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이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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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례악은 궁중의 오례 중 군례에 연주한 음악이다. 군례의 구성 요소는 시대에 따라 달랐으나, 대체로 사례와 관련된 의례, 군사훈련과 관련된 의례, 자연현상과 관련된 재앙이나 역질을 물리치는 의례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군례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으나 군례의 음악은 조선시대에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군례에 사용한 음악은 의례의 성격에 따라 각각 달랐고,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가 서로 달랐다. 군례악 중 군사 훈련과 관련된 의례에는 취타악기를 사용하여 군영음악의 특징을 보여준다. 군례악과 군악은 서로 개념이 다르다.
군례악 (軍禮樂)
군례악은 궁중의 오례 중 군례에 연주한 음악이다. 군례의 구성 요소는 시대에 따라 달랐으나, 대체로 사례와 관련된 의례, 군사훈련과 관련된 의례, 자연현상과 관련된 재앙이나 역질을 물리치는 의례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군례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으나 군례의 음악은 조선시대에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군례에 사용한 음악은 의례의 성격에 따라 각각 달랐고,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가 서로 달랐다. 군례악 중 군사 훈련과 관련된 의례에는 취타악기를 사용하여 군영음악의 특징을 보여준다. 군례악과 군악은 서로 개념이 다르다.
군악대는 1895년부터 1907년까지 군영에서 음악을 연주한 악대이다. 먼저 전통 취타를 연주하던 내취군악대가 있었고 이후 서양식 악기를 쓰는 양악군악대가 만들어졌다. 양악군악대가 생기기 전에는 나팔을 부는 곡호수, 나팔과 북으로 구성된 곡호대가 활동했다. 1900년 정식으로 양악군악대가 조직되며 서양식 편성으로 운영되었고, 독일인 에케르트 등이 훈련을 지도했다. 그러나 1907년 군대 해산으로 군악대가 폐지되었고, 해방 이후 다시 육군·해군·공군 군악대가 창설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군악대 (軍樂隊)
군악대는 1895년부터 1907년까지 군영에서 음악을 연주한 악대이다. 먼저 전통 취타를 연주하던 내취군악대가 있었고 이후 서양식 악기를 쓰는 양악군악대가 만들어졌다. 양악군악대가 생기기 전에는 나팔을 부는 곡호수, 나팔과 북으로 구성된 곡호대가 활동했다. 1900년 정식으로 양악군악대가 조직되며 서양식 편성으로 운영되었고, 독일인 에케르트 등이 훈련을 지도했다. 그러나 1907년 군대 해산으로 군악대가 폐지되었고, 해방 이후 다시 육군·해군·공군 군악대가 창설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내취는 조선 후기 선전관청에 속하여 입직, 시위, 연주를 담당한 군영악대이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바뀐 군제에 따라 조선 전기의 내취라치와 취각의 제도를 계승하여 성립된 군영악대이다. 내취는 출신 지역에 따라 황내취와 흑내취로 구분되고, 소속 기관에 따라 원내취와 겸내취로 구분되며, 악기 편성에 따라 취타내취와 세악내취로 구분되었다. 내취는 입직, 시위, 연주를 담당했다. 취타내취는 내취군악대로도 활동했고, 구군악대로도 불렸다. 1895년 선전관청 폐지 후 시종원에 속했으며, 1908년 궁내부 장악부로 이속되었다.
내취 (內吹)
내취는 조선 후기 선전관청에 속하여 입직, 시위, 연주를 담당한 군영악대이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바뀐 군제에 따라 조선 전기의 내취라치와 취각의 제도를 계승하여 성립된 군영악대이다. 내취는 출신 지역에 따라 황내취와 흑내취로 구분되고, 소속 기관에 따라 원내취와 겸내취로 구분되며, 악기 편성에 따라 취타내취와 세악내취로 구분되었다. 내취는 입직, 시위, 연주를 담당했다. 취타내취는 내취군악대로도 활동했고, 구군악대로도 불렸다. 1895년 선전관청 폐지 후 시종원에 속했으며, 1908년 궁내부 장악부로 이속되었다.
취고수는 조선 후기 군영에서 취타악기로 지휘·통신·연주를 담당한 군영악대이다.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중국 명나라로부터 도입한 군영악대의 하나이며, 조선 후기 오군영과 지방군영에 속해 있었다. 취고수는 표하군 소속 군총의 하나이기도 하고, 취타수와 세악수를 포함한 악대를 의미하기도 했으며, 취타악기를 연주하는 악대를 의미하기도 했다. 취고수가 연주한 악기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대각・나각・나발・발라・호적・솔발・자바라・점자・금・정・나・고의 12종류였다. 취고수가 연주한 음악은 대취타로 대표된다.
취고수 (吹鼓手)
취고수는 조선 후기 군영에서 취타악기로 지휘·통신·연주를 담당한 군영악대이다.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중국 명나라로부터 도입한 군영악대의 하나이며, 조선 후기 오군영과 지방군영에 속해 있었다. 취고수는 표하군 소속 군총의 하나이기도 하고, 취타수와 세악수를 포함한 악대를 의미하기도 했으며, 취타악기를 연주하는 악대를 의미하기도 했다. 취고수가 연주한 악기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대각・나각・나발・발라・호적・솔발・자바라・점자・금・정・나・고의 12종류였다. 취고수가 연주한 음악은 대취타로 대표된다.
취타수는 조선 후기 군영의 표하군, 취고수, 취수에 속한 취타악기 연주자 혹은 취타악대이다. 주로 18세기에 취타악대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취타수는 표하군, 취수, 취고수 소속 군총의 하나였다. 취타수가 표하군에 속했던 것과 취타악기를 연주한 점은 취고수와 동일하나, 취타수가 취고수의 하위 집단이기도 했다는 점과 취타수라는 용어가 18세기 자료에 주로 보이는 점에서 취고수와 변별된다. 취타수가 연주한 악기는 대각, 나발, 발라, 호적, 북, 정, 솔발, 자바라, 나, 점자 등 취타악기였다.
취타수 (吹打手)
취타수는 조선 후기 군영의 표하군, 취고수, 취수에 속한 취타악기 연주자 혹은 취타악대이다. 주로 18세기에 취타악대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취타수는 표하군, 취수, 취고수 소속 군총의 하나였다. 취타수가 표하군에 속했던 것과 취타악기를 연주한 점은 취고수와 동일하나, 취타수가 취고수의 하위 집단이기도 했다는 점과 취타수라는 용어가 18세기 자료에 주로 보이는 점에서 취고수와 변별된다. 취타수가 연주한 악기는 대각, 나발, 발라, 호적, 북, 정, 솔발, 자바라, 나, 점자 등 취타악기였다.
후부고취는 조선과 대한제국기 왕의 가마 뒤에서 고취악을 연주한 궁중 의식용 악대이다. 고취는 원래 중국 한나라에서 각·가를 연주하던 음악에서 비롯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고와 각을 뜻해 제사와 군악에 사용되었다. 궁중 음악으로는 고려시대부터 수용되었는데, 후부고취는 조선에서 처음 등장해 왕의 행차 과정에서 연주되었다. 대체로 당악기·향악기 기반의 관악기·현악기·타악기로 구성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노래가 사라지고 공수가 포함되었다. 성내 거둥에 쓰였으며 연주한 음악은 환궁악, 여민락만, 여민락영 등이었다.
후부고취 (後部鼓吹)
후부고취는 조선과 대한제국기 왕의 가마 뒤에서 고취악을 연주한 궁중 의식용 악대이다. 고취는 원래 중국 한나라에서 각·가를 연주하던 음악에서 비롯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고와 각을 뜻해 제사와 군악에 사용되었다. 궁중 음악으로는 고려시대부터 수용되었는데, 후부고취는 조선에서 처음 등장해 왕의 행차 과정에서 연주되었다. 대체로 당악기·향악기 기반의 관악기·현악기·타악기로 구성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노래가 사라지고 공수가 포함되었다. 성내 거둥에 쓰였으며 연주한 음악은 환궁악, 여민락만, 여민락영 등이었다.
「현휴」는 조선 시대 세종 때 창제된 「발상(發祥)」 11변(變) 중 제5변의 정재와 음악이다. 「현휴」의 노랫말은 태조가 위화도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을 때, 여러 날 장마가 져도 물이 붇지 않다가, 군사를 돌려 언덕에 오르자 큰 물이 갑자기 불어서 온 섬이 잠기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현휴 (顯休)
「현휴」는 조선 시대 세종 때 창제된 「발상(發祥)」 11변(變) 중 제5변의 정재와 음악이다. 「현휴」의 노랫말은 태조가 위화도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을 때, 여러 날 장마가 져도 물이 붇지 않다가, 군사를 돌려 언덕에 오르자 큰 물이 갑자기 불어서 온 섬이 잠기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사직제향악은 토지의 신인 태사와 곡식의 신인 태직에게 올리는 기악, 성악, 무용으로 구성된 제향악이다. 영신(迎神)은 궁가에서 8성을 연주하고, 전폐(奠幣), 초헌(初獻), 철변두(撤籩豆)는 등가(登歌)에서 응종궁(應鍾宮)을 연주하며, 아헌(亞獻), 종헌(終獻), 송신(送神)은 궁가에서 태주궁(太蔟宮)을 연주한다. 악장(樂章)은 초헌의 국사와 국직, 철변두의 절차에서 등가에서 부른다. 일무(佾舞)는 64명으로 구성된 팔일무(八佾舞)이며, 영신, 전폐, 초헌에 열문지무(문무(文舞)), 아헌, 종헌에 소무지무(무무(武舞))를 춘다.
사직제향악 (社稷祭享樂)
사직제향악은 토지의 신인 태사와 곡식의 신인 태직에게 올리는 기악, 성악, 무용으로 구성된 제향악이다. 영신(迎神)은 궁가에서 8성을 연주하고, 전폐(奠幣), 초헌(初獻), 철변두(撤籩豆)는 등가(登歌)에서 응종궁(應鍾宮)을 연주하며, 아헌(亞獻), 종헌(終獻), 송신(送神)은 궁가에서 태주궁(太蔟宮)을 연주한다. 악장(樂章)은 초헌의 국사와 국직, 철변두의 절차에서 등가에서 부른다. 일무(佾舞)는 64명으로 구성된 팔일무(八佾舞)이며, 영신, 전폐, 초헌에 열문지무(문무(文舞)), 아헌, 종헌에 소무지무(무무(武舞))를 춘다.
〈정명〉은 조선 세종대에 회례에 사용할 목적으로 창제된 《보태평지무악(保太平之舞樂》 아홉 개의 변(變) 중 제8변 제1편의 정재와 음악이다. 내용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가 꾀를 도와서 평정한 것에 관한 것이다. 《보태평지무악》은 회례연에 사용하기 위해 창제되었으나, 1493년(세조 9)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었고, 〈정명〉이라는 명칭은 유지하되, 선율을 축소하고 가사를 개정하여 종묘제례악의 일무와 음악으로 편입되었다.
정명 (貞明)
〈정명〉은 조선 세종대에 회례에 사용할 목적으로 창제된 《보태평지무악(保太平之舞樂》 아홉 개의 변(變) 중 제8변 제1편의 정재와 음악이다. 내용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가 꾀를 도와서 평정한 것에 관한 것이다. 《보태평지무악》은 회례연에 사용하기 위해 창제되었으나, 1493년(세조 9)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었고, 〈정명〉이라는 명칭은 유지하되, 선율을 축소하고 가사를 개정하여 종묘제례악의 일무와 음악으로 편입되었다.
<정세>는 조선 세종대에 회례연을 위해 창제된 ⟪정대업지무악⟫ 제5변의 2편 중 제1편의 정재와 음악이다. <정세>는 정몽주가 태조의 위엄과 덕행을 시기하여 해치려 하자, 태종이 이를 제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정대업지무악⟫은 회례연을 위해 창제되었으나, 1493년(세조 9)에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었다. <정세>의 명칭은 유지되었으나, 가사가 축소되고 ⟪정대업지무악⟫ 〈탁령〉 제13행~제24행의 선율을 발췌한 악곡으로 개편되어 종묘제례악 ⟪정대업⟫의 아홉 번째 음악이자 일무로 편입되었다.
정세 (靖世)
<정세>는 조선 세종대에 회례연을 위해 창제된 ⟪정대업지무악⟫ 제5변의 2편 중 제1편의 정재와 음악이다. <정세>는 정몽주가 태조의 위엄과 덕행을 시기하여 해치려 하자, 태종이 이를 제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정대업지무악⟫은 회례연을 위해 창제되었으나, 1493년(세조 9)에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었다. <정세>의 명칭은 유지되었으나, 가사가 축소되고 ⟪정대업지무악⟫ 〈탁령〉 제13행~제24행의 선율을 발췌한 악곡으로 개편되어 종묘제례악 ⟪정대업⟫의 아홉 번째 음악이자 일무로 편입되었다.
<정희>는 조선 세종 때 창제된 ⟪발상(發祥)⟫ 아홉 개의 변(變) 중 제7변의 정재와 음악이다. 세종(재위: 1418-1450) 29년 이전에 창제되었다. 가사의 내용은 태조가 신령으로부터 금자[金尺]를 받는 꿈을 꾸어 조선을 개국할 정당성을 부여 받았다는 것이다. 『세종실록』에 악보와 가사가 전하며, 『세종실록』 이후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정희 (禎禧)
<정희>는 조선 세종 때 창제된 ⟪발상(發祥)⟫ 아홉 개의 변(變) 중 제7변의 정재와 음악이다. 세종(재위: 1418-1450) 29년 이전에 창제되었다. 가사의 내용은 태조가 신령으로부터 금자[金尺]를 받는 꿈을 꾸어 조선을 개국할 정당성을 부여 받았다는 것이다. 『세종실록』에 악보와 가사가 전하며, 『세종실록』 이후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지덕>은 1447년(세종 29) 이전에 회례에 사용하기 위해 창제된 ⟪정대업지무악(定大業之舞樂)⟫ 아홉 개 변(變) 가운데 제4변의 3편 중 제1편의 정재와 음으로서, 태조악이다. 1493년(세조 9) ⟪정대업지무악⟫이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됨으로 인해 <지덕>의 일부 선율이 <순응>으로 수용되어, 종묘제례악 ⟪정대업⟫ 11곡 중 여덟 번째 일무이자 음악으로 채택되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연례에 사용한 <순응>의 정재와 음악은 중종(재위: 1506-1544) 때까지 전승되었으나, 현재는 전승이 단절되었다.
지덕 (至德)
<지덕>은 1447년(세종 29) 이전에 회례에 사용하기 위해 창제된 ⟪정대업지무악(定大業之舞樂)⟫ 아홉 개 변(變) 가운데 제4변의 3편 중 제1편의 정재와 음으로서, 태조악이다. 1493년(세조 9) ⟪정대업지무악⟫이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됨으로 인해 <지덕>의 일부 선율이 <순응>으로 수용되어, 종묘제례악 ⟪정대업⟫ 11곡 중 여덟 번째 일무이자 음악으로 채택되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연례에 사용한 <순응>의 정재와 음악은 중종(재위: 1506-1544) 때까지 전승되었으나, 현재는 전승이 단절되었다.
<진요>는 세종(재위: 1418~1450) 29년 이전에 창제된 ⟪정대업지무악⟫ 제6변의 2편 중 제1편의 정재와 음악이다. 무보는 없고, 가사는 『세종실록』 권116에 수록되어 있으며, 악보는 『세종실록』 권139에 수록되어 있다. 노랫말은 대마도(對馬島) 왜적(倭賊)이 은덕을 배반하고 변경(邊境)을 소란하게 하므로 태종(太宗)이 장수를 명하여 정벌한 일에 관한 내용이다. 가사 일부는 종묘제례악 <혁정>으로 전승되었다.
진요 (震耀)
<진요>는 세종(재위: 1418~1450) 29년 이전에 창제된 ⟪정대업지무악⟫ 제6변의 2편 중 제1편의 정재와 음악이다. 무보는 없고, 가사는 『세종실록』 권116에 수록되어 있으며, 악보는 『세종실록』 권139에 수록되어 있다. 노랫말은 대마도(對馬島) 왜적(倭賊)이 은덕을 배반하고 변경(邊境)을 소란하게 하므로 태종(太宗)이 장수를 명하여 정벌한 일에 관한 내용이다. 가사 일부는 종묘제례악 <혁정>으로 전승되었다.
<집녕>은 종묘제례의 초헌례를 봉행할 때 등가에서 연주하는 《보태평》 열한 곡 중 다섯 번째 음악이자 일무이다. <집녕>의 선율은 회례용으로 만든 『세종실록』 소재 《보태평》 〈보예(保乂)〉의 제1행부터 8행까지를 발췌한 것이고, 악장은 환조가 쌍성을 토벌, 평정하니 백성들이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집녕 (輯寧)
<집녕>은 종묘제례의 초헌례를 봉행할 때 등가에서 연주하는 《보태평》 열한 곡 중 다섯 번째 음악이자 일무이다. <집녕>의 선율은 회례용으로 만든 『세종실록』 소재 《보태평》 〈보예(保乂)〉의 제1행부터 8행까지를 발췌한 것이고, 악장은 환조가 쌍성을 토벌, 평정하니 백성들이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창부>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29년 이전에 창제된 ⟪발상(發祥)⟫ 아홉 개의 변(變) 중 제3변의 정재와 음악이며, 노랫말은 도조가 쏜 한 화살에 까치 두 마리가 떨어진 것이 태조가 일어날 징조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창부 (昌符)
<창부>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29년 이전에 창제된 ⟪발상(發祥)⟫ 아홉 개의 변(變) 중 제3변의 정재와 음악이며, 노랫말은 도조가 쏜 한 화살에 까치 두 마리가 떨어진 것이 태조가 일어날 징조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창휘>는 1447년(세종 29) 이전에 회례에 사용하기 위해 창제된 ⟪보태평지무악⟫ 아홉 개의 변(變) 중 제7변의 정재이자 음악이다. <창휘>의 가사는 태종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를 당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사실을 보고하니, 천자(天子)가 융숭한 예로 대우하였다는 내용이다. ⟪보태평지무악⟫을 종묘제례악으로 채택함으로 인해, <창휘>의 가사와 선율을 축소하고, 악곡명을 <용광>으로 바꾸어 종묘제례악 《보태평》의 여덟 번째 곡으로 편입하였다.
창휘 (昌徽)
<창휘>는 1447년(세종 29) 이전에 회례에 사용하기 위해 창제된 ⟪보태평지무악⟫ 아홉 개의 변(變) 중 제7변의 정재이자 음악이다. <창휘>의 가사는 태종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를 당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사실을 보고하니, 천자(天子)가 융숭한 예로 대우하였다는 내용이다. ⟪보태평지무악⟫을 종묘제례악으로 채택함으로 인해, <창휘>의 가사와 선율을 축소하고, 악곡명을 <용광>으로 바꾸어 종묘제례악 《보태평》의 여덟 번째 곡으로 편입하였다.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내촌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조성된 불교조각.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 (洪川 物傑里 石造臺座)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내촌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조성된 불교조각.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내촌면 대승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조성된 불교조각.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 및 광배 (洪川 物傑里 石造臺座 및 光背)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내촌면 대승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조성된 불교조각.
홍천 물걸리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내촌면 대승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석조 불상이다. 197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1982년에 새로 지은 전각 안에 다른 불상과 함께 안치되어 있다. 원만한 얼굴, 위축된 신체표현, 형식화된 옷주름 표현, 3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 등 9세기경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지권인을 하고 있는데, 손의 좌우가 바뀌어 있어 일반적인 지권인 형태와는 다르다. 이 불상은 좌우에 석가불과 철불인 노사나불을 배치한 삼신불로 통일신라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홍천 물걸리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洪川 物傑里 石造 毘盧遮▽那佛 坐像)
홍천 물걸리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내촌면 대승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석조 불상이다. 197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1982년에 새로 지은 전각 안에 다른 불상과 함께 안치되어 있다. 원만한 얼굴, 위축된 신체표현, 형식화된 옷주름 표현, 3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 등 9세기경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지권인을 하고 있는데, 손의 좌우가 바뀌어 있어 일반적인 지권인 형태와는 다르다. 이 불상은 좌우에 석가불과 철불인 노사나불을 배치한 삼신불로 통일신라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홍천 물걸리 석조 여래 좌상은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내촌면 대승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석조 불상이다. 197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팔각의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불상으로 광배는 없어졌다. 머리의 나발이 뚜렷하지 않으며, 얼굴의 마모가 심하다. 상체는 경직되어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 위에 두고 아래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왼쪽 다리 위에 수평으로 두고 있는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석조비로자나불상의 왼쪽에 배치되어 오른쪽 협시인 노사나불과 함께 삼신불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굴조사로 밝혀졌다.
홍천 물걸리 석조 여래 좌상 (洪川 物傑里 石造 如來 坐像)
홍천 물걸리 석조 여래 좌상은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내촌면 대승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석조 불상이다. 197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팔각의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불상으로 광배는 없어졌다. 머리의 나발이 뚜렷하지 않으며, 얼굴의 마모가 심하다. 상체는 경직되어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 위에 두고 아래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왼쪽 다리 위에 수평으로 두고 있는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석조비로자나불상의 왼쪽에 배치되어 오른쪽 협시인 노사나불과 함께 삼신불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굴조사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