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조선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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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 사망했다. 1919년에 의열단을 조직하여 요인 암살, 국내 경찰서 폭파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이끌었다. 이후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했으며, 한국민족혁명당 조직,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조선의용대 편성 등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임시정부의 군사부분 주요직을 역임했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에 주력했다. 여운형 암살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내각노동상 등을 역임하다 1958년 숙청당했다.
김원봉 (金元鳳)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 사망했다. 1919년에 의열단을 조직하여 요인 암살, 국내 경찰서 폭파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이끌었다. 이후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했으며, 한국민족혁명당 조직,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조선의용대 편성 등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임시정부의 군사부분 주요직을 역임했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에 주력했다. 여운형 암살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내각노동상 등을 역임하다 1958년 숙청당했다.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지양하고 극복하려고 하는 사회운동.
사회주의운동 (社會主義運動)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지양하고 극복하려고 하는 사회운동.
조봉암은 해방 이후 농림부장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9년 경기도 강화 출생으로 강화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년간 투옥되었다. 일본 유학 시절 사회주의·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참여 등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 후 7월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2011년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복권되었다.
조봉암 (曺奉岩)
조봉암은 해방 이후 농림부장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9년 경기도 강화 출생으로 강화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년간 투옥되었다. 일본 유학 시절 사회주의·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참여 등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 후 7월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2011년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복권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 부대장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의료인·독립운동가.
이화림 (李華林)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 부대장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의료인·독립운동가.
1946년 좌파 세력과 민중이 대구를 시작으로 남한 전역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일으킨 사건.
대구 십일사건 (大邱 十一事件)
1946년 좌파 세력과 민중이 대구를 시작으로 남한 전역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일으킨 사건.
이관술은 일제강점기 경성반제동맹 사건, 조선공산당재건운동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902년 경남 울산 출생으로 일본 동경고등사법학교 유학 시 사회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34년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을 결성하고 학생운동부문을 담당하였으며, 1939년 ‘경섬콤그룹’의 초기 지도부를 작성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 및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7월 미군정 경찰에 검거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교도소에서 처형되었다.
이관술 (李觀述)
이관술은 일제강점기 경성반제동맹 사건, 조선공산당재건운동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902년 경남 울산 출생으로 일본 동경고등사법학교 유학 시 사회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34년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을 결성하고 학생운동부문을 담당하였으며, 1939년 ‘경섬콤그룹’의 초기 지도부를 작성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 및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7월 미군정 경찰에 검거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교도소에서 처형되었다.
권오설은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1922년 풍산청년회,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6‧10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거사 직전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권오설 (權五卨)
권오설은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1922년 풍산청년회,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6‧10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거사 직전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박낙종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자와 8·15광복 후 조선정판사 사장을 지낸 사회주의운동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월회 기관지인 『사상운동』의 발행인 겸 편집인, 1926년 『대중신문』의 발행인을 역임하였다. 1927년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1934년 1월 만기 출옥하였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박낙종 (朴洛鍾)
박낙종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자와 8·15광복 후 조선정판사 사장을 지낸 사회주의운동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월회 기관지인 『사상운동』의 발행인 겸 편집인, 1926년 『대중신문』의 발행인을 역임하였다. 1927년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1934년 1월 만기 출옥하였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신전술은 1946년 7월 이후 조선공산당이 미군정에 대해 채택한 전술이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대해 직접적인 비난이나 적대 행위를 자제하는 협력조합전술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방어 전술로 정권을 수립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적극적인 투쟁과 물리적 저항을 하면서 미군정과 남한의 우익을 차별해 대응하는 이중전술을 채택하였다. 미군정에 대한 우의적 관계를 지속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군중을 조직해 단결시키고 국내외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점차 대중투쟁을 통해 미군정의 통치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노선으로 전환되었다.
신전술 (新戰術)
신전술은 1946년 7월 이후 조선공산당이 미군정에 대해 채택한 전술이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대해 직접적인 비난이나 적대 행위를 자제하는 협력조합전술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방어 전술로 정권을 수립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적극적인 투쟁과 물리적 저항을 하면서 미군정과 남한의 우익을 차별해 대응하는 이중전술을 채택하였다. 미군정에 대한 우의적 관계를 지속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군중을 조직해 단결시키고 국내외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점차 대중투쟁을 통해 미군정의 통치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노선으로 전환되었다.
최익한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인민공화국 간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897년 경북 울진 출생으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항일운동에 가담하였고,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원으로 활약하였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유학 중 일월회와 조선공산당 일본부에서 활동했다.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7년간 복역 후 학문활동에 전념하였다. 해방 후 우익을 보다 넓게 포괄하려는 입장에서 민족주자연맹에 참여하였고, 1948년 월북한 후 학문연구에 몰두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학연구의 선구자로 대표적인 저술서로 『실학파와 정다산』이 있다.
최익한 (崔益翰)
최익한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인민공화국 간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897년 경북 울진 출생으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항일운동에 가담하였고,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원으로 활약하였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유학 중 일월회와 조선공산당 일본부에서 활동했다.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7년간 복역 후 학문활동에 전념하였다. 해방 후 우익을 보다 넓게 포괄하려는 입장에서 민족주자연맹에 참여하였고, 1948년 월북한 후 학문연구에 몰두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학연구의 선구자로 대표적인 저술서로 『실학파와 정다산』이 있다.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김약수 (金若水)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해방 이후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노동운동가.
이주하 (李舟河)
해방 이후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노동운동가.
해방 직후부터 1949년 6월까지 북한지역을 통치하던 공산주의 정당.
북조선노동당 (北朝鮮勞動黨)
해방 직후부터 1949년 6월까지 북한지역을 통치하던 공산주의 정당.
1924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 단체.
화요회 (火曜會)
1924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 단체.
안광천은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일월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운동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정우회선언'을 기초하여 방향전환론과 민족협동전선 결성을 주장하였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냈다. 조선공산당 정치부장으로 「민족해방운동에 관한 논강」을 작성하였다. 김원봉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조직하고, 『레닌주의』를 발행하였다.
안광천 (安光泉)
안광천은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일월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운동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정우회선언'을 기초하여 방향전환론과 민족협동전선 결성을 주장하였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냈다. 조선공산당 정치부장으로 「민족해방운동에 관한 논강」을 작성하였다. 김원봉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조직하고, 『레닌주의』를 발행하였다.
주세죽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 여성해방운동가, 독립운동가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유학 중 사회주의 이론을 학습하였고, 귀국 후 사회주의 여성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를 주도하였다. 소련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하였으나, 소련에서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받는 등 고난을 겪었다.
주세죽 (朱世竹)
주세죽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 여성해방운동가, 독립운동가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유학 중 사회주의 이론을 학습하였고, 귀국 후 사회주의 여성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를 주도하였다. 소련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하였으나, 소련에서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받는 등 고난을 겪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위원,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
강달영 (姜達永)
일제강점기 때,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위원,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
이영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청년총동맹 상무위원, 조선공산당 정치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대표단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관료·독립운동가이다. 1889년에 출생하여 1960년 사망했다. 중국 남경의 강녕제일실업학교 재학 중 조선광복회 결성에 참여했다. 1920년 귀국 후 1923년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1927년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했으며, 195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1956년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으로서 소련을 방문했다.
이영 (李英)
이영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청년총동맹 상무위원, 조선공산당 정치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대표단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관료·독립운동가이다. 1889년에 출생하여 1960년 사망했다. 중국 남경의 강녕제일실업학교 재학 중 조선광복회 결성에 참여했다. 1920년 귀국 후 1923년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1927년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했으며, 195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1956년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으로서 소련을 방문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 서기,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정치인.
현준혁 (玄俊爀)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 서기,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정치인.
윤덕병은 노동운동가이지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조선노동공제회 서무부 간사,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상무위원 등 노동운동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중립당), 코르뷰로 국내부, 조선공산당 등 비밀결사에서 활동하였다.
윤덕병 (尹德炳)
윤덕병은 노동운동가이지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조선노동공제회 서무부 간사,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상무위원 등 노동운동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중립당), 코르뷰로 국내부, 조선공산당 등 비밀결사에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