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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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문묘·향교·서원 등의 출입문을 가리키는 유교용어. 신삼문. 신문을 셋으로 나누어 만든 것은 신의 출입과 사람의 출입을 구분하기 위함이며, 엄격히 따진다면 3문 중 중앙은 신문이고 양쪽의 문은 인문(人門)이라 하였다. 신문은 항상 닫아 두는 것이 상례이고, 인문은 열어 두어 일반 참배객의 내왕을 허용하고 있다. 중앙의 신문은 춘추 제향이나 삭망(朔望) 때 열어서 헌관(獻官)만 출입하게 하고, 일반 제관은 동문으로 들어가서 서문으로 나오도록 출입이 명시되어 있다. 신문의 건축양식은 대동소이하여 일주문·이주문·삼주문의 형태로 되어 있고, 크기는 묘원(廟院)의 규모에 따라 정하는 것이 상례일 뿐 일정한 규격이 없다. 또한, 묘원의 크기와 규모에 따라 외삼문만 있고 내삼문이 없는 경우도 있어 일정하지 않다.
신문 (神門)
종묘·문묘·향교·서원 등의 출입문을 가리키는 유교용어. 신삼문. 신문을 셋으로 나누어 만든 것은 신의 출입과 사람의 출입을 구분하기 위함이며, 엄격히 따진다면 3문 중 중앙은 신문이고 양쪽의 문은 인문(人門)이라 하였다. 신문은 항상 닫아 두는 것이 상례이고, 인문은 열어 두어 일반 참배객의 내왕을 허용하고 있다. 중앙의 신문은 춘추 제향이나 삭망(朔望) 때 열어서 헌관(獻官)만 출입하게 하고, 일반 제관은 동문으로 들어가서 서문으로 나오도록 출입이 명시되어 있다. 신문의 건축양식은 대동소이하여 일주문·이주문·삼주문의 형태로 되어 있고, 크기는 묘원(廟院)의 규모에 따라 정하는 것이 상례일 뿐 일정한 규격이 없다. 또한, 묘원의 크기와 규모에 따라 외삼문만 있고 내삼문이 없는 경우도 있어 일정하지 않다.
커뮤니케이션의 한 매체인 신문지 또는 그 신문지를 매체로 사용하는 언론현상. 신문은 커뮤니케이션의 한 매체인 신문지 또는 그 신문지를 매체로 사용하는 언론현상이다. 뉴스나 정보를 수집·처리·제작하여 신문지라는 특정한 대중매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정기적으로 제공하고, 그 대가로 이윤을 추구하는 동시에 공공성을 지닌 문화적인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일컫는다. 신문은 보도기능, 사회현상에 대한 해설·논평기능, 오락기능, 광고기능을 수행한다.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발간하던 조보가 있었고, 근대의 신문은 1883년의 『한성순보』에서 비롯되어 개화기,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인터넷신문으로 영역이 확장되었다.# 개설 넓은 의미로는 신문 · 방송 · 잡지 · 출판 등 모든 언론현상을 지칭하기도...
신문 (新聞)
커뮤니케이션의 한 매체인 신문지 또는 그 신문지를 매체로 사용하는 언론현상. 신문은 커뮤니케이션의 한 매체인 신문지 또는 그 신문지를 매체로 사용하는 언론현상이다. 뉴스나 정보를 수집·처리·제작하여 신문지라는 특정한 대중매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정기적으로 제공하고, 그 대가로 이윤을 추구하는 동시에 공공성을 지닌 문화적인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일컫는다. 신문은 보도기능, 사회현상에 대한 해설·논평기능, 오락기능, 광고기능을 수행한다.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발간하던 조보가 있었고, 근대의 신문은 1883년의 『한성순보』에서 비롯되어 개화기,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인터넷신문으로 영역이 확장되었다.# 개설 넓은 의미로는 신문 · 방송 · 잡지 · 출판 등 모든 언론현상을 지칭하기도...
1945년에, 북한에서 조선노동당의 기관지로 창간한 신문. # 개설 북한의 대외적 입장을 공식 대변하는 대표적인 신문이다. 1945년 11월 1일에 창간되어 발행부수가 150만 부인 북한 최대의 신문이며, 6면 발행의 조간이다. # 편찬/발간 경위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8·15광복 후 대중조작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인 신문에 눈을 돌려 1945년 10월 13일 공산당의 결정으로 1945년 11월 1일부터 『정로(正路)』라는 제호의 신문을 발간하였다. 그 후 1946년 8월 30일 노동당 제1차대회에서 제호를 『노동신문(勞動新聞)』으로 개칭하였으며, 당시 신민당 기관지인 『전진(前進)』을 흡수하여 같은 해 9월 1일부터 『로동신문』이라는 제호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당기관지의 최초발행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1970년 12월 20일 정령(政令...
노동신문 (勞動新聞)
1945년에, 북한에서 조선노동당의 기관지로 창간한 신문. # 개설 북한의 대외적 입장을 공식 대변하는 대표적인 신문이다. 1945년 11월 1일에 창간되어 발행부수가 150만 부인 북한 최대의 신문이며, 6면 발행의 조간이다. # 편찬/발간 경위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8·15광복 후 대중조작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인 신문에 눈을 돌려 1945년 10월 13일 공산당의 결정으로 1945년 11월 1일부터 『정로(正路)』라는 제호의 신문을 발간하였다. 그 후 1946년 8월 30일 노동당 제1차대회에서 제호를 『노동신문(勞動新聞)』으로 개칭하였으며, 당시 신민당 기관지인 『전진(前進)』을 흡수하여 같은 해 9월 1일부터 『로동신문』이라는 제호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당기관지의 최초발행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1970년 12월 20일 정령(政令...
재일조선거류민단에서 민단 중앙총본부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하여 1947년에 창간한 신문. 기관지. # 개설 재일조선거류민단(在日朝鮮居留民團)이 1947년 2월 21일 박준(朴準)을 발행인으로 창간하여 9호(1947년 6월 30일자)까지 매월 발간한 기관지로, 약 10만부 정도가 발행되었다가 『민주신문』으로 개칭되었다. # 발간 경위 1945년 8월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재일한국인들 중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우파세력이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약칭 건청)을 결성하였다. 이어 항일독립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 등 아나키스트들이 10월 27일 뒤늦게 석방된 박열(朴烈)을 위원장으로 한 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을 창립하였다. 이에 두 단체가 합동하여 1946년 10월 3일 재일조선거류민단...
민단신문 (民團新聞)
재일조선거류민단에서 민단 중앙총본부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하여 1947년에 창간한 신문. 기관지. # 개설 재일조선거류민단(在日朝鮮居留民團)이 1947년 2월 21일 박준(朴準)을 발행인으로 창간하여 9호(1947년 6월 30일자)까지 매월 발간한 기관지로, 약 10만부 정도가 발행되었다가 『민주신문』으로 개칭되었다. # 발간 경위 1945년 8월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재일한국인들 중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우파세력이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약칭 건청)을 결성하였다. 이어 항일독립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 등 아나키스트들이 10월 27일 뒤늦게 석방된 박열(朴烈)을 위원장으로 한 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을 창립하였다. 이에 두 단체가 합동하여 1946년 10월 3일 재일조선거류민단...
1946년에, 대구에서 『남선경제신문』을 모체로 창간한 일간 신문. # 편찬/발간 경위 1946년 3월 1일 우병진(禹炳進)을 발행인으로 대구시 대안동에서 창간된 『남선경제신문』을 모체로 하였다. 이 신문은 1950년 8월 1일『대구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었고, 같은 해 10월 1일 천주교 대구대교구유지재단(大邱大敎區維持財團)에서 지령 제1,339호부터 인수하여 타블로이드판 2면을 발행하였으며, 초대사장에 최덕홍(崔德弘)이 취임하였다. 그 뒤 1960년 7월 1일 전국지로 발돋움하면서 지령 제4,780호부터 『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발행하다가, 1980년 11월 30일 언론기관통폐합조치로 『영남일보』의 전체 인원과 시설을 인수하여, 12월 1일(지령 1만 1198호)부터 다시 『대구매일신문』으로 개제하여 발행하였고...
매일신문 (每日新聞)
1946년에, 대구에서 『남선경제신문』을 모체로 창간한 일간 신문. # 편찬/발간 경위 1946년 3월 1일 우병진(禹炳進)을 발행인으로 대구시 대안동에서 창간된 『남선경제신문』을 모체로 하였다. 이 신문은 1950년 8월 1일『대구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었고, 같은 해 10월 1일 천주교 대구대교구유지재단(大邱大敎區維持財團)에서 지령 제1,339호부터 인수하여 타블로이드판 2면을 발행하였으며, 초대사장에 최덕홍(崔德弘)이 취임하였다. 그 뒤 1960년 7월 1일 전국지로 발돋움하면서 지령 제4,780호부터 『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발행하다가, 1980년 11월 30일 언론기관통폐합조치로 『영남일보』의 전체 인원과 시설을 인수하여, 12월 1일(지령 1만 1198호)부터 다시 『대구매일신문』으로 개제하여 발행하였고...
1947년에, 부산에서 김형두가 불편부당과 시시비비를 사시(社是)로 창간한 일간 신문. # 편찬/발간 경위 1947년 9월 1일 부산에서 김형두(金炯斗)가 주체가 되어 『동아산업신보(東亞産業新報)』와 주간 『수산신문(水産新聞)』을 통합하여 『산업신문(産業新聞)』으로 출발하였다. 타블로이드판으로 발행되었으며, 사옥은 당시 부산시 중구 동광동에 두었다. 1950년 8월 19일에는 제호를 『국제신보(國際新報)』로 바꾸었고, 1977년 6월 1일에는 다시 『국제신문』으로 바꾸었다. # 내용 불편부당과 시시비비를 사시(社是)로 하고 국시선양·언론창달·문화향상을 편집방침으로 하였다. 1948년 1월부터는 부산에서 최초로 갱지(更紙)를 사용하고 대판(大版)으로 발행하였으나 곧 경영난에 부닥쳤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국제신문 (國際新聞)
1947년에, 부산에서 김형두가 불편부당과 시시비비를 사시(社是)로 창간한 일간 신문. # 편찬/발간 경위 1947년 9월 1일 부산에서 김형두(金炯斗)가 주체가 되어 『동아산업신보(東亞産業新報)』와 주간 『수산신문(水産新聞)』을 통합하여 『산업신문(産業新聞)』으로 출발하였다. 타블로이드판으로 발행되었으며, 사옥은 당시 부산시 중구 동광동에 두었다. 1950년 8월 19일에는 제호를 『국제신보(國際新報)』로 바꾸었고, 1977년 6월 1일에는 다시 『국제신문』으로 바꾸었다. # 내용 불편부당과 시시비비를 사시(社是)로 하고 국시선양·언론창달·문화향상을 편집방침으로 하였다. 1948년 1월부터는 부산에서 최초로 갱지(更紙)를 사용하고 대판(大版)으로 발행하였으나 곧 경영난에 부닥쳤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경남신문사에서 지역 주민들의 여론을 대변하고자 1946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 발간 경위 및 변천 1946년 3월 1일 김종신(金鍾信)을 발행인으로 하여 마산에서 창간된 『남선신문(南鮮新聞)』이 그 모체이다. 1947년 12월 18일에는 김형윤(金亨潤)이 판권과 시설을 인수하여 제호를 ‘남조선민보(南朝鮮民報)’로 바꾸어 발행하였으나, 6·25사변중인 1950년 8월 9일 마산지구 계엄사령관의 명으로 ‘마산일보(馬山日報)’로 개제되었다. 1967년 1월 1일부터는 ‘경남매일신문’이라는 한글 제호로 바꾸었다가, 1969년 3월 15일 신축사옥으로 옮긴 뒤 다시 한글 제호인 ‘경남매일’로 변경하였다. 1980년 8월 30일부터는 마산 · 창원 등지의 기업인 및 유지들이 참여하면서 이중(李中)을 사장으로 하여...
경남신문 (慶南新聞)
경남신문사에서 지역 주민들의 여론을 대변하고자 1946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 발간 경위 및 변천 1946년 3월 1일 김종신(金鍾信)을 발행인으로 하여 마산에서 창간된 『남선신문(南鮮新聞)』이 그 모체이다. 1947년 12월 18일에는 김형윤(金亨潤)이 판권과 시설을 인수하여 제호를 ‘남조선민보(南朝鮮民報)’로 바꾸어 발행하였으나, 6·25사변중인 1950년 8월 9일 마산지구 계엄사령관의 명으로 ‘마산일보(馬山日報)’로 개제되었다. 1967년 1월 1일부터는 ‘경남매일신문’이라는 한글 제호로 바꾸었다가, 1969년 3월 15일 신축사옥으로 옮긴 뒤 다시 한글 제호인 ‘경남매일’로 변경하였다. 1980년 8월 30일부터는 마산 · 창원 등지의 기업인 및 유지들이 참여하면서 이중(李中)을 사장으로 하여...
1972년에, 한국교직원공제회에서 교육 문화의 창달과 교수·학습자료의 제공을 목적으로 창간한 신문. 1998년 6월 3일에 대한교원신문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사시(社是)는 ‘교육정론(敎育正論)’으로 교육문화의 창달과 교수·학습자료의 제공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타블로이드 배판 12면으로 격주간으로 발행되었으며, 발행부수는 35만부였다. 비매품으로 한국교직원공제회 회원의 자택과 교육관계기관 등에 배포하였다. 주요내용으로 정부 교육정책을 비롯하여 교육계 소식과 국내외 교육정보, 교원공제회의 경영 현황 및 사업내용, 각종 교양정보 등을 게재하였다. 신문에 연재해오던 『한국의 교육사상가』·『광복교육 50년』·『수업모형백과』·『교육평가모형』 등을 출판했으며, 전국 규모의 교단수기 공모사업...
한국교직원신문 (韓國敎職員新聞)
1972년에, 한국교직원공제회에서 교육 문화의 창달과 교수·학습자료의 제공을 목적으로 창간한 신문. 1998년 6월 3일에 대한교원신문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사시(社是)는 ‘교육정론(敎育正論)’으로 교육문화의 창달과 교수·학습자료의 제공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타블로이드 배판 12면으로 격주간으로 발행되었으며, 발행부수는 35만부였다. 비매품으로 한국교직원공제회 회원의 자택과 교육관계기관 등에 배포하였다. 주요내용으로 정부 교육정책을 비롯하여 교육계 소식과 국내외 교육정보, 교원공제회의 경영 현황 및 사업내용, 각종 교양정보 등을 게재하였다. 신문에 연재해오던 『한국의 교육사상가』·『광복교육 50년』·『수업모형백과』·『교육평가모형』 등을 출판했으며, 전국 규모의 교단수기 공모사업...
1919년에, 간도 용정촌에서 구춘성 등이 해외 독립지사들의 활동 상황을 전하기 위하여 창간한 교민 신문. # 내용 같은 해 6월 5일 만주 간도 용정촌(龍井村)에서 대한국민회장(大韓國民會長) 구춘선(具春先)과 이익찬(李翼燦)·윤준희(尹駿熙)·방원성(方遠成) 등이 주간 신문으로 창간하였다. 영국인 마틴(Martin)이 경영하는 제창병원(濟昌病院)의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등사판으로 만들었다. 등사판으로 만든 신문이어서 조판이 따로 없고, 지면형태는 단수를 구분하지 않은 1단제로 되어 있다. 보통신문보다 작은 크기로 되었으며, 제호는 이중음각(二重陰刻)으로 그려 지면의 상단에서 하단까지 이어졌다. 1919년 6월 5일의 「근고해외동포형제(謹告海外同胞兄弟)」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정의인도(正義人道)를 무시하는 저 무도막지한...
대한독립신문 (大韓獨立新聞)
1919년에, 간도 용정촌에서 구춘성 등이 해외 독립지사들의 활동 상황을 전하기 위하여 창간한 교민 신문. # 내용 같은 해 6월 5일 만주 간도 용정촌(龍井村)에서 대한국민회장(大韓國民會長) 구춘선(具春先)과 이익찬(李翼燦)·윤준희(尹駿熙)·방원성(方遠成) 등이 주간 신문으로 창간하였다. 영국인 마틴(Martin)이 경영하는 제창병원(濟昌病院)의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등사판으로 만들었다. 등사판으로 만든 신문이어서 조판이 따로 없고, 지면형태는 단수를 구분하지 않은 1단제로 되어 있다. 보통신문보다 작은 크기로 되었으며, 제호는 이중음각(二重陰刻)으로 그려 지면의 상단에서 하단까지 이어졌다. 1919년 6월 5일의 「근고해외동포형제(謹告海外同胞兄弟)」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정의인도(正義人道)를 무시하는 저 무도막지한...
1945년에, 대한 독립 협회에서 이승만의 환국을 맞아 창간한 일간 신문. 타블로이드판 2면의 등사석판인쇄 신문으로 서울 을지로 2가에서 발행하였다. 발행인 겸 편집인은 고정휘(高政輝)였으나 1946년 3월부터는 유병민(劉秉敏)으로 바뀌고 곧 휴간을 하였다가 6월 20일에 속간되었다. 이 신문은 이승만을 지지하여 그 첫호에서 「건국의 성웅 이승만박사를 맞이하여」라는 논설까지 실었다. 대동단결을 내세운 대한독립협회의 기관지적 성격을 띠었으며 신탁통치에도 앞장서서 반대하였다. 1946년 7월 7일에는 콜레라가 발생하였다는 기사를 보도하여 서울시로부터 고발을 당하여 오장환(吳章煥)·고영환(高永煥)이 구금을 당하는 등 필화를 입었다. 1947년 2월 14일자(제267호) 신문에서는 “민주언론 창달의 임무를 일층...
대한독립신문 (大韓獨立新聞)
1945년에, 대한 독립 협회에서 이승만의 환국을 맞아 창간한 일간 신문. 타블로이드판 2면의 등사석판인쇄 신문으로 서울 을지로 2가에서 발행하였다. 발행인 겸 편집인은 고정휘(高政輝)였으나 1946년 3월부터는 유병민(劉秉敏)으로 바뀌고 곧 휴간을 하였다가 6월 20일에 속간되었다. 이 신문은 이승만을 지지하여 그 첫호에서 「건국의 성웅 이승만박사를 맞이하여」라는 논설까지 실었다. 대동단결을 내세운 대한독립협회의 기관지적 성격을 띠었으며 신탁통치에도 앞장서서 반대하였다. 1946년 7월 7일에는 콜레라가 발생하였다는 기사를 보도하여 서울시로부터 고발을 당하여 오장환(吳章煥)·고영환(高永煥)이 구금을 당하는 등 필화를 입었다. 1947년 2월 14일자(제267호) 신문에서는 “민주언론 창달의 임무를 일층...
1973년에, 서울에서 한국 무역 협회가 『산업경제 신문』을 인수하여 창간한 일간 신문. # 발간 경위 및 변천 1973년 9월 27일 한국무역협회가 주체가 되어 『산업경제신문』을 인수하여, 12월 21일 『일간내외경제(日刊內外經濟)』를 창간하였다. 소재지는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3가 1-12번지였다. 당시는 오일쇼크와 자원 파동으로 국제적인 불황이 계속되어, 세계의 경제 동향과 정확한 해외 산업정보가 그 어느 때보다 아쉬웠던 시기였다. 이와 같은 국가적 ·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더욱 풍부하고 정확한 해외 산업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우리 경제의 난국 타개에 일익이 될 것을 기치로 내세웠다. 주 48면, 조간으로 발행되었으며, 지면구성은 1면은 주로 해외뉴스와 국내뉴스, 2면은 국내경제, 3면은 주요...
내외경제신문 (內外經濟新聞)
1973년에, 서울에서 한국 무역 협회가 『산업경제 신문』을 인수하여 창간한 일간 신문. # 발간 경위 및 변천 1973년 9월 27일 한국무역협회가 주체가 되어 『산업경제신문』을 인수하여, 12월 21일 『일간내외경제(日刊內外經濟)』를 창간하였다. 소재지는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3가 1-12번지였다. 당시는 오일쇼크와 자원 파동으로 국제적인 불황이 계속되어, 세계의 경제 동향과 정확한 해외 산업정보가 그 어느 때보다 아쉬웠던 시기였다. 이와 같은 국가적 ·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더욱 풍부하고 정확한 해외 산업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우리 경제의 난국 타개에 일익이 될 것을 기치로 내세웠다. 주 48면, 조간으로 발행되었으며, 지면구성은 1면은 주로 해외뉴스와 국내뉴스, 2면은 국내경제, 3면은 주요...
1945년에, 서울신문사에서 『매일신보』를 인수하여 창간한 일간 신문. # 편찬/발간 경위 1945년 11월 22일 조선총독부 국문판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每日新報≫의 사옥과 시설을 인수하여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꾸고 지령(紙齡)을 계승하여 발행하였다. 1998년 11월 11일 제호를 ‘대한매일’로 변경하고 지령 제18,503호부터 발간하였다. 이 지령은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新報≫를 모체로 그 뒤의 ≪매일신보 每日申報≫와 ≪매일신보 每日新報≫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후 2004년 1월부로 ‘대한매일’이 다시 ‘서울신문’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내용 초대 사장은 오세창(吳世昌), 주필은 이관구(李寬求), 편집국장은 홍기문(洪起文)이 담당하였다. 일제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서울신문 (서울新聞)
1945년에, 서울신문사에서 『매일신보』를 인수하여 창간한 일간 신문. # 편찬/발간 경위 1945년 11월 22일 조선총독부 국문판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每日新報≫의 사옥과 시설을 인수하여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꾸고 지령(紙齡)을 계승하여 발행하였다. 1998년 11월 11일 제호를 ‘대한매일’로 변경하고 지령 제18,503호부터 발간하였다. 이 지령은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新報≫를 모체로 그 뒤의 ≪매일신보 每日申報≫와 ≪매일신보 每日新報≫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후 2004년 1월부로 ‘대한매일’이 다시 ‘서울신문’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내용 초대 사장은 오세창(吳世昌), 주필은 이관구(李寬求), 편집국장은 홍기문(洪起文)이 담당하였다. 일제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1897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종교적 내용 외에도 국내외 뉴스, 농업, 공업, 문화 소식 등을 전하기 위하여 창간한 개신교 신문. 1897년 2월 『죠션그리스도인회보』로서 창간되어 1904년에 개명된 감리교 측의 『그리스도인회보』와 더불어 기독교 신문의 양대 지주로서 활동하다가 1905년 7월 1일 두 신문이 합해져 순 한글 주간신문 『그리스도신문』이 되었다. 편집책임은 게일(Gale, J. S., 奇一)이 맡았으며, 케이블(Cable, M.)·무스(Moose, J. R.)·무어(Moore, S. F.) 등이 편집인이었다. 언더우드의 『그리스도신문』이 기독교 이외의 농업·공업관계의 내용이 많았던 반면, 국권상실 이후의 신문은 기독교 위주의 내용이 많았다. 1907년 12월 3일부터 『예수교신보』로 이름이 바뀌어 1910년까지 약 3년간 격...
그리스도신문 (←Kristos新聞)
1897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종교적 내용 외에도 국내외 뉴스, 농업, 공업, 문화 소식 등을 전하기 위하여 창간한 개신교 신문. 1897년 2월 『죠션그리스도인회보』로서 창간되어 1904년에 개명된 감리교 측의 『그리스도인회보』와 더불어 기독교 신문의 양대 지주로서 활동하다가 1905년 7월 1일 두 신문이 합해져 순 한글 주간신문 『그리스도신문』이 되었다. 편집책임은 게일(Gale, J. S., 奇一)이 맡았으며, 케이블(Cable, M.)·무스(Moose, J. R.)·무어(Moore, S. F.) 등이 편집인이었다. 언더우드의 『그리스도신문』이 기독교 이외의 농업·공업관계의 내용이 많았던 반면, 국권상실 이후의 신문은 기독교 위주의 내용이 많았다. 1907년 12월 3일부터 『예수교신보』로 이름이 바뀌어 1910년까지 약 3년간 격...
1982년에, 미국 뉴욕에서 교포들의 동정과 국내 정치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창간한 교민 신문. # 내용 1982년 5월 31일 영문제호 『The Mi-Joo Daily News』로 창간되었으며, 매일 20면을 발행하는 미국 교포사회의 유일한 신문이었다. 교포들의 동정에서부터 본국 정치 등 다양하게 뉴스를 취급하면서 편집도 대담성있게 하여 독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정치뉴스도 중립성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가 보이며, 문화·과학 등 다방면의 종합지 성격을 띠고 있다. 가로짜기 9단제에 본문은 순한글, 기사제목은 국한문혼용으로 선명한 인쇄체이다. 운영은 여러 교포가 합자로 하는듯, 회장에 이응호(李應浩), 부회장에 박상익(朴相益), 사주 겸 발행인에 허명회(許銘會), 사장 겸 편집인에 임춘훈(林椿薰), 초대사장은 조광남(趙光男) 등 제호...
미주매일신문 (美洲每日新聞)
1982년에, 미국 뉴욕에서 교포들의 동정과 국내 정치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창간한 교민 신문. # 내용 1982년 5월 31일 영문제호 『The Mi-Joo Daily News』로 창간되었으며, 매일 20면을 발행하는 미국 교포사회의 유일한 신문이었다. 교포들의 동정에서부터 본국 정치 등 다양하게 뉴스를 취급하면서 편집도 대담성있게 하여 독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정치뉴스도 중립성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가 보이며, 문화·과학 등 다방면의 종합지 성격을 띠고 있다. 가로짜기 9단제에 본문은 순한글, 기사제목은 국한문혼용으로 선명한 인쇄체이다. 운영은 여러 교포가 합자로 하는듯, 회장에 이응호(李應浩), 부회장에 박상익(朴相益), 사주 겸 발행인에 허명회(許銘會), 사장 겸 편집인에 임춘훈(林椿薰), 초대사장은 조광남(趙光男) 등 제호...
1958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소무원이 창간한 신문. 체재는 1단 15자, 15단제로 일본신문들과 같다. 특징은 대한민국의 국익에 손상되는 기사는 취급하지 않는다는 편집방침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1981년 신년호의 연두사인 「재일한국인의 방향」에서 과거 일본의 대한정책(對韓政策)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재일한국인이 1980년대에 들어와서 해야 할 일은 과거에 받은 고통을 후손들에게는 물려주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한편, 북한에 대해서는 김일성 우상화정책이나 북한 통일정책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도 가하고 있다. 뉴스면은 일본 전국 교포들의 움직임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써 그 단합을 도모하고 있으며, 교포들의 광고도 상당히 많이 게재하고 있다. 1997년 현재 평균 5,000부의 발행부수를 가지고...
공동신문 (共同新聞)
1958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소무원이 창간한 신문. 체재는 1단 15자, 15단제로 일본신문들과 같다. 특징은 대한민국의 국익에 손상되는 기사는 취급하지 않는다는 편집방침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1981년 신년호의 연두사인 「재일한국인의 방향」에서 과거 일본의 대한정책(對韓政策)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재일한국인이 1980년대에 들어와서 해야 할 일은 과거에 받은 고통을 후손들에게는 물려주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한편, 북한에 대해서는 김일성 우상화정책이나 북한 통일정책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도 가하고 있다. 뉴스면은 일본 전국 교포들의 움직임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써 그 단합을 도모하고 있으며, 교포들의 광고도 상당히 많이 게재하고 있다. 1997년 현재 평균 5,000부의 발행부수를 가지고...
1907년에, 이완용이 언론 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이인직으로 하여금 창간한 친일 신문. 이 신문은 이완용(李完用)이 언론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이인직으로 하여금 경영하게 한 것으로, 이완용내각의 기관지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발행소는 서울회동(會洞 : 지금의 회현동) 85통 4호였으며, 자본금은 2만원이었다. 사장에는 이인직, 총무·발행 겸 편집인에 신광희(申光熙), 주필은 최영수(崔永秀)였다. 『대한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 신문은 정부의 탁지부(度支部)로부터 매월 500원씩 보조를 받았으며, 1909년 11월 활자개량을 위하여 이완용으로부터 1,000원의 기부금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신문은 창간 이후 줄곧 친일정권의 시정을 적극 지지, 선전하였으며, 1909년 11월 14일 『국민신보(國民新報)』·『한성신보...
대한신문 (大韓新聞)
1907년에, 이완용이 언론 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이인직으로 하여금 창간한 친일 신문. 이 신문은 이완용(李完用)이 언론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이인직으로 하여금 경영하게 한 것으로, 이완용내각의 기관지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발행소는 서울회동(會洞 : 지금의 회현동) 85통 4호였으며, 자본금은 2만원이었다. 사장에는 이인직, 총무·발행 겸 편집인에 신광희(申光熙), 주필은 최영수(崔永秀)였다. 『대한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 신문은 정부의 탁지부(度支部)로부터 매월 500원씩 보조를 받았으며, 1909년 11월 활자개량을 위하여 이완용으로부터 1,000원의 기부금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신문은 창간 이후 줄곧 친일정권의 시정을 적극 지지, 선전하였으며, 1909년 11월 14일 『국민신보(國民新報)』·『한성신보...
1972년, 천주교 대구교구에서 남방천주교청년회의 기관지로 창간한 천주교 신문. 1953년 3월 7일자 제122호부터는 『가톨릭신보』로 개칭되었고, 1954년 1월 15일자 제137호부터 『가톨릭시보』로 바뀌면서 교구 당국에서 가톨릭시보사로 신문에 관한 사항이 모두 이관되었다. 1960년 1월 3일자 제210호부터는 격 주간에서 주간으로 증간되었고, 1961년 11월에는 대구 『매일신보』 사옥으로 이전하여 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1980년 4월 6일 창간 53주년을 기하여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체재는 국한문 혼용으로 창간 당시 B5배판 4면이었으나 1928년에는 B4판으로, 그리고 1959년에는 다시 배대판으로 확장되었다. 또 창간 당시에는 매달 1일 발행의 월간지였으나 격주간지, 주간지가 되었다. 초교구적 신문인...
가톨릭신문 (Catholic新聞)
1972년, 천주교 대구교구에서 남방천주교청년회의 기관지로 창간한 천주교 신문. 1953년 3월 7일자 제122호부터는 『가톨릭신보』로 개칭되었고, 1954년 1월 15일자 제137호부터 『가톨릭시보』로 바뀌면서 교구 당국에서 가톨릭시보사로 신문에 관한 사항이 모두 이관되었다. 1960년 1월 3일자 제210호부터는 격 주간에서 주간으로 증간되었고, 1961년 11월에는 대구 『매일신보』 사옥으로 이전하여 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1980년 4월 6일 창간 53주년을 기하여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체재는 국한문 혼용으로 창간 당시 B5배판 4면이었으나 1928년에는 B4판으로, 그리고 1959년에는 다시 배대판으로 확장되었다. 또 창간 당시에는 매달 1일 발행의 월간지였으나 격주간지, 주간지가 되었다. 초교구적 신문인...
1898년에, 『협셩회 회보』를 개제하여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 신문. # 개설 당시 발간되고 있던 ≪협셩회회보≫를 개제하여 창간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일간신문이다. 사장에는 양홍묵(梁鴻默), 기재원(記載員:지금의 기자)에 이승만(李承晩) · 최정식(崔廷植), 회계에 유영석(柳永錫) 등이 참여하였다. # 내용 원래 ≪협셩회회보≫는 배재학당 구내에서 발행하였으나 ≪ᄆᆡ일신문≫으로 발전한 뒤에는 사옥을 남대문 안, 전(前) 싸전(쌀과 그 밖의 곡식을 파는 가게)도가로 정하고 훈동에 있던 이문사(以文社)의 활판을 옮겨다 발행하였다. 이 신문은 1898년 3월 19일에 열린 협성회 통상회 석상에서 회보의 주간 발행이 신문으로서의 현실성을 추구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고 주간에서 일간으로 고쳐 발행할 것을...
매일신문 (每日新聞)
1898년에, 『협셩회 회보』를 개제하여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 신문. # 개설 당시 발간되고 있던 ≪협셩회회보≫를 개제하여 창간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일간신문이다. 사장에는 양홍묵(梁鴻默), 기재원(記載員:지금의 기자)에 이승만(李承晩) · 최정식(崔廷植), 회계에 유영석(柳永錫) 등이 참여하였다. # 내용 원래 ≪협셩회회보≫는 배재학당 구내에서 발행하였으나 ≪ᄆᆡ일신문≫으로 발전한 뒤에는 사옥을 남대문 안, 전(前) 싸전(쌀과 그 밖의 곡식을 파는 가게)도가로 정하고 훈동에 있던 이문사(以文社)의 활판을 옮겨다 발행하였다. 이 신문은 1898년 3월 19일에 열린 협성회 통상회 석상에서 회보의 주간 발행이 신문으로서의 현실성을 추구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고 주간에서 일간으로 고쳐 발행할 것을...
기독교 복음 전도, 기독교 문화 발전 등을 목적으로 김우현, 전영택 등이 1938년에 창간한 개신교 신문. # 내용 발행인 김우현(金禹鉉), 편집인 전영택(田榮澤)이었다. 1938년 7월 8일 신문지법에 따라 허가를 얻고 8월 16일 창간되어 3년 8개월 동안 간행되다가 1942년 4월 23일 지령 164호로 폐간되었다. 블랭킷 판 4면에 10단제로 편집한 주간신문이었다. 사장 김우현이 일본경찰에 구속되어 유치장에서 폐간계를 내었다. 발행목적은 기독교복음전도·기독교문화발전·국가봉공에 중점을 두었고, 제1호는 국문판과 일어판으로 되어 있다. - 『한국기독교신문·잡지100년사』(윤춘병,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기독신문 (基督新聞)
기독교 복음 전도, 기독교 문화 발전 등을 목적으로 김우현, 전영택 등이 1938년에 창간한 개신교 신문. # 내용 발행인 김우현(金禹鉉), 편집인 전영택(田榮澤)이었다. 1938년 7월 8일 신문지법에 따라 허가를 얻고 8월 16일 창간되어 3년 8개월 동안 간행되다가 1942년 4월 23일 지령 164호로 폐간되었다. 블랭킷 판 4면에 10단제로 편집한 주간신문이었다. 사장 김우현이 일본경찰에 구속되어 유치장에서 폐간계를 내었다. 발행목적은 기독교복음전도·기독교문화발전·국가봉공에 중점을 두었고, 제1호는 국문판과 일어판으로 되어 있다. - 『한국기독교신문·잡지100년사』(윤춘병,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1896년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 『독립신문』은 1896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다.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구성되었다. 계몽적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한 서재필과 유길준, 개화파 내각의 합작으로 탄생했다. 거액의 정부 예산이 지원되어 1896년 4월 7일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근대민족주의·민주주의·자주화 근대화 사상을 강조하며 국민을 교육·계몽하는 일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독립협회가 수구파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결국 정부의 매각 강요에 굴복해 1899년 12월 4일자 신문을 끝으로 종간했다. 정부는 신문사 매수 후 속간을 약속했다가 영구 폐간시켰다.당시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개화파 정부는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단행하면서도 일본측의 방해로 그들의 신문은 가지지 못하였다....
독립신문 (獨立新聞)
1896년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 『독립신문』은 1896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다.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구성되었다. 계몽적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한 서재필과 유길준, 개화파 내각의 합작으로 탄생했다. 거액의 정부 예산이 지원되어 1896년 4월 7일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근대민족주의·민주주의·자주화 근대화 사상을 강조하며 국민을 교육·계몽하는 일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독립협회가 수구파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결국 정부의 매각 강요에 굴복해 1899년 12월 4일자 신문을 끝으로 종간했다. 정부는 신문사 매수 후 속간을 약속했다가 영구 폐간시켰다.당시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개화파 정부는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단행하면서도 일본측의 방해로 그들의 신문은 가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