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흥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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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는 1926년 10월 28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원세훈(元世勳) 등이 주도하여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창조파(創造派), 흥사단원(興士團員) 등이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유일당(民族 唯一黨) 결성을 목표로 만든 단체로서, 중국 관내 각지에 다수의 촉성회를 만들어 ‘대독립당(大獨立黨)’을 결성하려 하였다. 1927년 상하이[上海], 광둥[廣東], 우한[武漢], 난징[南京]의 촉성회 설립에 큰 자극을 주며 민족유일당운동을 주도하였지만,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의 대립 고조 등으로 실패하였다.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 (韓國獨立唯一黨 北京促成會)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는 1926년 10월 28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원세훈(元世勳) 등이 주도하여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창조파(創造派), 흥사단원(興士團員) 등이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유일당(民族 唯一黨) 결성을 목표로 만든 단체로서, 중국 관내 각지에 다수의 촉성회를 만들어 ‘대독립당(大獨立黨)’을 결성하려 하였다. 1927년 상하이[上海], 광둥[廣東], 우한[武漢], 난징[南京]의 촉성회 설립에 큰 자극을 주며 민족유일당운동을 주도하였지만,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의 대립 고조 등으로 실패하였다.
수양동우회는 1926년 안창호가 서울에서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개량주의적 민족운동단체이다. 국내 흥사단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가 합동하여 결성되었는데 국외에 있는 흥사단과 통합하여 동우회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인격 수양 및 민족의 실력 배양을 표방하는 합법 단체로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을 중견 회원으로 확보하였다. 1937년 기독교계 회원이 전개한 민족운동에 연루되어 지방동우회의 회원이 기소되었다. 1941년 상고심에서는 사건 관련자가 대부분 친일파로 전락하였기에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수양동우회 (修養同友會)
수양동우회는 1926년 안창호가 서울에서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개량주의적 민족운동단체이다. 국내 흥사단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가 합동하여 결성되었는데 국외에 있는 흥사단과 통합하여 동우회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인격 수양 및 민족의 실력 배양을 표방하는 합법 단체로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을 중견 회원으로 확보하였다. 1937년 기독교계 회원이 전개한 민족운동에 연루되어 지방동우회의 회원이 기소되었다. 1941년 상고심에서는 사건 관련자가 대부분 친일파로 전락하였기에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26년에, 주요한이 안창호의 흥사단을 배경으로 창간한 잡지.
동광 (東光)
1926년에, 주요한이 안창호의 흥사단을 배경으로 창간한 잡지.
대학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가 사거리에서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는 문화예술의 거리이다.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건립되면서 조성되었다.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되면서 중심 캠퍼스이자 대학생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이후에 문화예술 관련 기관과 단체 및 공연장이 밀집해 있다. 실내외 공연시설에서 연극·영화·음악·뮤지컬 등의 다양한 공연 활동이 이루어지는 종합적 문화예술의 거리가 되었다. 1995년 이후 ‘리틀 마닐라’라고 불리는 필리핀인들의 시장이 열리는 등 초국가적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대학로 (大學路)
대학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가 사거리에서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는 문화예술의 거리이다.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건립되면서 조성되었다.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되면서 중심 캠퍼스이자 대학생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이후에 문화예술 관련 기관과 단체 및 공연장이 밀집해 있다. 실내외 공연시설에서 연극·영화·음악·뮤지컬 등의 다양한 공연 활동이 이루어지는 종합적 문화예술의 거리가 되었다. 1995년 이후 ‘리틀 마닐라’라고 불리는 필리핀인들의 시장이 열리는 등 초국가적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위업을 기리고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 건립한 기념관.
도산 안창호 기념관 (島山 安昌浩 記念館)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위업을 기리고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 건립한 기념관.
북미실업주식회사는 1912년 재미한인들이 설립·운영한 실업주식회사이다. 한인들이 자본을 모을 수 있는 방법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한 후 이를 실업회사로 발전시켜 나라 독립에 기여한다는 대의를 품고 김인수, 송종익, 안창호 등이 설립하였다. 로스엔젤레스 흥사단 본부에 사무실을 두었으며, 주식금은 주로 한인 농업에 투자되었다. 3.1운동 이후, 북미실업주식회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령 받들기를 자청하는 등 재미한인 공공의 주식회사임을 자처하였다. 설립 이래 운영은 순조로웠으나, 1920년 대홍수로 큰 손실을 보는 등 운영 악화로 1929년 해산하였다.
북미실업주식회사 (北美實業株式會社)
북미실업주식회사는 1912년 재미한인들이 설립·운영한 실업주식회사이다. 한인들이 자본을 모을 수 있는 방법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한 후 이를 실업회사로 발전시켜 나라 독립에 기여한다는 대의를 품고 김인수, 송종익, 안창호 등이 설립하였다. 로스엔젤레스 흥사단 본부에 사무실을 두었으며, 주식금은 주로 한인 농업에 투자되었다. 3.1운동 이후, 북미실업주식회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령 받들기를 자청하는 등 재미한인 공공의 주식회사임을 자처하였다. 설립 이래 운영은 순조로웠으나, 1920년 대홍수로 큰 손실을 보는 등 운영 악화로 1929년 해산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흥사단에서 활동하며 동우회를 조직하였고, 해방 이후, 미군정장관 고문,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김동원 (金東元)
일제강점기 때, 흥사단에서 활동하며 동우회를 조직하였고, 해방 이후, 미군정장관 고문,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1948년 8월 흥사단 본부가 미주에서 국내로 이주하면서 미주에 설치된 지부.
흥사단 미주위원회 (興士團 美州委員會)
1948년 8월 흥사단 본부가 미주에서 국내로 이주하면서 미주에 설치된 지부.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국내정보원, 흥사단 원동지부, 한인애국단 등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광복 (李光福)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국내정보원, 흥사단 원동지부, 한인애국단 등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31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체.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 (上海韓人各團體聯合會)
1931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체.
일제강점기 때, 대한청년단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던지고, 흥사단에서 활동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박규명 (朴奎明)
일제강점기 때, 대한청년단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던지고, 흥사단에서 활동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학생항일구국회 간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덕목 (金德穆)
일제강점기 때, 학생항일구국회 간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신민회, 흥사단 등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김기창 (金基昌)
일제강점기 때, 신민회, 흥사단 등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09년 흥사단편집부에서 초등학교의 역사 교육을 위하여 편찬한 교과서. 초등교과서·국사교과서.
초등본국약사 (初等本國略史)
1909년 흥사단편집부에서 초등학교의 역사 교육을 위하여 편찬한 교과서. 초등교과서·국사교과서.
일제강점기 때, 흥사단과 한국독립당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백여범 (白汝範)
일제강점기 때, 흥사단과 한국독립당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희망의 나라로」는 1933년 6월 『현제명작곡집』 제2집에 수록되어 있는 가곡이다. 현제명(玄濟明, 1903~1960) 작사 및 작곡으로 자신의 2번째 작곡집인 『현제명작곡집』에 수록된 12곡 중 10번째로 담겨 있다. 『현제명작곡집』 제2집은 현제명이 서울 연희전문학교 재직 중 연희전문학교출판부에서 1933년 6월 25일에 출간한 가곡집이다. 이 노래는 밝고 경쾌하며 힘찬 선율이 특징이다.
희망의 나라로
「희망의 나라로」는 1933년 6월 『현제명작곡집』 제2집에 수록되어 있는 가곡이다. 현제명(玄濟明, 1903~1960) 작사 및 작곡으로 자신의 2번째 작곡집인 『현제명작곡집』에 수록된 12곡 중 10번째로 담겨 있다. 『현제명작곡집』 제2집은 현제명이 서울 연희전문학교 재직 중 연희전문학교출판부에서 1933년 6월 25일에 출간한 가곡집이다. 이 노래는 밝고 경쾌하며 힘찬 선율이 특징이다.
최봉윤은 일제강점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교수를 역임하고,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 평양에서 평양기독학생종교부회총합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후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독교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일맥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8년 미국 이주 후에는 국어 교육에 앞장섰으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최초 한인 교수가 되었다. 1941년부터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 관료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남북통일 방략으로 한반도 영세중립화를 제안하였다.
최봉윤 (崔鳳潤)
최봉윤은 일제강점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교수를 역임하고,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 평양에서 평양기독학생종교부회총합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후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독교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일맥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8년 미국 이주 후에는 국어 교육에 앞장섰으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최초 한인 교수가 되었다. 1941년부터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 관료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남북통일 방략으로 한반도 영세중립화를 제안하였다.
최영숙은 일제강점기 흥사단에서 활동하고 한국 여성 최초로 스웨덴에서 유학한 신여성이다. 1905년 12월 경기도 여주군에서 태어났다. 이화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중국 난징으로 유학을 갔다. 1924년 흥사단 원동위원회가 난징으로 이전하자, 입단하여 정식 단원이 되었다. 1926년 3월 난징 회문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7월 스웨덴으로 유학을 갔다. 시그투나 인민학교를 거쳐 1928년부터 사회정치와 정책연구소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31년 귀국하였으며,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1932년 4월 사망하였다.
최영숙 (崔英淑)
최영숙은 일제강점기 흥사단에서 활동하고 한국 여성 최초로 스웨덴에서 유학한 신여성이다. 1905년 12월 경기도 여주군에서 태어났다. 이화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중국 난징으로 유학을 갔다. 1924년 흥사단 원동위원회가 난징으로 이전하자, 입단하여 정식 단원이 되었다. 1926년 3월 난징 회문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7월 스웨덴으로 유학을 갔다. 시그투나 인민학교를 거쳐 1928년부터 사회정치와 정책연구소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31년 귀국하였으며,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1932년 4월 사망하였다.
최윤호는 일제강점기 미국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고 귀국 후 농민 교육 등에 힘쓴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났다.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학, 철학 등을 전공하였다. 조선의 사립 교육과 농민 교육을 연구하였고,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아울러 농촌 계몽과 농민 교육에도 힘썼다. 1937년 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건강 악화로 가출옥하였다. 1939년 2월 사망하였으며,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최윤호 (崔允鎬)
최윤호는 일제강점기 미국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고 귀국 후 농민 교육 등에 힘쓴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났다.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학, 철학 등을 전공하였다. 조선의 사립 교육과 농민 교육을 연구하였고,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아울러 농촌 계몽과 농민 교육에도 힘썼다. 1937년 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건강 악화로 가출옥하였다. 1939년 2월 사망하였으며,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