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군 ()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자성 부분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자성 부분
인문지리
지명
평안북도 최북단 압록강 상류의 남부에 위치한 군.
정의
평안북도 최북단 압록강 상류의 남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남쪽은 후창군, 남서쪽은 강계군, 북서쪽과 북동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하여 만주의 임강현(臨江縣)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29′∼ 127°01′, 북위 41°14′∼ 41°48′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 1,806㎢, 인구 8만 943명(1943년 당시)이다. 6면 30동리로 되어 있으며, 군청소재지는 자성면 읍내동이다.

자연환경

군의 동남부를 따라서 낭림산맥이 뻗어 향내봉(香內峰, 1,365m)·쾌상봉(快上峰, 1,245m)·운봉(雲峰, 1,258m) 등 높은 산이 열을 지어 압록강변에 다다르고, 여기서 남서쪽으로 강남산맥(江南山脈)이 분기되어 학성산(鶴城山, 1,276m)·쌍두산(雙頭山, 1,284m)·자작령(自作嶺, 710m) 등이 솟아 있다. 그래서 군 전체가 자강고원(慈江高原)에 속하며 산악이 중첩되는 산간지대이다.

압록강은 동쪽에서 서북류하다가 서쪽에서 남서류하며 감입곡류를 거듭하면서 서쪽으로 흐른다. 자성강(慈城江)은 가릉령(加陵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군의 중앙부를 서북류하고, 동북부에서 호예천(湖芮川)·중강천(中江川)과 합류하여 압록강으로 유입된다. 중강천의 동안에는 현무암으로 구성된 메사(mesa)의 특수지형을 이룬 오수덕산(烏首㯖山, 800m)이 있다.

대체로 군내에는 평야가 드물고 곳곳의 작은 하천 연변에는 소규모의 범람원이 형성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성강과 중강천 하류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분지가 발달되어 있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 위치하며, 높은 산악지대여서 순대륙성기후를 나타낸다.

군의 최북단에 위치한 중강진은 연평균기온 3.6℃, 1월평균기온 -21.1℃, 8월평균기온 23.8℃이며, 연강수량 799㎜이다. 대개 서리는 9월 26일부터 이듬해 4월 22일까지 내린다. 또한 우리 나라의 한극(寒極)으로 최저기온 -43.6℃(1933년 1월 9일)를 기록한 바 있으며, -30℃ 이하의 일수도 연평균 27일이다.

역사

[고 대]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이 군뿐 아니라 평안북도 전역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므로 구석기시대에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장토면 장성동·토성동에서 발견되고, 같은 장소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 및 주거지가 발굴되어 이 지역에 적어도 신석기시대부터는 사람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으로 믿어진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로서 군현이 설치되었을 것 같지만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압록강 대안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만주땅에 고구려 전성기의 서울이었던 통구(通溝, 또는 황성)가 있고, 이곳에 광개토왕비와 광개토왕릉으로 짐작되는 장군총이 있으며, 또 압록강을 끼고 만주와 반도 쪽에 고구려 고분이 산재하여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의 위원·강계·후창·자성 등지는 고구려의 근기지방에 속하여 문물이 발달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발해시대에는 서경압록부에 속하였다.

[고 려]

발해 멸망 후 만주의 동가강 일대와 압록강 중류의 초산·벽동·위원·강계·자성·후창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발해유민 열만화(烈萬華)가 정안국(定安國)을 세워 거란에 대항하였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986년(성종 5) 거란에게 멸망한 뒤에 이 지역은 오랫동안 거란과 여진족이 분산하여 거주하였다.

고려는 일찍부터 북진정책을 써서 성종 때 압록강변까지 도달하여 청천강 이북, 압록강 이남의 평안북도 서쪽과 평안남도 전역에 이르는 많은 지역을 수복하였다. 1044년(정종 10)에는 압록강구로부터 함경남도 정평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하여 방위를 견고하게 하였으나 장성 이북의 자성 일대는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14세기 중엽 공민왕이 배원(背元)정책을 써서 북진을 계속하게 되면서 1361년(공민왕 10) 독로강(禿魯江, 강계)에 만호를 설치함으로써 압록강 중류 연안인 창성·벽동·초산의 선까지 수복되었으나 자성·후창지역은 그대로 남겨진 채 조선으로 넘어갔다.

[조 선]

1413년(태종 13)함길도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가 갑산군(甲山郡)으로 개편되었는데, 당시 갑산군은 이곳뿐 아니라 여연(閭延)·후주(厚州)·무창(茂昌) 등 여러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1416년 여연이 갑산과 너무 거리가 멀다고 하여 갑산 관하의 일부를 분리하여 지금의 중강진 부근에 여연군(지금의 자성군 여연면 하장동)을 설치하고 이를 함길도로부터 평안도로 이관시켰으며, 후주·무창을 여연군에 이속하였다.

세종 때 압록강 연안의 미(未)수복지 회복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1433년(세종 15)여연·강계의 중간지점인 자작리에 성을 쌓고 자성군을 설치하였다.

1440년여연군 동방 압록강 연안의 상무로보(上無路堡:지금의 후창군)에 무창현(茂昌縣)을 설치하였다가 2년 뒤에 다시 군으로 승격시켰다. 1443년에는 또 여연군의 일부 땅을 떼어 우예군(虞芮郡:지금의 자성군 장토면 토성동)을 설치하니 압록강 만곡부(彎曲部)에 여연·무창·자성·우예군 등 4개 군이 신설되고 다시 1446년 갑산군 관하의 삼수보(三水堡)를 군으로 승격함으로써 압록강 이남 전역을 완전히 수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4군은 모두 원벽한 곳에 있는 데다가 교통이 매우 불편하여 국토방위나 주민보호가 대단히 어려워 문종 때부터 4군의 철폐론이 일어나다가 1455년(단종 3) 먼저 여연·무창·우예의 3개 군을 폐지하고 4년 후에는 자성군마저 철폐하고 주민을 강계부 또는 구성부에 옮기니 이를 폐4군(廢四郡)이라 한다.

그러나 4군의 폐지는 영토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잠시 방어선의 후퇴와 행정상의 변동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조선 후기에 폐4군이 대체로 복구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후주·무창과 같이 이곳에도 1683년(숙종 9) 다시 진이 설치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5세기 중엽 자성군의 호구는 405호 2,576인이었다.

[근 대]

1869년(고종 6)자성군으로 다시 환원하였는데 이때 군청의 소재를 옛날의 자작리(지금의 자성면 읍내동)로 정하였다. 1895년 부군제가 실시되면서 강계부 자성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 평안북도 자성군으로 되었다. 1907년 당시 행정구역은 자하면·이평면 등 10면, 호구는 3,215호 1만 3755명이었다. 1920년에는 자성면·이평면 등 6면으로 개편되었고, 1943년 호구는 1만 3586호 8만 943명으로 대폭 증가하고 있다.

이 군은 압록강에 면하여 만주와 통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무장독립운동의 온상지였다. 3·1운동 때 이곳은 교통이 불편하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소식이 늦게 전달되어 3월 16일이 되어서야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중강진에 있던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사 이재명(李才明)이 주동이 되어 두 차례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1920년 3월에는 연통제(聯通制)가 조직되어 초대 군감에 김경희(金暻羲)가 임명되었다.

3·1운동 후 무장독립단체의 활약도 치열하여 고등경찰관계연표에 의거하여 1919년 4월 18일부터 1925년 3월 11일까지 이 군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 1919년 4월 18일 자작령에서 2명의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이 자성·강계간의 체송인(遞送人)을 습격하여 우편배낭을 탈취한 사건 등 52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 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인물로는 청사에 빛나는 봉오동전투의 홍범도(洪範圖)와 변창근(邊昌根)·박창식(朴昌植)·강병두(姜秉斗)·강일봉(姜一奉) 등이 있다.

유물·유적

중강면 중덕동 여연성지(閭延城址)와 상장동성지, 삼풍면 운봉동성지를 비롯하여 자하면 법동성지, 장토면 토성동 우예성지(虞芮城址)와 장성동성지 등이 있으며, 대부분의 성이 중강진에서 압록강 하류 연안을 따라 축성된 것이 특징이다.

운봉동성은 토석(土石) 혼합의 성곽으로 길이 436m, 높이 1m, 너비 2m 정도이다. 토성동의 우예성은 중강진에서 압록강 하류의 28㎞ 되는 강안에 있는 내성·외성을 갖춘 토석 혼합의 장성으로 길이 2㎞, 높이 1∼2m에 이른다. 성내에는 여러 건물지의 주초석이 남아 있다. 장성동의 성곽 역시 중강진에서 20㎞의 압록강 하류 강안에 위치하며 내성·외성을 갖춘 총연장 11㎞, 높이 1∼2.5m, 너비 3∼9m에 달하는 반원형 토축성이다.

고분군으로는 자성면 상평동·화전동 등지에 석총들이 흩어져 있고, 자하면 송암동, 장토면 장성동 등지에도 직경 10∼14m에 이르는 석총들이 분포되어 있다. 특히, 장토면 호하동에는 직경 5.5∼14m에 달하는 석총 50∼60기가 완형분으로 군집되어 고분군을 이루고 있으며, 중강면 중평동에도 동일한 유형의 석총들이 있는데 이 고분들은 전형적인 고구려의 석총들이다.

유적의 조사·발굴로서는 1955년 장토면 장성동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을 발굴, 조사하였고, 같은 해 중강면 중덕동에서 역시 청동기시대의 유적을 발굴하였다. 1957년 중강면 만흥동초당덕(草堂㯖)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포함층을 발굴하였으며, 같은 해 자하면 서해동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을 발굴하였다.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자하면 서해동·법동·송암동, 삼풍면 조아동 등에서 고구려의 적석총들을 발굴하였고, 1960년부터 1961년까지는 장토면 토성동에서 신석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는 주거지를 발굴, 조사하였다.

교육·문화

1935년 당시 25개의 서당이 있어 학동 1,407명의 초보교육을 담당하였다. 이곳은 구현령(狗峴嶺)으로 인하여 중앙과의 교통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과거에 오른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근대식 교육기관으로는 1902년 강제선(姜濟善) 장로가 중산동에 설립한 신성학교가 최초이다. 이 학교는 그 뒤 미국인 선교사 방혜법(邦惠法, Blair.,H.E.)이 교장으로 취임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1942년 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자성공립보통학교는 1913년 설립되었으며, 이 밖에도 중강공립보통학교·장토공립보통학교·만흥공립보통학교 등이 있었다. 또한 각 마을에는 간이학교가 있었으며 중강진에는 중강농업실수학교가 있었다.

이 군은 중강진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번창하였으며 1902년 교회가 처음 건립되었다. 1908년에는 건포교회(乾浦敎會)의 배상은(裵相殷) 장로, 장성교회(長城敎會)의 이인덕(李仁德) 장로, 상장교회(上長敎會)의 박평준(朴平俊) 장로, 중강교회의 최기영(崔基永) 장로 등이 많은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여 교회수가 13개로 번성하였다.

천주교는 1935년 마셀라가 중강진성당을 세웠으며, 1938년 약제사(藥劑師)인 경필(Cappel,J.) 신부가 부임하여 주민들에게 무료로 시혜(施惠)하면서 교세를 확장하였다. 불교사찰로는 화양사(和陽寺)가 있었으나 폐사되었다. 단오절이 가장 큰 명절로서 씨름·그네뛰기가 성황을 이루었다.

이 고장의 민요로는 「찰근요」와 「중머리요」가 전한다. 「찰근요」는 남녀 어린아이들이 길짱구라는 풀뿌리 부분을 손가락으로 자꾸 훑어서 그 뿌리 부분이 빨개질 때에 부르는 노래로서, “작두깐에 불이야/오양깐에 불이야.”라는 노랫말을 되풀이한다.

「중머리요」는 머리 깎는 아이를 놀릴 때 부르는 노래다. “중 중 깎아중/도꾸루 깎아중/대패루 밀어중.” 옛날에는 어린아이들이 남녀 구별 없이 머리를 길게 길러서 뒤에 땋아 늘어뜨렸다. 이러한 풍습이 있는 시대에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보기 흉한 모습이었으나, 이따금 머리에 부스럼이 나서 약을 바르기 위하여 머리를 깎는 수가 있다.

이와 같이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보기에도 흉하지만 약점을 표시하는 징표도 되는 것이기에 짓궂은 동무들은 이러한 말을 자꾸 뇌까리면서 아이를 놀린다. 이와 같이 일종의 동요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음악성은 별로 없으며, 약간의 음률이 있을 뿐이다.

민속놀이로는 정월 대보름 밤에 말바구놀이를 한다. 이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즐기는 놀이이다. 쪼루기라 하는 사람이 탈 수 있는 썰매 위에 이불과 요를 두툼히 깔고 잘 아는 사람 여럿이 함께 타고는 술과 음식을 충분히 싣고 말의 목에 방울을 달아 눈이 많이 쌓인 벌판이나 압록강의 빙판 위를 달리게 하면서 달을 구경하고 술을 마시며 노래도 하는 놀이이다.

남자들은 기생과 함께 타고 그의 춤과 노래를 감상하기도 한다. 혹한을 느끼면서도 죽음과 같이 절대정적한 가운데 명랑하게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에서 말방울소리, 말달리는 말굽소리와 노랫소리가 어울린 복합된 소리를 들으면서 이를 즐기는 흥취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놀이라 할 수 있다. 이 놀이는 집단적 놀이가 아니고 개인끼리 한덩어리가 되어 즐기는 놀이이나 대체로 군민의 행사처럼 보인다. 이 놀이는 압록강변에 있는 각지에서 볼 수 있다.

산업·교통

일반적으로 토양이 척박하고 추운 겨울이 길며 여름철 강우량이 적어 풍토적 조건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벼농사는 극히 일부 지방에서 극조생도(極早生稻)를 재배할 뿐이다. 범람원과 분지를 이용한 밭농사로는 콩·옥수수·감자·대마·귀리 등을 재배하고, 부업으로 축우가 행하여진다.

다른 지방보다 화전민이 많으며 산삼을 채취하기도 한다. 산지에는 홍송·삼송·낙엽송 등의 천연림이 무성하여 삼림지대로 알려져 있으며, 압록강 연안의 중강진은 벌목·제재·뗏목 발착의 중심지이다. 그래서 영림서(營林署)가 설치되고, 이평면에는 삼림철도가 부설되었다. 지하자원으로는 철·흑연·금·구리 등이 발견되고 특히 자철광(磁鐵鑛)의 매장량이 매우 많지만 채굴은 부진한 상태이다.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1830년 군내에는 10일장으로 관전장(館前場)·하장(下場)과 5일장으로 용곡방(龍谷坊)의 사천장(舍川場)이 있었다. 주요 거래품은 쌀·잡곡류·포목·솜·조기·해채(海菜)·소금·놋그릇·철물·나무그릇·농기구·잎담배·가축 등이었다. 1926년경에는 읍내장, 즉 자성장과 중강면 중산동의 중강장이 4·9일에, 이평면 진송동의 이평장이 1·6일에 열렸다.

1906년에 중강진을 거쳐 혜산에 이르는 국도가 건설되고 압록강을 이용한 수로교통이 열려 중강진은 만주를 연결하는 요충지로서 시장도 성하였다. 특히 이 군은 많은 벌재(伐材)를 뗏목과 육로를 이용하여 신의주로 반출하였으며, 나무그릇과 함지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도로는 자성을 중심으로 자성∼만포진(滿浦鎭), 자성∼장진, 자성∼신갈파진(新乫坡鎭) 등의 3개 노선이 Y자형을 이루고 있으나 군내의 교통은 불편하다.

읍·면

[삼풍면 三豊面]

군의 남서단에 위치한 면. 면소재지는 인풍동이다. 1914년 삼흥면(三興面)을 병합하였다. 낭림산맥에서 강남산맥이 서쪽으로 분기되는 지점에 속한다. 동쪽에는 도매봉(桃梅峰, 1,297m)·홍도아덕산(紅桃兒㯖山, 1,089m)이 있고, 북쪽에는 천제봉(天祭峰, 960m), 남쪽에는 마전령(摩田嶺, 717m)이 있다.

서북부 국경을 따라 압록강이 남류하여 충적지를 형성하였으며, 삼풍천(三豊川)은 북류하다가 인풍동에서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에 유입된다. 압록강 연안과 삼풍천 계곡에서 벼농사를 하고 있으나 밭농사가 주이며, 조·피·옥수수·콩·팥 등의 주산물과 대마·호마(胡麻) 등의 특산물이 산출된다. 교통은 마전령을 넘어 자성으로 통하는 산간도로가 유일한 것이며, 압록강변에 취락이 산재한다. 인풍(仁豊)·영풍(永豊)·신풍(新豊)·신흥(新興)·조아(照牙)·운봉(雲峰) 등 6개 동리가 있다.

[이평면 梨坪面]

군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소재지는 진송동이다. 낭림산맥과 강남산맥이 분기되는 접촉부에 위치하여 산세가 험하다. 동쪽에 수덕산(水㯖山, 1,035m)·회양산(會陽山, 1,031m)·청석산(淸石山, 1,029m)이 있고, 북쪽에 불로봉(不老峰, 1, 130m)·정가봉(鄭哥峰, 1,228m)·명당봉(明堂峰, 1,032m)·호암산(虎巖山, 921m), 남쪽에 송덕산(松㯖山, 1,007m)·사가봉(四可峰, 949m), 중앙에 복후산(伏厚山, 1,138m)·주봉(周峰, 980m)·판자봉(板子峰, 1,069m) 등이 솟아 있다.

낭림산맥의 사랑령(舍廊嶺, 1,787m)에서 발원한 자성강은 북류하여 이평동 부근에 소규모 분지를 형성하였으며, 북서쪽으로 곡류하면서 자성면지역으로 흘러간다. 대부분이 산림지역으로 밭농사가 주이며 조·콩·옥수수·수수 등이 재배되고, 각종 임산자원도 많이 산출되고 있다. 교통은 자성강 계곡을 따라 남북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으며, 도로 연변에 취락이 발달하였다. 진송(榛松)·이평(梨坪)·평상(坪上)·회중(檜中) 등 4개 동리가 있다.

[자성면 慈城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소재지는 읍내동이다. 낭림산맥의 마전령 북쪽 기슭에 해당하여, 동쪽에 학성산과 제일봉(第一峰, 1,093m)이 있고 남단에 홍도아덕산이 솟아 있다. 사랑령에서 발원한 자성강과 관동천(館洞川)이 합류하여 서북 방향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유입한다.

자성강의 넓은 곡류부에는 구하도가 절단된 지형이 분지상을 이룬다. 이 지역은 농업을 생업으로 하여 쌀·콩·조·옥수수·팥·수수 등의 식량작물이 재배되고, 임산물이 특히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특산물로 인삼과 대마·호마 등이 생산되고 있다. 읍내(邑內)·상평(常坪)·화전(花田)·호례(浩禮) 등 4개 동리가 있다.

[자하면 慈下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소재지는 법동이다. 낭림산맥의 북쪽 끝에 속하여 산세가 비교적 북으로 낮아지는 지형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동부에 제일봉·이두봉(二頭峰, 1,060m)·송암산(松巖山, 808m), 서부에 소반덕산(小盤㯖山, 1,028m)·법동산(法洞山, 795m)·속주봉(速酒峰, 791m)·수류봉(樹留峰, 612m)·민동봉(珉洞峰, 810m) 등이 솟아 있는 산악지대이다.

서부 국경을 따라 압록강이 남류하고, 남서부에는 자성강이 북류하여 소규모 분지를 형성하였다. 압록강 연변지대와 내륙의 자성강 분지에서 논농사를 짓고 있으나, 주산물은 조·피·옥수수·수수·콩 등이다. 생업은 임업이며, 이 밖에도 인삼과 수달피(水獺皮)가 특산물로 유명하다. 교통은 자성강 계곡을 따라 자성―연풍―중강진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고, 압록강 강변도로도 개통되었다. 법(法)·서해(西海)·송암(松巖)·연풍(延豊) 등 4개 동리가 있다.

[장토면 長土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소재지는 토성동이다. 남쪽에 백설봉(白雪峰, 1, 222m)·학성산이 있고 중앙에 달기봉(達奇峰, 1,096m)이 있어 산세가 매우 험하다. 북부에는 압록강이 곡류하면서 서류하여 연안에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호예천은 전지역에서 북류하여 압록강으로 유입된다. 주요 산물은 조·콩·옥수수·수수·피 등의 잡곡과 임산물이다. 유적으로는 토성동 우예성지와 장성동성지가 있다. 토성(土城)·호상(湖上)·호하(湖下)·호서(湖西)·장성(長城)·벌(伐) 등 6개 동리가 있다.

[중강면 中江面]

군의 북동단에 위치한 면. 면소재지는 중평동이다. 남쪽에 금창산(金昌山, 1,146m)·쌍두산, 북쪽에 중지봉(中支峰, 1,051m)·오덕산(烏㯖山, 892m)·오수덕산 등이 높이 솟아 산세가 험하다. 북부 국경을 따라 압록강이 서류하며, 낭림산맥의 금창산과 쌍두봉에서 발원한 중강천은 협곡을 이루면서 중앙부로 북류하여 압록강으로 유입된다.

중강천이 압록강에 합류되는 지점에 충적지를 형성하여 농경지대를 이룬다. 생업은 임산자원에 의존하고 있으나 쌀·조·옥수수·수수·피·콩·팥·메밀 등을 생산한다. 유적으로는 중덕동에 여연성지가 있고 만흥동에서 유물층을 발굴하였다. 중평(中坪)·상장(上長)·중덕(中德)·중상(中上)·건하(乾下)·만흥(晩興) 등 6개 동리가 있다.

광복 후 변천

자강도 북쪽 압록강과 자성강 연안에 있는 군. 동쪽은 화평군과 양강도 후창군, 남쪽은 만포시와 장강군, 북쪽은 중강군, 서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고 있다. 인구는 3만 4292여 명(1996년 추정)이다.

1948년까지 평안북도에 속하여 있다가 1949년 1월 자강도가 신설되면서 자강도에 편입되었다.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시 자성군에서 중강진과 화평군이 분리되었으며, 1963년 12월에는 동부리를 자성읍으로, 다시 자성읍을 운봉리로 개칭하였다.

행정구역은 자성읍을 비롯하여 연풍·법동·송암·화전·호례·삼거·대남·관평·귀인·상평·수침·자작·구중영·유삼·신풍·양덕·역수 등 18개 이, 운봉노동자구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자성읍이다.

[자연환경]

이 군은 대부분이 산악지대로서 북동쪽에는 학성산(1,276m)·산두산(1,275m) 등 비교적 높은 산들이 솟아 있는 학성산맥이 뻗어 있으며, 그밖의 지역에는 전가봉(1,227m)·두류산(1,204m)·무선동산(1,252m) 등의 산들이 있다. 하천은 군의 가운데로 자성강이, 남쪽으로는 삼풍천이 흐른다.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가진다. 연평균기온은 4.8℃, 1월 평균기온은 -17.5℃, 7월 평균기온은 22.3℃이며, 연평균강수량은 972㎜이다. 첫서리는 9월 28일경에, 마감서리는 4월 29일경에 내린다. 산림이 군 전체 넓이의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주요 수종은 참나무·소나무·피나무·이깔나무·가문비나무·전나무 등이다.

[산업·교통]

주요 산업은 임산업·지방공업·농업 등이다. 경지면적은 군 전체 넓이의 6.5%를 차지하고 그 중 밭이 76%이고 논은 7.4%에 지나지 않는다. 지방의 공업은 주로 직물·제약·일용품·식료공업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통망으로는 운봉∼만포 간 철도가 지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태종실록』
『세종실록지리지』
『자성읍지』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39)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조선총독부, 1942)
『평안북도지』(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3)
『자성군지』(자성군지편찬위원회, 1981)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집필자
노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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