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노영기"
검색결과 총 41건
강영훈은 일제강점기~현대에 일본군 소위, 대한민국 연합참모본부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만주 건국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동원되었다가, 광복과 함께 소위로 자동 전역하였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국방부 차관, 연합참모본부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 당시 군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다가 반혁명세력으로 분류되어 구금되었고, 1961년 9월 강제 예편당하였다. 1988년 국무총리에 취임하였고, 1990년 남북총리회담을 이끌었다.
강영훈 (姜英勳)
강영훈은 일제강점기~현대에 일본군 소위, 대한민국 연합참모본부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만주 건국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동원되었다가, 광복과 함께 소위로 자동 전역하였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국방부 차관, 연합참모본부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 당시 군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다가 반혁명세력으로 분류되어 구금되었고, 1961년 9월 강제 예편당하였다. 1988년 국무총리에 취임하였고, 1990년 남북총리회담을 이끌었다.
백인엽은 일제강점기~현대에 일본군 장교, 대한민국 제17연대장, 수도사단장 등을 지낸 군인이다. 일제강점기에 메이지대학과 일본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군에서 장교로 근무하였다. 정부 수립 후 제17연대장, 수도사단장, 육군 제1훈련소장, 제1군단장, 육군 기획관리참모국장 등을 지낸 뒤 1960년 예편하였다. 전역 전인 1958년 선인학원을 설립하였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혁명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1993년 각종 부정과 비리 등으로 인해 학내 분규가 계속되자, 공립화를 조건으로 인천시에 선인학원을 기증하였다.
백인엽 (白仁燁)
백인엽은 일제강점기~현대에 일본군 장교, 대한민국 제17연대장, 수도사단장 등을 지낸 군인이다. 일제강점기에 메이지대학과 일본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군에서 장교로 근무하였다. 정부 수립 후 제17연대장, 수도사단장, 육군 제1훈련소장, 제1군단장, 육군 기획관리참모국장 등을 지낸 뒤 1960년 예편하였다. 전역 전인 1958년 선인학원을 설립하였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혁명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1993년 각종 부정과 비리 등으로 인해 학내 분규가 계속되자, 공립화를 조건으로 인천시에 선인학원을 기증하였다.
안익조는 일제강점기~현대에 만주국군 군의관, 대한민국 제5관구 경찰청장, 제7사단 헌병대장 등을 지낸 의사이자 군인이다. 1929년 도쿄제국대학 수의학과, 1933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였다. 콜럼비아레코드사 경성지점 문예부장을 지내고, 조선연예기업사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만주국군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1937년 소교로 전역하였다. 해방 후 제5관구와 제3관구 경찰청장을 지내고, 1949년 헌병 소령으로 특별임관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부역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 11월 처형되었다.
안익조 (安益祚)
안익조는 일제강점기~현대에 만주국군 군의관, 대한민국 제5관구 경찰청장, 제7사단 헌병대장 등을 지낸 의사이자 군인이다. 1929년 도쿄제국대학 수의학과, 1933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였다. 콜럼비아레코드사 경성지점 문예부장을 지내고, 조선연예기업사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만주국군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1937년 소교로 전역하였다. 해방 후 제5관구와 제3관구 경찰청장을 지내고, 1949년 헌병 소령으로 특별임관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부역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 11월 처형되었다.
양국진은 일제강점기~현대에 만주국군 장교, 대한민국 육군본부 군수국장 등을 역임한 군인이다.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만주의 법정대학을 졸업한 뒤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와 육군 군수학교를 거쳐 만주국군 상위를 지냈다. 해방 직후 경찰에 들어가 경시에 올랐다. 그 뒤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국방경비대 부위로 임관하였다. 육군본부 군수국장, 제2훈련소 소장, 제3군단장 등을 역임하고, 1960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전역 후 군납 업체인 대한종합식품회사 사장을 지냈으며, 1981년 사망하였다.
양국진 (楊國鎭)
양국진은 일제강점기~현대에 만주국군 장교, 대한민국 육군본부 군수국장 등을 역임한 군인이다.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만주의 법정대학을 졸업한 뒤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와 육군 군수학교를 거쳐 만주국군 상위를 지냈다. 해방 직후 경찰에 들어가 경시에 올랐다. 그 뒤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국방경비대 부위로 임관하였다. 육군본부 군수국장, 제2훈련소 소장, 제3군단장 등을 역임하고, 1960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전역 후 군납 업체인 대한종합식품회사 사장을 지냈으며, 1981년 사망하였다.
유재흥은 일제강점기~현대에 일본군 장교를 거쳐 대한민국 육군 참모차장,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근무하다가 해방과 함께 대위로 전역하였다. 이후 군사영어학교를 이수한 뒤 통위부 군수국장, 제6여단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주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등을 지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제7사단장, 제2군단장을 맡았다. 1960년 7월에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고, 전역 이후 주태국대사, 주스웨덴대사, 주이탈리아대사, 국방부장관, 대한석유공사 사장, 성우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유재흥 (劉載興)
유재흥은 일제강점기~현대에 일본군 장교를 거쳐 대한민국 육군 참모차장,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근무하다가 해방과 함께 대위로 전역하였다. 이후 군사영어학교를 이수한 뒤 통위부 군수국장, 제6여단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주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등을 지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제7사단장, 제2군단장을 맡았다. 1960년 7월에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고, 전역 이후 주태국대사, 주스웨덴대사, 주이탈리아대사, 국방부장관, 대한석유공사 사장, 성우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윤우경은 일제강점기~현대에 송화경찰서장, 서울시경찰국장, 내무부 치안국장, 구황실재산사무총국장 등을 역임한 경찰 관료이다. 1900년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태어났으며, 일제강점기에 황해도 송화경찰서장을 지냈다. 해방 후에도 경찰 간부를 두루 지내다가 정부 수립 후 서울시 경찰국 경무과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 헌병 대위로 특별임관되었다가 1951년 서울시경찰국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내무부 치안국장을 거쳐 구황실재산사무총국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혁명재판에서 부정축재 혐의로 처벌받았다.
윤우경 (尹宇景)
윤우경은 일제강점기~현대에 송화경찰서장, 서울시경찰국장, 내무부 치안국장, 구황실재산사무총국장 등을 역임한 경찰 관료이다. 1900년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태어났으며, 일제강점기에 황해도 송화경찰서장을 지냈다. 해방 후에도 경찰 간부를 두루 지내다가 정부 수립 후 서울시 경찰국 경무과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 헌병 대위로 특별임관되었다가 1951년 서울시경찰국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내무부 치안국장을 거쳐 구황실재산사무총국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혁명재판에서 부정축재 혐의로 처벌받았다.
이덕구는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한 사회주의 활동가이다. 일제강점기 학도병으로 동원되어 관동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해방 이후 제주도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사회 과목을 가르쳤다. 1947년 3·10총파업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에 연행되었고, 교사를 그만둔 뒤 남로당 제주도당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한라산으로 입산하여 1948년 4월 3일 발발한 봉기에 참여하였고, 조천, 제주, 구좌면 출신들로 구성된 3·1지대 지대장을 맡았다. 같은 해 8월부터는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949년 사살되었다.
이덕구 (李德九)
이덕구는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한 사회주의 활동가이다. 일제강점기 학도병으로 동원되어 관동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해방 이후 제주도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사회 과목을 가르쳤다. 1947년 3·10총파업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에 연행되었고, 교사를 그만둔 뒤 남로당 제주도당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한라산으로 입산하여 1948년 4월 3일 발발한 봉기에 참여하였고, 조천, 제주, 구좌면 출신들로 구성된 3·1지대 지대장을 맡았다. 같은 해 8월부터는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949년 사살되었다.
조재미는 여수·순천10·19사건 토벌전에 참가하고, 4·19 혁명 당시 서울지구 위수계엄사령관으로 활동한 군인이다.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2기로 졸업하고 조선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정부 수립 후 육군 장교로 여수·순천10·19사건 토벌, 한국전쟁 등에 참가하였다. 1960년 4·19혁명 당시 제15사단 사단장으로 서울지구 위수계엄사령관을 맡았다. 1961년 육군본부 민사국정국장을 지낸 뒤 1963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국영기업체인 대한통운의 이사를 지냈으며, 2008년 사망하였다.
조재미 (趙在美)
조재미는 여수·순천10·19사건 토벌전에 참가하고, 4·19 혁명 당시 서울지구 위수계엄사령관으로 활동한 군인이다.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2기로 졸업하고 조선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정부 수립 후 육군 장교로 여수·순천10·19사건 토벌, 한국전쟁 등에 참가하였다. 1960년 4·19혁명 당시 제15사단 사단장으로 서울지구 위수계엄사령관을 맡았다. 1961년 육군본부 민사국정국장을 지낸 뒤 1963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국영기업체인 대한통운의 이사를 지냈으며, 2008년 사망하였다.
디제이피연합은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 김대중 총재와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총재가 연합하여 선거를 치른 뒤 정권을 공동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한 정치 연합이다. 여기에 포항제철 전 회장 박태준이 새로 합류함으로써 디제이피연합이 완성되고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새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 김종필이 초대 총리에 임명되었다.
디제이피연합 (DJP連合)
디제이피연합은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 김대중 총재와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총재가 연합하여 선거를 치른 뒤 정권을 공동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한 정치 연합이다. 여기에 포항제철 전 회장 박태준이 새로 합류함으로써 디제이피연합이 완성되고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새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 김종필이 초대 총리에 임명되었다.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金大中內亂陰謀造作事件)은 1980년에 신군부 세력이 김대중과 민주화운동 세력의 내란음모를 조작하여 탄압하였던 사건이다. 김대중을 비롯한 24명이 국가보안법, 내란예비음모, 계엄법 위반 등으로 기소되어 1981년 김대중이 사형을 선고받고, 관련자들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2004년 1월 29일 재심에서 법원은 1980년 5 · 18민주화운동을 배후 조종하였다는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과 반공법 위반, 외국환관리법 위반에 대해서는 면소 판결함으로써 사건이 완전 종료되었다.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金大中 內亂陰謀 造作事件)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金大中內亂陰謀造作事件)은 1980년에 신군부 세력이 김대중과 민주화운동 세력의 내란음모를 조작하여 탄압하였던 사건이다. 김대중을 비롯한 24명이 국가보안법, 내란예비음모, 계엄법 위반 등으로 기소되어 1981년 김대중이 사형을 선고받고, 관련자들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2004년 1월 29일 재심에서 법원은 1980년 5 · 18민주화운동을 배후 조종하였다는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과 반공법 위반, 외국환관리법 위반에 대해서는 면소 판결함으로써 사건이 완전 종료되었다.
김대중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내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정치가이다. 1950년대 정계에 입문하여 1980년대까지 정치인으로서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2000년 12월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김대중 (金大中)
김대중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내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정치가이다. 1950년대 정계에 입문하여 1980년대까지 정치인으로서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2000년 12월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박관현은 1980년 5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낸 민주화운동가이다.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활동하였으며, 1980년 5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민족·민주화 성회'를 이끌었다. 1982년 10월 광주교도소에서 재소자 처우 개선과 5·18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전개하다가 사망하였다.
박관현 (朴寬賢)
박관현은 1980년 5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낸 민주화운동가이다.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활동하였으며, 1980년 5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민족·민주화 성회'를 이끌었다. 1982년 10월 광주교도소에서 재소자 처우 개선과 5·18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전개하다가 사망하였다.
윤상원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로,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을 지낸 인물이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들불야학, YWCA 등에서 대안 언론지인 『투사회보』 등을 만들어 시민들의 항쟁을 알렸고, 5월 25일 이후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5월 27일 새벽 최후 항전 때 옛 전라남도 도청 회의실에서 사망하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실제 주인공이다.
윤상원 (尹祥源)
윤상원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로,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을 지낸 인물이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들불야학, YWCA 등에서 대안 언론지인 『투사회보』 등을 만들어 시민들의 항쟁을 알렸고, 5월 25일 이후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5월 27일 새벽 최후 항전 때 옛 전라남도 도청 회의실에서 사망하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실제 주인공이다.
윤한봉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전남북 책임자로 활동하고 1980년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함께 내려진 수배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민주화운동가이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윤한봉 (尹漢琫)
윤한봉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전남북 책임자로 활동하고 1980년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함께 내려진 수배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민주화운동가이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 초대 공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반공연맹 이사장 등을 역임한 군인. 정치인.
김정렬 (金貞烈)
해방 이후 초대 공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반공연맹 이사장 등을 역임한 군인. 정치인.
해방 이후 『산』, 『사랑』, 『안경』 등을 저술한 시인. 정치인.
이효상 (李孝祥)
해방 이후 『산』, 『사랑』, 『안경』 등을 저술한 시인. 정치인.
일민주의는 1949년 이승만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명분으로 제시한 이념이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과 함께 이승만은 반공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일민주의를 제기하였다.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체계적인 이념과 단일민족이라는 우리 민족의 특성에 맞는 이념의 필요성으로 인해 제기되었다. 이후 일민주의의 기본 이념은 안호상 등에 의해 더욱 이론화되어 남녀·상하 차별 없애기, 지방·파당 차별 없애기, 빈부·귀천 차별 없애기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일민주의는 반공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었으나 건국 직후의 지도이념이 되지 못했다.
일민주의 (一民主義)
일민주의는 1949년 이승만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명분으로 제시한 이념이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과 함께 이승만은 반공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일민주의를 제기하였다.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체계적인 이념과 단일민족이라는 우리 민족의 특성에 맞는 이념의 필요성으로 인해 제기되었다. 이후 일민주의의 기본 이념은 안호상 등에 의해 더욱 이론화되어 남녀·상하 차별 없애기, 지방·파당 차별 없애기, 빈부·귀천 차별 없애기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일민주의는 반공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었으나 건국 직후의 지도이념이 되지 못했다.
1946년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학병동맹측과 반탁진영 간의 충돌을 계기로 벌어진 사건.
학병동맹 사건 (學兵同盟 事件)
1946년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학병동맹측과 반탁진영 간의 충돌을 계기로 벌어진 사건.
연합참모본부장,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군인·정치인.
김형일 (金炯一)
연합참모본부장,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군인·정치인.
육군 참모차장, 체신부장관, 국회의원, 국회 국방위원장 등을 역임한 군인·정치인.
문형태 (文亨泰)
육군 참모차장, 체신부장관, 국회의원, 국회 국방위원장 등을 역임한 군인·정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