子監)
국자감은 고려시대 성종이 관료로 선발할 인재를 교육하기 위하여 개경에 설치한 최고 교육기관이다. 문종은 국자감을 유학부와 기술학부로 구성된 종합대학으로 만들었다. 예종이 7재를 설치하면서 유학 교육이 활성화되었고 과거와 연동되어 우수한 학생은 과거 응시에 특혜를 받았다. 인종 대에 학식을 정하였으나 그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유학대학인 성균관과 달리 인재 교육이 유학에 제한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었다.
원세훈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함남 정평 출생으로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동만주로 망명하였다. 간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경 등에서 조국광복 대의 설파, 새로운 독립운동기관 창설 등을 통해 일제와 맞섰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납북당했으며,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원세훈 (元世勳)
원세훈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함남 정평 출생으로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동만주로 망명하였다. 간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경 등에서 조국광복 대의 설파, 새로운 독립운동기관 창설 등을 통해 일제와 맞섰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납북당했으며,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오하영은 일제강점기 수표교교회 목사, 목사경성지회 검사위원, 사동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이다. 1879년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1906년 남감리교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18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독립선언식 후 붙잡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 납북되었다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오하영 (吳夏英)
오하영은 일제강점기 수표교교회 목사, 목사경성지회 검사위원, 사동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이다. 1879년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1906년 남감리교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18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독립선언식 후 붙잡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 납북되었다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신흥무관학교 교장, 임시정부 군무차장 등으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부의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정치인·독립운동가.
윤기섭 (尹琦燮)
일제강점기 때, 신흥무관학교 교장, 임시정부 군무차장 등으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부의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정치인·독립운동가.
김석형은 해방 이후 「리조병제사」, 「조선통사」, 「초기 조일관계 연구」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915년에 대구에서 태어나 1996년에 사망했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사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조교수를 역임했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6년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로 취임했다. 북한에서 한국고대사 연구에 전념하며 북한 역사학 정립에 기여했다. 특히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체계화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김석형 (金錫亨)
김석형은 해방 이후 「리조병제사」, 「조선통사」, 「초기 조일관계 연구」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915년에 대구에서 태어나 1996년에 사망했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사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조교수를 역임했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6년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로 취임했다. 북한에서 한국고대사 연구에 전념하며 북한 역사학 정립에 기여했다. 특히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체계화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영은 산의 능선이 낮아져 말안장의 움푹 들어간 것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고갯길이다. 고개, 재, 현, 치, 티 등 다양한 용어로 불렸다. 단층선을 따라 발달하거나 습곡작용이나 암석이 차별 침식을 많이 받은 부분에 발달한다. 영은 일반적으로 지역 또는 국가 간의 경계가 되기 때문에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하다. 또 고개의 양쪽을 연결하는 교통로 혹은 문화적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다. 고갯길 부근에 상업 요지의 취락들이 많아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중요시되었다. 최근에는 영 밑으로 곳곳에 터널이 생겨나 영의 기능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영 (嶺)
영은 산의 능선이 낮아져 말안장의 움푹 들어간 것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고갯길이다. 고개, 재, 현, 치, 티 등 다양한 용어로 불렸다. 단층선을 따라 발달하거나 습곡작용이나 암석이 차별 침식을 많이 받은 부분에 발달한다. 영은 일반적으로 지역 또는 국가 간의 경계가 되기 때문에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하다. 또 고개의 양쪽을 연결하는 교통로 혹은 문화적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다. 고갯길 부근에 상업 요지의 취락들이 많아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중요시되었다. 최근에는 영 밑으로 곳곳에 터널이 생겨나 영의 기능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엄항섭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선전부장,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8년 경기 여주 출생으로 1919년 3·1운동 시기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해방 전까지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위원, 한국독립당 조직책,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 등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도 김구를 보좌하였고, 1948년 4월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1950년 납북되었으며, 1958년 반당·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후 4년 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엄항섭 (嚴恒燮)
엄항섭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선전부장,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8년 경기 여주 출생으로 1919년 3·1운동 시기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해방 전까지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위원, 한국독립당 조직책,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 등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도 김구를 보좌하였고, 1948년 4월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1950년 납북되었으며, 1958년 반당·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후 4년 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공립협회와 신민회를 창설하였고, 대동공보 편집책임, 임시정부의정원 의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독립운동가.
이강 (李剛)
일제강점기 때, 공립협회와 신민회를 창설하였고, 대동공보 편집책임, 임시정부의정원 의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독립운동가.
재북인사의 묘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사망한 남한 출신 유명 인사 62명이 안치된 묘역이다. 북한 평양직할시 룡성구역에 조성되었으며, 남한의 정계, 실업계, 사회계, 학계 등의 인사로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사망한 62명이 안장되어 있다. 묘역에는 미군정 민정장관을 지낸 안재홍,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백상규,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 현상윤 등이 안치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전쟁 시기에 납북되거나 월북한 인물로 1956년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하였다. 남한 출신의 명망가를 정치적으로 예우하는 차원에서 만든 묘역이다.
재북인사의 묘 (在北人士의 墓)
재북인사의 묘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사망한 남한 출신 유명 인사 62명이 안치된 묘역이다. 북한 평양직할시 룡성구역에 조성되었으며, 남한의 정계, 실업계, 사회계, 학계 등의 인사로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사망한 62명이 안장되어 있다. 묘역에는 미군정 민정장관을 지낸 안재홍,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백상규,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 현상윤 등이 안치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전쟁 시기에 납북되거나 월북한 인물로 1956년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하였다. 남한 출신의 명망가를 정치적으로 예우하는 차원에서 만든 묘역이다.
고려시대에 재부(宰府)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추밀원(樞密院)을 가리키던 말.
양부 (兩府)
고려시대에 재부(宰府)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추밀원(樞密院)을 가리키던 말.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상무위원을 역임한 정치인.
이구수 (李龜洙)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상무위원을 역임한 정치인.
제헌국회의원, 문교사회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종교인.
권태희 (權泰羲)
제헌국회의원, 문교사회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종교인.
해방 이후 국회의원, 미군정청 경남고문 등을 역임한 정치인. 교육자.
구중회 (具中會)
해방 이후 국회의원, 미군정청 경남고문 등을 역임한 정치인. 교육자.
1927년 동경에서 일본지역의 조선인 민족운동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던 단체.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 (在東京朝鮮人團體協議會)
1927년 동경에서 일본지역의 조선인 민족운동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던 단체.
일제강점기 때, 김천청년연맹 집행위원, 부산청년동맹 집행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 지원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김칠성 (金七星)
일제강점기 때, 김천청년연맹 집행위원, 부산청년동맹 집행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 지원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는 조선후기 진사 남구수 관련 주택.
경암헌 고택 (畊菴軒 故宅)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는 조선후기 진사 남구수 관련 주택.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의사로 재직 중에 독립운동을 벌였고 해방 이후, 민의원에 당선된 의사·정치인·독립운동가.
구덕환 (丘德煥)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의사로 재직 중에 독립운동을 벌였고 해방 이후, 민의원에 당선된 의사·정치인·독립운동가.
조선건국 초기 음악기관인 봉상시(奉常寺)와 관습도감(慣習都監)에서 임시로 연주활동을 맡았던 나이 어린 소년.
무공 (武工)
조선건국 초기 음악기관인 봉상시(奉常寺)와 관습도감(慣習都監)에서 임시로 연주활동을 맡았던 나이 어린 소년.
일제강점기 때, 반일투쟁 혐의로 2년간 복역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김경배 (金庚培)
일제강점기 때, 반일투쟁 혐의로 2년간 복역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경찰부청장,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중앙위원을 역임한 경찰·정치인.
이만근 (李萬根)
경찰부청장,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중앙위원을 역임한 경찰·정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