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황선익"
검색결과 총 26건
김시문은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김문공사라는 잡화상을 경영한 상인이다. 1892년 개성에서 태어나 1916년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대한교민단에서 활동하는 한편, 김문공사를 운영하며 '상인독립군'이라 불렸다. 광복 후에도 상하이에 남아 한인들과 교류를 이어갔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지키기 위해 힘썼다.
김시문 (金時文)
김시문은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김문공사라는 잡화상을 경영한 상인이다. 1892년 개성에서 태어나 1916년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대한교민단에서 활동하는 한편, 김문공사를 운영하며 '상인독립군'이라 불렸다. 광복 후에도 상하이에 남아 한인들과 교류를 이어갔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지키기 위해 힘썼다.
강병학은 일제강점기 한국독립당 특무대 소속으로 상하이사변 일본군초혼제 투탄 의거를 실행한 독립운동가이다. 1933년 상하이로 건너가 한국독립당 특무대에 가입하였다. 1934년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이 전몰 일본군 초혼제를 지내자, 식장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켰다. 이후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등에서 활동한 후, 1945년 북한으로 입경하였다. 1950년대 후반 숙청된 것으로 알려진다.
강병학 (康秉學)
강병학은 일제강점기 한국독립당 특무대 소속으로 상하이사변 일본군초혼제 투탄 의거를 실행한 독립운동가이다. 1933년 상하이로 건너가 한국독립당 특무대에 가입하였다. 1934년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이 전몰 일본군 초혼제를 지내자, 식장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켰다. 이후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등에서 활동한 후, 1945년 북한으로 입경하였다. 1950년대 후반 숙청된 것으로 알려진다.
윤석봉은 개항기~대한제국기에 화서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홍주의병에 참여한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김평묵과 유중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0년 충청남도로 이거하여 서천, 보령 일대에서 향학을 일으켰으며, 집성당을 세워 위정척사에 앞장섰다. 1906년 홍주의병에 참여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군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2개월간의 의병 활동 경험을 정리하여 『홍옥경부양처합기 병오』로 남겼다. 201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윤석봉 (尹錫鳳)
윤석봉은 개항기~대한제국기에 화서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홍주의병에 참여한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김평묵과 유중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0년 충청남도로 이거하여 서천, 보령 일대에서 향학을 일으켰으며, 집성당을 세워 위정척사에 앞장섰다. 1906년 홍주의병에 참여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군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2개월간의 의병 활동 경험을 정리하여 『홍옥경부양처합기 병오』로 남겼다. 201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강해석은 일제강점기 전남청년연맹, 광주청년동맹, 신간회 광주지부 등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다. 전남청년연맹, 광주청년동맹 등에서 활동하는 한편, 성진회 출신들을 지도하며 학생운동계를 이끌었다. 수차례 옥고를 치르고 요주의 인물로 감시받던 중에도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강해석 (姜海錫)
강해석은 일제강점기 전남청년연맹, 광주청년동맹, 신간회 광주지부 등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다. 전남청년연맹, 광주청년동맹 등에서 활동하는 한편, 성진회 출신들을 지도하며 학생운동계를 이끌었다. 수차례 옥고를 치르고 요주의 인물로 감시받던 중에도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최윤호는 일제강점기 미국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고 귀국 후 농민 교육 등에 힘쓴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났다.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학, 철학 등을 전공하였다. 조선의 사립 교육과 농민 교육을 연구하였고,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아울러 농촌 계몽과 농민 교육에도 힘썼다. 1937년 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건강 악화로 가출옥하였다. 1939년 2월 사망하였으며,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최윤호 (崔允鎬)
최윤호는 일제강점기 미국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고 귀국 후 농민 교육 등에 힘쓴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났다.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학, 철학 등을 전공하였다. 조선의 사립 교육과 농민 교육을 연구하였고,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아울러 농촌 계몽과 농민 교육에도 힘썼다. 1937년 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건강 악화로 가출옥하였다. 1939년 2월 사망하였으며,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임창영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중국후원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재미민주한인협회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이다. 1909년 황해도 은율군에서 태어났으며,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다니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정치학자로 활동하는 한편, 중국후원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주미위원부 협찬회 등에서 활동하며 일본 패망 이후 조국에서 활동할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광복 후에는 미국에서 재미민주한인협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며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임창영 (林昌榮)
임창영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중국후원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재미민주한인협회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이다. 1909년 황해도 은율군에서 태어났으며,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다니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정치학자로 활동하는 한편, 중국후원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주미위원부 협찬회 등에서 활동하며 일본 패망 이후 조국에서 활동할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광복 후에는 미국에서 재미민주한인협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며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박원경은 일제강점기 황해도 재령군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여성운동 단체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황해도 재령군에 거주하며 대영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해 2월 28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 재령군 일대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이후 전개된 3월 9일의 재령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어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4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애국부인회, 국제연합 조선협회, 여성문화협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박원경 (朴源炅)
박원경은 일제강점기 황해도 재령군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여성운동 단체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황해도 재령군에 거주하며 대영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해 2월 28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 재령군 일대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이후 전개된 3월 9일의 재령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어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4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애국부인회, 국제연합 조선협회, 여성문화협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박자선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 1주년 기념 축하 경고문」을 배포하다가 검거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78년 경기도 죽산군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주하였다. 1920년 2월 말, 3·1운동 1주년 기념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대한독립 1주년 기념축하 경고문」 약 2,400매를 대전, 대구, 마산 등지에 배포하였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12월 21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출판법,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박자선 (朴慈善)
박자선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 1주년 기념 축하 경고문」을 배포하다가 검거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78년 경기도 죽산군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주하였다. 1920년 2월 말, 3·1운동 1주년 기념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대한독립 1주년 기념축하 경고문」 약 2,400매를 대전, 대구, 마산 등지에 배포하였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12월 21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출판법,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박재복은 일제강점기 공장노동자로 일하며 중일전쟁에 관한 항일 선전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8년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태어나 대전으로 이주하여 여공이 되었다. 일본 미쓰이 재벌 계열 공장에서 일하면서 동료들에게 일제 패망과 독립에 대한 전망을 밝혔다. 이러한 이유로 1941년 10월 29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금고 1년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박재복 (朴在福)
박재복은 일제강점기 공장노동자로 일하며 중일전쟁에 관한 항일 선전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8년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태어나 대전으로 이주하여 여공이 되었다. 일본 미쓰이 재벌 계열 공장에서 일하면서 동료들에게 일제 패망과 독립에 대한 전망을 밝혔다. 이러한 이유로 1941년 10월 29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금고 1년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박정선은 일제강점기 조선민족대동단의 일원으로 제2차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실행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19년 이신애의 권유로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하였고, 부인 대표로 선정되었다. 1919년 11월 조선민족대동단이 추진한 제2차 만세시위 당시 서울 안국동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이 일로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박정선 (朴貞善)
박정선은 일제강점기 조선민족대동단의 일원으로 제2차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실행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19년 이신애의 권유로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하였고, 부인 대표로 선정되었다. 1919년 11월 조선민족대동단이 추진한 제2차 만세시위 당시 서울 안국동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이 일로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우전은 192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일본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에 다니던 중, 일본군 학도병으로 동원되었다. 중국 전선에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한미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 광복 후 한국광복군동지회, 광복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 정신을 선양하는 데 힘썼다.
김우전 (金祐銓)
김우전은 192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일본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에 다니던 중, 일본군 학도병으로 동원되었다. 중국 전선에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한미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 광복 후 한국광복군동지회, 광복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 정신을 선양하는 데 힘썼다.
김유신은 일제강점기 1930년대 중반 중국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를 졸업하고, 화베이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무정부주의 계열 청년들이 중심이 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참여하였다. 한국광복군의 통합에 따라 광복군에 입대하여 제2지대에 배속되었다. 1942년 조선의용군 개편에 합류하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태항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김유신 (金有信)
김유신은 일제강점기 1930년대 중반 중국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를 졸업하고, 화베이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무정부주의 계열 청년들이 중심이 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참여하였다. 한국광복군의 통합에 따라 광복군에 입대하여 제2지대에 배속되었다. 1942년 조선의용군 개편에 합류하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태항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김유철은 일제강점기 1911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920년경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30년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한 후, 1933년 중국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하여 중국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1939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하였다가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입대하여 쿤밍 등지에서 한미연합작전 등을 수행하였다.
김유철 (金裕哲)
김유철은 일제강점기 1911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920년경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30년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한 후, 1933년 중국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하여 중국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1939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하였다가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입대하여 쿤밍 등지에서 한미연합작전 등을 수행하였다.
한형석은 일제강점기 1939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하여 전지공작대 예술조장을 맡으며 다양한 항일 가곡을 작곡하였다. 한국광복군에 입대한 후 『광복군가집』을 발간하고,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등을 작곡하고, 「아리랑」 가극을 제작한 음악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한형석 (韓亨錫)
한형석은 일제강점기 1939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하여 전지공작대 예술조장을 맡으며 다양한 항일 가곡을 작곡하였다. 한국광복군에 입대한 후 『광복군가집』을 발간하고,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등을 작곡하고, 「아리랑」 가극을 제작한 음악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김치보는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청년돈의회, 성명회, 권업회 등 한인 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한국민의회를 비롯한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 단체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등 다양한 활동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치보 (金致寶)
김치보는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청년돈의회, 성명회, 권업회 등 한인 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한국민의회를 비롯한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 단체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등 다양한 활동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유상돈은 일제강점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한촌에서 조직된 권업회, 대한노인동맹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조선독립단 결사대, 동양혁명대의단 등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한인 사회의 무장투쟁과 사회주의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독립운동가이다.
유상돈 (劉尙敦)
유상돈은 일제강점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한촌에서 조직된 권업회, 대한노인동맹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조선독립단 결사대, 동양혁명대의단 등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한인 사회의 무장투쟁과 사회주의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독립운동가이다.
이민환은 일제강점기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소년모험단에서 활동하였다. 대한독립군비단 등에서 활동하며, 국내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적기단에서 활동하며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부터 한글신문 『선봉』 발간에 참여하였다.
이민환 (李珉煥)
이민환은 일제강점기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소년모험단에서 활동하였다. 대한독립군비단 등에서 활동하며, 국내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적기단에서 활동하며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부터 한글신문 『선봉』 발간에 참여하였다.
채영은 일제강점기 만주로 망명하여 북간도 한인 단체인 간민회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한국민회를 조직하였다. 1919년 중국 훈춘에서 무장조직 결사대를 결성하여 국내외 무장투쟁을 계획하는 한편, 혈성단을 조직하고 대한의용군에 참여하였다. 1921년 고려혁명군단에 참여하였다가 자유시참변 후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채영 (蔡永)
채영은 일제강점기 만주로 망명하여 북간도 한인 단체인 간민회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한국민회를 조직하였다. 1919년 중국 훈춘에서 무장조직 결사대를 결성하여 국내외 무장투쟁을 계획하는 한편, 혈성단을 조직하고 대한의용군에 참여하였다. 1921년 고려혁명군단에 참여하였다가 자유시참변 후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최봉준은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후 한인들의 교육 활동과 권익 확보에 힘썼다. 1905년 『해조신문』을 창간하였고, 1909년에는 신문을 통해 안중근 의거를 대대적으로 알렸다. 연해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성명회를 조직하고, 러시아 한인 중앙총회에서 활동하는 등 초기 러시아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다.
최봉준 (崔鳳俊)
최봉준은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후 한인들의 교육 활동과 권익 확보에 힘썼다. 1905년 『해조신문』을 창간하였고, 1909년에는 신문을 통해 안중근 의거를 대대적으로 알렸다. 연해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성명회를 조직하고, 러시아 한인 중앙총회에서 활동하는 등 초기 러시아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다.
고평은 대한제국기 1902년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1905년 검사에 임명되었다. 일제에 의한 국권 상실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비밀 무장단체 광복단, 독립군 의군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청산리대첩 후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러시아에서 고려혁명군을 조직하는 등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고평 (高平)
고평은 대한제국기 1902년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1905년 검사에 임명되었다. 일제에 의한 국권 상실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비밀 무장단체 광복단, 독립군 의군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청산리대첩 후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러시아에서 고려혁명군을 조직하는 등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