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직뉴주식회사(京城織紐株式會社)
발기인은 안태영(安泰瑩)·김성기·김용태(金溶泰)·조종서(趙鍾緖)·이정규·김용달(金容達)·박승원(朴承元) 등 8명이었고, 자본금은 10만원, 총 주식 수는 2000주였으나 그 반은 공모할 예정이었다. 1912년 5월 사장에 윤치소(尹致昭), 전무에 안태영, 이사에 김용태, 감사에 장도(張燾)·박만서(朴晩緖) 등으로 구성되었다. 회사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이 설립한 공업 회사 중 가장 큰 규모로, 1911년 당시 낭뉴편기(囊紐編機) 40대, 요대편기(腰帶編機) 8대, 단임기(端袵機) 26대 등의 기계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주요 생산품은 허리띠·대님·주머니끈 등 끈 종류였고, 양말·장갑 등도 생산했으며, 약간의 직물도 생산했다. 1915년의 경우 직뉴생산이 전체 생산액의 37%를 차지하였고, 1917년의 경우 서울 전체의 끈 생산액 중 47.9%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