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조선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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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집행위원,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남만도 위원회 책임비서 등을 역임한 지도자.
김만흥 (金萬興)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집행위원,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남만도 위원회 책임비서 등을 역임한 지도자.
박낙종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자와 8·15광복 후 조선정판사 사장을 지낸 사회주의운동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월회 기관지인 『사상운동』의 발행인 겸 편집인, 1926년 『대중신문』의 발행인을 역임하였다. 1927년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1934년 1월 만기 출옥하였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박낙종 (朴洛鍾)
박낙종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자와 8·15광복 후 조선정판사 사장을 지낸 사회주의운동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월회 기관지인 『사상운동』의 발행인 겸 편집인, 1926년 『대중신문』의 발행인을 역임하였다. 1927년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1934년 1월 만기 출옥하였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46년 좌파 세력과 민중이 대구를 시작으로 남한 전역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일으킨 사건.
대구 십일사건 (大邱 十一事件)
1946년 좌파 세력과 민중이 대구를 시작으로 남한 전역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일으킨 사건.
권오설은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1922년 풍산청년회,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6‧10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거사 직전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권오설 (權五卨)
권오설은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1922년 풍산청년회,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6‧10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거사 직전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권정필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886년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사회주의 이념에 공명하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활동하였다.
권정필 (權正弼)
권정필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886년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사회주의 이념에 공명하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활동하였다.
권태석은 일제강점기 조선민흥회와 신간회,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며, 8·15광복 이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조선민족대동단사건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조선민흥회 상무위원, 1927년 신간회 창립 서무부 총무간사에 선임되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8·15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신한민족당에 참여하였다.
권태석 (權泰錫)
권태석은 일제강점기 조선민흥회와 신간회,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며, 8·15광복 이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조선민족대동단사건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조선민흥회 상무위원, 1927년 신간회 창립 서무부 총무간사에 선임되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8·15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신한민족당에 참여하였다.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김약수 (金若水)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무산자동지회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1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1922년 1월 19일 ‘조선공산당’의 합법적 외곽 사상단체로 서울에서 조직되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 결성된 최초의 합법적 사상단체였다. 이 단체는 청년 ‧ 노동 ‧ 농민 단체를 통일적으로 결속하는 활동을 수행하였고, ‘사회운동유지간담회’를 개최하여 정세와 정책에 관한 토론을 이끌어 나갔다. 발족 3개월 뒤인 1922년 3월 31일에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와 함께 통합하여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무산자동지회 (無産者同志會)
무산자동지회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1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1922년 1월 19일 ‘조선공산당’의 합법적 외곽 사상단체로 서울에서 조직되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 결성된 최초의 합법적 사상단체였다. 이 단체는 청년 ‧ 노동 ‧ 농민 단체를 통일적으로 결속하는 활동을 수행하였고, ‘사회운동유지간담회’를 개최하여 정세와 정책에 관한 토론을 이끌어 나갔다. 발족 3개월 뒤인 1922년 3월 31일에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와 함께 통합하여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위원,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
강달영 (姜達永)
일제강점기 때,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위원,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 사망했다. 1919년에 의열단을 조직하여 요인 암살, 국내 경찰서 폭파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이끌었다. 이후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했으며, 한국민족혁명당 조직,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조선의용대 편성 등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임시정부의 군사부분 주요직을 역임했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에 주력했다. 여운형 암살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내각노동상 등을 역임하다 1958년 숙청당했다.
김원봉 (金元鳳)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 사망했다. 1919년에 의열단을 조직하여 요인 암살, 국내 경찰서 폭파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이끌었다. 이후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했으며, 한국민족혁명당 조직,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조선의용대 편성 등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임시정부의 군사부분 주요직을 역임했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에 주력했다. 여운형 암살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내각노동상 등을 역임하다 1958년 숙청당했다.
마준은 만주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도 조직부장과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 위원 겸 연화중심현위원회 서기를 역임하였다. 검거된 후 옥중에서 변절하면서 만주국 헌병대 분재소 특수사업반 반장과 헌병대 특무로 활동하였다.
마준 (馬駿)
마준은 만주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도 조직부장과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 위원 겸 연화중심현위원회 서기를 역임하였다. 검거된 후 옥중에서 변절하면서 만주국 헌병대 분재소 특수사업반 반장과 헌병대 특무로 활동하였다.
김정하는 일제강점기 모스크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조선민족부 교관을 지냈으며,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였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같은 대학에서 조선민족부 교관을 지냈다.
김정하 (金鼎夏)
김정하는 일제강점기 모스크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조선민족부 교관을 지냈으며,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였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같은 대학에서 조선민족부 교관을 지냈다.
김찬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창립 중앙집행위원을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8·15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고려총국 내지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 집행위원장, 4월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11월 화요회 상무집행위원을 지냈으며, 1926년 조선공산당 임시상하이부 책임자였다.
김찬 (金燦)
김찬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창립 중앙집행위원을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8·15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고려총국 내지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 집행위원장, 4월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11월 화요회 상무집행위원을 지냈으며, 1926년 조선공산당 임시상하이부 책임자였다.
배치문은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삼일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목포 지역을 중심으로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신간회 목포지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배치문 (裵致文)
배치문은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삼일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목포 지역을 중심으로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신간회 목포지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김태수는 일제강점기와 8·15광복 후 영동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사상운동 단체 칠월회 회원이었으며, 적우동맹 책임비서를 지냈다. 영동 지역 대표적인 활동가로, 민주주의민족전선 충북지부 조직부장과 영동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김태수 (金台洙)
김태수는 일제강점기와 8·15광복 후 영동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사상운동 단체 칠월회 회원이었으며, 적우동맹 책임비서를 지냈다. 영동 지역 대표적인 활동가로, 민주주의민족전선 충북지부 조직부장과 영동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김태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과 국내에서 활동한 노동운동가이다. 경상남도 지방을 중심으로 193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시도하였다. 각지에서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중앙 조직을 결성하려 할 때 김태영은 경상남도 지방을 담당하였다. 8·15광복 후 조선공산당 경상남도위원회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김태영 (金台榮)
김태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과 국내에서 활동한 노동운동가이다. 경상남도 지방을 중심으로 193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시도하였다. 각지에서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중앙 조직을 결성하려 할 때 김태영은 경상남도 지방을 담당하였다. 8·15광복 후 조선공산당 경상남도위원회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김하구는 일제강점기에 『한인신보』 주필,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위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한북학회, 신민회 등 계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권업신문』을 발행하고, 『한인신보』와 『선봉』의 주필을 지냈다.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 중앙위원을 역임하였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상해파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인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김하구 (金河球)
김하구는 일제강점기에 『한인신보』 주필,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위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한북학회, 신민회 등 계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권업신문』을 발행하고, 『한인신보』와 『선봉』의 주필을 지냈다.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 중앙위원을 역임하였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상해파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인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고광수는 일제강점기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강원도 횡성 출신이며, 1921년 3·1운동 기념 반일 선전물을 배포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에서 대한혁명의용군에 입대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였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29년 지린에서 재조직된 ML파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9월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0년에 사망하였다.
고광수 (高光洙)
고광수는 일제강점기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강원도 횡성 출신이며, 1921년 3·1운동 기념 반일 선전물을 배포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에서 대한혁명의용군에 입대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였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29년 지린에서 재조직된 ML파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9월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0년에 사망하였다.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지양하고 극복하려고 하는 사회운동.
사회주의운동 (社會主義運動)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지양하고 극복하려고 하는 사회운동.
독고전은 조선공산당에 참여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코르뷰로 국내부, 조선공산당, 국제선공산주의그룹에 참여한 신의주를 대표하는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932년경 변절하여 일제의 밀정으로 활동하였다.
독고전 (獨孤佺)
독고전은 조선공산당에 참여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코르뷰로 국내부, 조선공산당, 국제선공산주의그룹에 참여한 신의주를 대표하는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932년경 변절하여 일제의 밀정으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