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촌유고 ()

한문학
문헌
조선시대 때의 문신, 임서의 시 · 유문 · 서(序) · 발 등을 수록한 시문집.
정의
조선시대 때의 문신, 임서의 시 · 유문 · 서(序) · 발 등을 수록한 시문집.
개설

1책. 필사본. 편차를 구분하지 않았다. 대략 저작 연대순으로 1598년(선조 31) 29세 때부터 죽기 전까지의 시문을 수록하였다. 1982년 경문사에서 영인하였다

내용

내용은 시 500여 수, 유문(諭文) 2편, 서(序) 2편, 발 2편, 묘지 1편, 봉사 1편, 장계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유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사대부로서의 교양의 소산으로서, 자신의 생애와 밀착하여 핍진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과화장포추억김창의선생구사(過花藏浦追憶金倡義先生舊事)」라는 시는 임진왜란 때에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김천일(金千鎰)이 강화도의 화장포에서 왜군을 격파한 사적을 두고 노래한 것이다. 작자가 화장포를 지나면서 느낀 자기 개인의 감회를 나타낸 것이지만, 국난에 몸을 바친 영웅적인 행사를 형상화하여 개인적인 정서는 민족적인 정서로 고양되고 있다. 이 밖에 명군이 서울에 들어와 달라진 서울의 풍경을 읊고 있는 시 등을 보면 현실감각에서 시의 정서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자서( 自序)」는 함양군수로 부임했을 당시에 쓴 것이다. 수령의 할 일은 응당 ‘쇠잔한 백성을 소생시키고 병폐를 제거’하는 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렴주구(苛斂誅求)를 강요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크게 갈등을 느껴서 수령으로서의 자신을 스스로 신칙한 내용이다.

「삼회당서(三悔堂書)」는 49세 때에 지은 것으로, 이제 50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생활태도를 반성하고 가다듬은 내용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용서하지 않고 철저히 독책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계해봉사(癸亥封事)」는 계해반정 뒤에 향리에 있다가 신왕의 부름을 받고,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힌 봉서이다. 만주족의 세력팽창을 당면한 최대의 문제로 인식하여서 외교 및 국방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황해감사시장계(黃海監使時狀啓)」는 황해도감사를 맡았을 때에 올린 것으로, 무엇보다도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데에 유의하면서 무비(武備)에 치중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군량을 비축하고 병기를 수리하도록 각별히 조처하는 한편, 내수사(內需司) 소속의 노예들로써 새로 ‘내노별대(內奴別隊)’를 편성하여 조련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때 이괄의 반란이 일어나자, 황해도의 ‘내노생력군(內奴生力軍)’으로 응변하여 기세를 올릴 수 있었으며, 예비하여 두었던 군량미를 매우 요긴하게 사용했다. 반란을 진정시키고 어가를 한강에서 맞이하였을 때 인조는 작자를 보고 “경이 군사를 조련하고 양곡을 비축하였던 것은 정히 오늘을 위한 계책이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이 유고는 시제에다 대개 그 시상을 일으킨 사연을 서술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월일까지 밝혀 놓았으며, 이를 연대순으로 배열하였기 때문에 작자의 이력과 생활정서 및 종유(從遊)가 일기처럼 드러난다. 따라서 이 시고를 통해서 작자와 작자 주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생하고 소상하게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석촌유고해제』(임영택, 경문사, 1982)
집필자
윤호진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