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이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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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은 공물에 대한 현물납을 폐지하고 그 대신에 지역별로 쌀·베·돈으로 납부하게 한 세금 및 재정 제도이다. 광해군 즉위 초에 선혜법(宣惠法)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에서 제도의 시험적 형태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것과 대동법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대동법은 각 관에 책정된 유치미와 여미의 몫이 상납미보다 많았던 것에 비해서 선혜법은 지방 수요에 책정된 몫이 상납미의 1/8에 불과했다. 1654년(효종 5)에 조익(趙翼) · 김육(金堉) 등이 대동법 시행 세칙을 수정·보완하여 충청도에서 다시 실시하였고, 대동법은 그 성공적인 결과를 토대로 각도에 순조롭게 확대되었다. 대동법의 주관 관청인 선혜청(宣惠廳)은 대동세를 일괄 수취하여 공인(貢人)에게 공가(貢價)를 지급하여 정부가 필요한 물품을 상납하게 했다. 대동법은 백성들에게 규정된 세액만을 징수하여 민생을 안정시켰고, 지방 재정을 처음으로 확립했으며, 상업 발전을 촉진시켰다.
대동법 (大同法)
대동법은 공물에 대한 현물납을 폐지하고 그 대신에 지역별로 쌀·베·돈으로 납부하게 한 세금 및 재정 제도이다. 광해군 즉위 초에 선혜법(宣惠法)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에서 제도의 시험적 형태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것과 대동법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대동법은 각 관에 책정된 유치미와 여미의 몫이 상납미보다 많았던 것에 비해서 선혜법은 지방 수요에 책정된 몫이 상납미의 1/8에 불과했다. 1654년(효종 5)에 조익(趙翼) · 김육(金堉) 등이 대동법 시행 세칙을 수정·보완하여 충청도에서 다시 실시하였고, 대동법은 그 성공적인 결과를 토대로 각도에 순조롭게 확대되었다. 대동법의 주관 관청인 선혜청(宣惠廳)은 대동세를 일괄 수취하여 공인(貢人)에게 공가(貢價)를 지급하여 정부가 필요한 물품을 상납하게 했다. 대동법은 백성들에게 규정된 세액만을 징수하여 민생을 안정시켰고, 지방 재정을 처음으로 확립했으며, 상업 발전을 촉진시켰다.
결작은 1751년(영조 27)에 균역법을 실시하면서 감축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토지에 새롭게 부과한 세금이다. 균역법의 핵심은 군포 납부를 1인당 1필로 줄이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재정의 부족분을 다른 곳에서 채우는 것이었다. 전자를 감필(減疋), 후자를 급대(給代)라고 했다. 급대의 핵심적인 내용이 경작지에 새로 부과한 결작이다.
결작 (結作)
결작은 1751년(영조 27)에 균역법을 실시하면서 감축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토지에 새롭게 부과한 세금이다. 균역법의 핵심은 군포 납부를 1인당 1필로 줄이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재정의 부족분을 다른 곳에서 채우는 것이었다. 전자를 감필(減疋), 후자를 급대(給代)라고 했다. 급대의 핵심적인 내용이 경작지에 새로 부과한 결작이다.
양전은 고려 및 조선시대에 농지(農地)를 조사·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파악하던 제도이다. 가장 중요한 생산 자원인 경작지를 매개로 국가가 농민을 지배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양전은 국가 재정의 기본을 이루는 전세(田稅)의 징수를 위하여 전국의 전결(田結) 수를 측량하고 토지 파악에서 누락된 토지를 적발하여 불법적으로 탈세를 행하는 토지가 없도록 함으로써 합리적인 전세 징수를 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양전을 통하여 전국 경작 면적의 총합인 결총(結總)이 확정되면, 그에 따라 각 지방의 전결 세액이 확정되고 토지마다 배정해 징수했다.
양전 (量田)
양전은 고려 및 조선시대에 농지(農地)를 조사·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파악하던 제도이다. 가장 중요한 생산 자원인 경작지를 매개로 국가가 농민을 지배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양전은 국가 재정의 기본을 이루는 전세(田稅)의 징수를 위하여 전국의 전결(田結) 수를 측량하고 토지 파악에서 누락된 토지를 적발하여 불법적으로 탈세를 행하는 토지가 없도록 함으로써 합리적인 전세 징수를 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양전을 통하여 전국 경작 면적의 총합인 결총(結總)이 확정되면, 그에 따라 각 지방의 전결 세액이 확정되고 토지마다 배정해 징수했다.
이흘은 조선 후기, 조식 학문인 남명학의 중심지인 삼가(三嘉)〔지금의 경남 합천〕에서 활동하던 문인 학자이다. 죽정(竹亭)과 비암서당(鼻巖書堂) 등을 세워 제자 교육에 힘썼다. 조식의 위패를 봉안한 용암서원(龍巖書院) 원장을 지냈다. 정인홍과 입재(立齋) 노흠(盧欽, 1527~1601)의 다음 세대에서 남명학파를 이끌면서 임곡(林谷) 임진부(林眞怤, 1586-1657)와 창주(滄洲) 허돈(許燉, 1586-1632) 등 다음 세대로 남명학을 계승하게 하였다.
이흘 (李屹)
이흘은 조선 후기, 조식 학문인 남명학의 중심지인 삼가(三嘉)〔지금의 경남 합천〕에서 활동하던 문인 학자이다. 죽정(竹亭)과 비암서당(鼻巖書堂) 등을 세워 제자 교육에 힘썼다. 조식의 위패를 봉안한 용암서원(龍巖書院) 원장을 지냈다. 정인홍과 입재(立齋) 노흠(盧欽, 1527~1601)의 다음 세대에서 남명학파를 이끌면서 임곡(林谷) 임진부(林眞怤, 1586-1657)와 창주(滄洲) 허돈(許燉, 1586-1632) 등 다음 세대로 남명학을 계승하게 하였다.
공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중앙정부가 각 군현에 부과하여 수취한 현물이자 중앙정부의 현물 수취 체계이다. 전조(田租)와 함께 중앙 재정의 양대 영역이었다. 태종 대 공부를 개혁하여 조(租) · 용(庸) · 조(調) 가운데 조(調)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정립되었다.
공부 (貢賦)
공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중앙정부가 각 군현에 부과하여 수취한 현물이자 중앙정부의 현물 수취 체계이다. 전조(田租)와 함께 중앙 재정의 양대 영역이었다. 태종 대 공부를 개혁하여 조(租) · 용(庸) · 조(調) 가운데 조(調)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정립되었다.
김몽호는 조선 후기 사헌부장령, 공조참의, 어천찰방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609년(광해군 1)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오고 지방 수령도 지내며 문한직을 역임하는 등 순조로운 승진하였지만, 인목대비 폐비와 관련된 소문으로 정경세와 함께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후 은퇴하였고 인조반정 후에도 관직에 다시 나가지 않았다.
김몽호 (金夢虎)
김몽호는 조선 후기 사헌부장령, 공조참의, 어천찰방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609년(광해군 1)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오고 지방 수령도 지내며 문한직을 역임하는 등 순조로운 승진하였지만, 인목대비 폐비와 관련된 소문으로 정경세와 함께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후 은퇴하였고 인조반정 후에도 관직에 다시 나가지 않았다.
강주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문인이다. 인생 전반기는 관료로, 후반기는 시인으로 살았다. 당파적으로는 소북에 속했고, 중년에 관직에 있을 때 옥고를 치렀다. 그의 북인 당색 때문에 지속적인 관료 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찍 관직에서 물러났기에 당대의 문학적 조류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의 아들, 손자, 증손자가 모두 기로소에 들어가는 등 가문이 번창했다.
강주 (姜籒)
강주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문인이다. 인생 전반기는 관료로, 후반기는 시인으로 살았다. 당파적으로는 소북에 속했고, 중년에 관직에 있을 때 옥고를 치렀다. 그의 북인 당색 때문에 지속적인 관료 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찍 관직에서 물러났기에 당대의 문학적 조류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의 아들, 손자, 증손자가 모두 기로소에 들어가는 등 가문이 번창했다.
강효원은 병자호란 직후에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에 간 시강원 서리이다. 병자호란 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심양에 끌려갔는데, 이때 강효원이 시강원 서리로 따라갔다. 청의 통역관인 정명수가 청의 앞잡이로 방자하게 행동하자 정뇌경과 함께 정명수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두 사람 모두 목숨을 잃었다.
강효원 (姜孝元)
강효원은 병자호란 직후에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에 간 시강원 서리이다. 병자호란 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심양에 끌려갔는데, 이때 강효원이 시강원 서리로 따라갔다. 청의 통역관인 정명수가 청의 앞잡이로 방자하게 행동하자 정뇌경과 함께 정명수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두 사람 모두 목숨을 잃었다.
마공은 고려시대에 마전(麻田)에서 수취하던 잡세이다. 마전의 존재는 「신라촌락문서」에서 확인된다. 마전세는 고려 선종 때 법령을 통하여 수취 수단과 결당 수취율이 정해졌다. 조선 태종 5년 때의 기록에 따르면 최소 6만 결에 가까운 마전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마공 (麻貢)
마공은 고려시대에 마전(麻田)에서 수취하던 잡세이다. 마전의 존재는 「신라촌락문서」에서 확인된다. 마전세는 고려 선종 때 법령을 통하여 수취 수단과 결당 수취율이 정해졌다. 조선 태종 5년 때의 기록에 따르면 최소 6만 결에 가까운 마전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목취선은 조선 중기 홍문관 수찬(修撰), 사간원 정언(正言), 직산현감 등을 지낸 문신이다. 본인과 형제와 사촌 모두 요직에 있었다. 광해군대에 언관으로 재직하였는데, 직언을 하다가 이로 인해서 좌천을 당하기도 하였다.
목취선 (睦取善)
목취선은 조선 중기 홍문관 수찬(修撰), 사간원 정언(正言), 직산현감 등을 지낸 문신이다. 본인과 형제와 사촌 모두 요직에 있었다. 광해군대에 언관으로 재직하였는데, 직언을 하다가 이로 인해서 좌천을 당하기도 하였다.
박동열은 조선 후기 이조정랑, 황주목사, 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정치적으로 서인 측이었다. 이조정랑 등 중앙의 요직을 역임하였지만, 황주목사로서 탁월한 성과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 1613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다 동생 박동량, 상촌 신흠과 함께 옥에 갇히는 등 고초를 겪었다.
박동열 (朴東說)
박동열은 조선 후기 이조정랑, 황주목사, 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정치적으로 서인 측이었다. 이조정랑 등 중앙의 요직을 역임하였지만, 황주목사로서 탁월한 성과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 1613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다 동생 박동량, 상촌 신흠과 함께 옥에 갇히는 등 고초를 겪었다.
박여량은 조선 후기 경상남도 함양에서 활약한 의병장이자 문신이다. 17세기 전반 남명학파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였을 때 정인홍과 함께 경상우도 지역과 조정에서 그 위상을 크게 떨치는 데 기여한 주요 인물이다. 스승 정인홍과 정치적 입장을 함께하였다.
박여량 (朴汝樑)
박여량은 조선 후기 경상남도 함양에서 활약한 의병장이자 문신이다. 17세기 전반 남명학파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였을 때 정인홍과 함께 경상우도 지역과 조정에서 그 위상을 크게 떨치는 데 기여한 주요 인물이다. 스승 정인홍과 정치적 입장을 함께하였다.
박장원은 조선 후기 내외 고위 관직을 지내고, 많은 문학작품을 남긴 문인이자 문신이다. 대대로 고관을 배출한 집안 출신이면서 혼맥 역시 뛰어났다. 당파적으로 서인 계열이었다. 관료로서 시인으로서 모두 뛰어난 성과를 보여 주었다.
박장원 (朴長遠)
박장원은 조선 후기 내외 고위 관직을 지내고, 많은 문학작품을 남긴 문인이자 문신이다. 대대로 고관을 배출한 집안 출신이면서 혼맥 역시 뛰어났다. 당파적으로 서인 계열이었다. 관료로서 시인으로서 모두 뛰어난 성과를 보여 주었다.
박춘무는 임진왜란 때 청주성 수복을 이끌었던 의병장이자 문신이다. 청주성 수복은 임진왜란 초기 육상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이다. 토정 이지함의 문인으로 동문수학한 조헌과 호서 지역 의병을 이끌었으며, 청주성 수복 이후 진천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박춘무 (朴春茂)
박춘무는 임진왜란 때 청주성 수복을 이끌었던 의병장이자 문신이다. 청주성 수복은 임진왜란 초기 육상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이다. 토정 이지함의 문인으로 동문수학한 조헌과 호서 지역 의병을 이끌었으며, 청주성 수복 이후 진천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별공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국가가 부과하는 현물 과세 가운데 상공(常貢) 이외의 물품이다. 본래는 부정기적, 부정량적 수취에서 시작하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별공의 명칭을 유지하면서도 상공화(常貢化)되기도 하였다. 현물 과세의 예비비 역할을 하였고, 별진상의 경우에 그것을 주관하는 군현 수령과 감사의 개인적 증여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별공 (別貢)
별공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국가가 부과하는 현물 과세 가운데 상공(常貢) 이외의 물품이다. 본래는 부정기적, 부정량적 수취에서 시작하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별공의 명칭을 유지하면서도 상공화(常貢化)되기도 하였다. 현물 과세의 예비비 역할을 하였고, 별진상의 경우에 그것을 주관하는 군현 수령과 감사의 개인적 증여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서사원은 조선 후기 경상도의 대구 지역을 대표한 학자이자 문신이다. 임진왜란 때 대구 지역 의병운동을 이끌었다. 출신 지역 성격 때문에 이황과 조식의 영향을 모두 받았지만, 동시에 독자적인 성격을 지닌 측면도 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고제(高弟)였다. 스스로도 문인을 둔 대구 지역 2세대를 대표하는 유학자 중 한 사람이다. 10차례 이상 벼슬을 사양하였으며, 청안현감과 사헌부 지평만 지냈다.
서사원 (徐思遠)
서사원은 조선 후기 경상도의 대구 지역을 대표한 학자이자 문신이다. 임진왜란 때 대구 지역 의병운동을 이끌었다. 출신 지역 성격 때문에 이황과 조식의 영향을 모두 받았지만, 동시에 독자적인 성격을 지닌 측면도 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고제(高弟)였다. 스스로도 문인을 둔 대구 지역 2세대를 대표하는 유학자 중 한 사람이다. 10차례 이상 벼슬을 사양하였으며, 청안현감과 사헌부 지평만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