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266㎝. 꼿꼿한 자세로 앉아 정면을 향하고 있는 이 불상은 두 발을 양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완전한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현재 광배(光背)는 없어졌고 사각대좌(四角臺座) 위에 앉아 있다.
나발(螺髮)로 처리된 머리 위에는 높이 14㎝, 밑변 48㎝나 되는 큼직한 육계(肉髻)가 표현되었으나, 머리와는 확연히 구분되지 않고 있다. 얼굴은 넓적하여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데, 얼굴 길이보다는 너비가 더 넓다. 이마는 좁은 편이지만 박진감이 넘친다. 비교적 넓은 얼굴에 가늘고 긴 초승달 모양의 바로 뜬 눈, 이마에서 거의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아담한 코, 두터우면서도 윤곽이 뚜렷한 입 등이 조화 있게 잘 배치되어 있다. 목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삼도(三道)를 표현하였는데 음각선 처리가 아닌 굴곡진 모양으로 나타냈다.
두 손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 끼워 놓았는데, 1987년 복원불사(復原佛事) 때 나온 원래의 철제 손들도 같은 모양의 것이어서 나무 손은 후보(後補)하면서 원래의 철제 손을 그대로 복제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맞대고 다른 손가락은 펴서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手印)을 짓고 있다. 왼손은 무릎에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은 맞잡고 있는 모양이다. 이러한 수인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이므로 이 불상이 통칭 약사불(藥師佛)이 아니라 아미타불일 가능성이 크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를 걸치고 있다. 어깨에서부터 가슴까지 내려오는 U자형의 굵은 띠 모양 옷깃 안으로 넓게 터서 가슴이 많이 노출되었다. 그 아래로 엄액의(掩腋衣: 대의(大衣) 안에 입는 내의(內衣)로, 왼쪽 어깨에서 내려와 오른쪽 겨드랑이로 들어가도록 둘러 입는다.)가 보인다. 옷주름은 부드럽고 유연한 물결 주름인데, 특히 팔의 주름은 매우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처리하였다.
대좌는 흙으로 만든 사각형의 대좌이나, 현재는 허물어진 부분이 많아 자세한 모습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복원이 가능한 편이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은 9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조성이 부쩍 늘어난 철불의 한 예이다. 구체적인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8세기의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불상 양식이 보다 해이해지고 활력이 감퇴된 양식으로 변하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듬직한 얼굴, 당당한 가슴, 불쑥 나온 아랫배 등에서는 아직도 긴장감이 나타나 있으나, 8세기에 나타나던 유연한 탄력감이 아닌 경직되고 이완된 모습을 보여 준다.
신체비례 면에서 보면, 858년작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1963년 지정)이나 863년작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963년 지정)보다는 약간 고식(古式)이다. 865년작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1962년 지정),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867년)과는 거의 동일한 비율을 보이고 있어 대체적으로 9세기 중엽 불상들과 같음을 볼 수 있다.
형태나 선 같은 것은 대체로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도 친연성이 있으며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1962년 지정),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1962년 지정)과도 상통하고 있다. 즉 옷주름의 세부 수법은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 편으로, 어깨나 팔의 계단식 주름, 다른 부분에 물결식 주름을 보이는 것 등은 동일하다. 이것이 더 진전되면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나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평행 계단식 옷주름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 불상은 9세기 중엽에 조성된 초기 철불의 걸작으로서 당시 철불상의 실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불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