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이계형"
검색결과 총 35건
조화벽은 일제강점기 개성 호수돈여학교와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호수돈여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1919년 3월 3일 개성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이어 독립선언서를 고향인 양양군 양양면에 전달하여 4월 4일 남문리 장터 만세시위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이후 영명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며 유관순의 두 동생을 돌보았으며, 1923년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결혼하였다. 1932년 고향으로 돌아가 정명학원을 설립하고 남편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조화벽 (趙和璧)
조화벽은 일제강점기 개성 호수돈여학교와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호수돈여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1919년 3월 3일 개성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이어 독립선언서를 고향인 양양군 양양면에 전달하여 4월 4일 남문리 장터 만세시위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이후 영명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며 유관순의 두 동생을 돌보았으며, 1923년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결혼하였다. 1932년 고향으로 돌아가 정명학원을 설립하고 남편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종진은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조선민족대동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해 11월 28일에는 전협, 최익환 등이 조직한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단체가 계획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었으며, 1920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종진 (金鍾振)
김종진은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조선민족대동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해 11월 28일에는 전협, 최익환 등이 조직한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단체가 계획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었으며, 1920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치현은 일제강점기 비밀결사인 조선독립청년단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6월경 황해도 사리원에서 애국여자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비밀결사인 조선독립청년단 단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조선독립청년단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과 『신한청년』을 서울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1921년 5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치현 (金致鉉)
김치현은 일제강점기 비밀결사인 조선독립청년단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6월경 황해도 사리원에서 애국여자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비밀결사인 조선독립청년단 단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조선독립청년단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과 『신한청년』을 서울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1921년 5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황애시덕은 일제강점기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13년 교사들과 함께 비밀결사 송죽회를 조직하였다. 1918년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고, 귀국 후에는 3·1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여성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김마리아 등과 함께 1919년 9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고 총무를 맡았다. 1929년부터는 농촌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황애시덕 (黃愛施德)
황애시덕은 일제강점기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13년 교사들과 함께 비밀결사 송죽회를 조직하였다. 1918년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고, 귀국 후에는 3·1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여성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김마리아 등과 함께 1919년 9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고 총무를 맡았다. 1929년부터는 농촌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김필수는 일제강점기 중앙여자청년동맹, 근우회 등에서 활동하고, 태평양노동조합운동과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26년 12월 서울 낙원동에서 중앙여자청년동맹에 참여하였고, 1928년 7월에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10월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 후 수차례 국내를 오가며 활동하였다. 1933년 5월부터 흥남, 함흥 등지를 중심으로 태평양노동조합운동과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참여하였다.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필수 (金必壽)
김필수는 일제강점기 중앙여자청년동맹, 근우회 등에서 활동하고, 태평양노동조합운동과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26년 12월 서울 낙원동에서 중앙여자청년동맹에 참여하였고, 1928년 7월에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10월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 후 수차례 국내를 오가며 활동하였다. 1933년 5월부터 흥남, 함흥 등지를 중심으로 태평양노동조합운동과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참여하였다.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나은주는 일제강점기 개성 호수돈여학교와 황해도 금천군 백마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3일 교내에서 학생들과 함께 독립가와 찬송가를 부르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4월 2일과 3일에는 황해도 금천군 백마면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구금자 석방을 위해 활동하였다. 이후 일본 헌병들의 주도자 검거 과정에서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나은주 (羅恩周)
나은주는 일제강점기 개성 호수돈여학교와 황해도 금천군 백마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3일 교내에서 학생들과 함께 독립가와 찬송가를 부르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4월 2일과 3일에는 황해도 금천군 백마면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구금자 석방을 위해 활동하였다. 이후 일본 헌병들의 주도자 검거 과정에서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문재민은 일제강점기 기생으로 활동하다 황해도 해주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해 기생이 되었으며, 1919년 4월 1일 기생조합 동료들과 함께 황해도 해주군 해주 읍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행진하였고, 단상에 올라 연설도 하였다. 다른 기생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는 학업에 전념하였다.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문재민 (文載敏)
문재민은 일제강점기 기생으로 활동하다 황해도 해주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해 기생이 되었으며, 1919년 4월 1일 기생조합 동료들과 함께 황해도 해주군 해주 읍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행진하였고, 단상에 올라 연설도 하였다. 다른 기생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는 학업에 전념하였다.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민옥금은 일제강점기 천안 양대리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사립 광명여학교 재학 중에 임영신, 한이순 등과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후 3월 17일 태극기를 제작하고 3월 20일에 학생 80여 명과 함께 양대리 장터로 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불어난 시위대와 함께 입장 장터로 향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20년 2월 7일 가출옥하였으며, 이후 호수돈여학교와 감리교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해방 후 조선여자국민당 상무간사를 역임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민옥금 (閔玉錦)
민옥금은 일제강점기 천안 양대리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사립 광명여학교 재학 중에 임영신, 한이순 등과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후 3월 17일 태극기를 제작하고 3월 20일에 학생 80여 명과 함께 양대리 장터로 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불어난 시위대와 함께 입장 장터로 향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20년 2월 7일 가출옥하였으며, 이후 호수돈여학교와 감리교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해방 후 조선여자국민당 상무간사를 역임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박기은은 일제강점기 광복군에 입대하여 제3지대 제1구대본부 구호분대장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44년 한국광복군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하며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국인들을 안전지대로 호송하였다. 1945년 2월 동료 공작원이 체포되자, 피신한 후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다. 1945년 3월 광복군 제3지대 본부에서 군사 훈련 및 간호 교육 등을 이수한 후, 구호분대장으로 복무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박기은 (朴基恩)
박기은은 일제강점기 광복군에 입대하여 제3지대 제1구대본부 구호분대장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44년 한국광복군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하며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국인들을 안전지대로 호송하였다. 1945년 2월 동료 공작원이 체포되자, 피신한 후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다. 1945년 3월 광복군 제3지대 본부에서 군사 훈련 및 간호 교육 등을 이수한 후, 구호분대장으로 복무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박승일은 일제강점기 대한애국부인회의 일원으로 군자금 등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월할 목적으로 평양 지역 감리교 여성 신자들과 함께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장로교파 애국부인회와 연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1920년 10월까지 2,400여 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박승일 (朴昇一)
박승일은 일제강점기 대한애국부인회의 일원으로 군자금 등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월할 목적으로 평양 지역 감리교 여성 신자들과 함께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장로교파 애국부인회와 연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1920년 10월까지 2,400여 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일제강점기 때, 대한국민회, 간도청년회, 대한청년단 등에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강백규 (姜伯奎)
일제강점기 때, 대한국민회, 간도청년회, 대한청년단 등에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조선혁명군 총사령, 조선혁명군 정부 군사부 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호석 (金浩石)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조선혁명군 총사령, 조선혁명군 정부 군사부 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조선전은 중국의 역대 왕조별 공인된 역사서 24종에 기술된 한국 관련 기록을 통칭한다. 사마천의 『사기』 이후 중국의 역사서가 주변 민족과 지역에 관한 내용을 동이전, 사이전, 이만전, 외국전 등의 열전에 별도 항목으로 서술하면서부터 기록되었다. 중국 사서 가운데 조선전이 없는 것은 남북조시대에 저술된 『진서』와 『북제서』 뿐이다. 한국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 아니라 중국과 직접적인 연관된 사항만을 기록했다. 『송사』 이후 『명사』에 이르는 조선전에서는 시사적인 사건의 서술이 많은데,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기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조선전 (朝鮮傳)
조선전은 중국의 역대 왕조별 공인된 역사서 24종에 기술된 한국 관련 기록을 통칭한다. 사마천의 『사기』 이후 중국의 역사서가 주변 민족과 지역에 관한 내용을 동이전, 사이전, 이만전, 외국전 등의 열전에 별도 항목으로 서술하면서부터 기록되었다. 중국 사서 가운데 조선전이 없는 것은 남북조시대에 저술된 『진서』와 『북제서』 뿐이다. 한국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 아니라 중국과 직접적인 연관된 사항만을 기록했다. 『송사』 이후 『명사』에 이르는 조선전에서는 시사적인 사건의 서술이 많은데,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기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중국 동북3성 조선족의 교육과 문화 발전을 위해 설립된 종합출판사.
민족출판사 (民族出版社)
중국 동북3성 조선족의 교육과 문화 발전을 위해 설립된 종합출판사.
봉황성은 중국 요령성 봉성진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이다.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큰 산성의 하나로 오골성이라고 불렸다. 요동반도 동남부의 요충지에 위치한다. 성벽의 길이는 15.955㎞인데 돌로 쌓은 길이는 7.525㎞ 정도이다. 나머지 구간은 천연 절벽을 성벽으로 삼았는데 높이가 50m를 넘는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는 이 성을 압록강 이북을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조선 인조 때에는 이경석·김상헌 등이 청나라에 의해 1년 동안 봉황성에 구금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봉황성이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봉황성 (鳳凰城)
봉황성은 중국 요령성 봉성진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이다.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큰 산성의 하나로 오골성이라고 불렸다. 요동반도 동남부의 요충지에 위치한다. 성벽의 길이는 15.955㎞인데 돌로 쌓은 길이는 7.525㎞ 정도이다. 나머지 구간은 천연 절벽을 성벽으로 삼았는데 높이가 50m를 넘는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는 이 성을 압록강 이북을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조선 인조 때에는 이경석·김상헌 등이 청나라에 의해 1년 동안 봉황성에 구금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봉황성이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1940년대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조선건국동맹 (朝鮮建國同盟)
1940년대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일제강점기 때, 중국에서 대한독립단총단 의무부장, 국민당군 군의관 등을 역임한 의사·독립운동가.
이자해 (李慈海)
일제강점기 때, 중국에서 대한독립단총단 의무부장, 국민당군 군의관 등을 역임한 의사·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주치의로 활동하며 독립군을 치료하고, 병원 수입을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한 의사·독립운동가.
김필순 (金弼淳)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주치의로 활동하며 독립군을 치료하고, 병원 수입을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한 의사·독립운동가.
1939년에, 중국 광서성에서 이두산이 대일 투쟁을 위하여 발행한 잡지.
동방전우 (東方戰友)
1939년에, 중국 광서성에서 이두산이 대일 투쟁을 위하여 발행한 잡지.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독립당,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등에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독립운동 단체의 기관지를 운영한 언론인·독립운동가.
이두산 (李斗山)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독립당,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등에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독립운동 단체의 기관지를 운영한 언론인·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