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한씨 세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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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신 한효중과 한혁 등이 1617년에 간행한 청주한씨의 족보.
내용 요약

청주한씨 세보는 조선 시대 문신 한효중과 한혁 등이 1617년에 간행한 청주한씨의 족보이다. 분량은 1책이며, 1617년 청주의 보살사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체제는 표지, 청주한씨전대사적, 반시당기, 청주한씨시조유기서사비, 발문, 왕후세계, 보도, 간기로 구성되어 있다. 보도는 7층 횡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맨 앞에 청주한씨세보라 판각되어 있다. 자표(字標)는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매겨져 있다. 말미의 간기에 족보 간행 주관자, 각수(刻手), 서리들의 명단까지 기록되어 있어 서지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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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문신 한효중과 한혁 등이 1617년에 간행한 청주한씨의 족보.
내용

분량은 불분권 1책이며, 표제와 판심제 모두 “청주한씨세보”이다.

“황명 만력 사십오년 정사 초봄에 서원의 보살사에서 개간했다(黃明萬曆四十五年丁巳孟春西原菩薩寺開刊)”는 간기에 따르면, 1617년 청주보살사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칭은 편의상 ‘청주한씨 만력보(萬曆譜)’ 또는 ‘청주한씨 정사보(丁巳譜)’라 해도 무방해 보인다.

크기는 반곽이 가로23.5cmx 세로 26cm이며, 서발문, 범례, 부록은 항자수부정(行字數不定), 유계(有界), 주쌍행(註雙行), 선장(線裝), 저지(楮紙)이다.

체제는 표지(表紙), 청주한씨전대사적(淸州韓氏前代事蹟), 반시당기(返始堂記), 청주한씨시조유기서사비(淸州韓氏始祖遺基叙事碑), 발문(跋文), 왕후세계(王后世系), 본문에 해당하는 보도(譜圖), 간기(刊記)로 구성되어 있다.

청주한씨전대사적은 시조 한란(韓蘭) 이하 한강(韓康), 한사(韓謝), 한악(韓渥), 한방신(韓方信), 한수(韓脩), 한상질(韓尙質), 한명회(韓明澮), 한충(韓忠) 등 현조(顯祖)들의 사적으로 「위지(魏志)」, 『고려사(高麗史)』, 『목은집(牧隱集)』, 『사가집(四佳集)』 등에서 자료를 발췌 · 수록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청주한씨는 선우씨(鮮于氏), 기씨(奇氏)와 함께 기자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데, 시조 한란의 사적 역시 기자(箕子)의 후손임을 강조하는데 주안점이 있다.

여기에 대해 본 족보의 찬자는 위지의 “기자의 후손 준(準)위만(衛滿)에게 축출되어 마한을 건국하면서 자손들이 한(韓) 성(姓)을 가지게 되었다는 기록과 기자의 자손 중 우평(友平)의 후손은 선우씨, 우량(友諒)의 자손은 한씨, 우성(友誠)의 자손은 기씨가 되었다”는 기록을 인용하여 한씨가 기자에서 출자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반시당기」는 1607년(선조 40) 청주목사 한백겸(韓百謙)이 시조 한난을 위해 재당(齋堂)을 건립하고 지은 기문이다. 기문에 따르면, 한백겸은 재당 건립 이전인 1605년(선조 38)에 이미 시조의 제단과 기적비를 세운 바 있으며, 재당의 건립은 그 연장 선상에서 이루어진 위선 사업이었다. 「청주한씨시조유기서사비」는 한백겸이 세운 기적비의 비문으로 찬자는 한준겸(韓浚謙)은 한백겸의 동생이다.

발문은 모두 2종인데, 족보 간행을 주관한 한혁과 한효중이 1617년에 지은 것이다. 발문에 따르면, 당시 청주한씨는 일부 보첩(譜牒)이 전해지고 있었지만 각 지파의 파보(派譜)에 불과하였고, 이마저도 공간된 것은 없었다고 한다.

이에 청주목사 한효중이 한혁에게 족보 간행을 요청하자 한혁은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제공한 초보(草譜)와 한효중이 작성해 둔 호서지역 자손들의 초보를 정밀하게 교감하는 한편 보단(譜單)을 두루 수렴하여 간행을 완료한 것이다.

물론 간행 논의는 청주에서 일어났지만 한효순의 주선하에 경향의 동종들이 여기에 적극 참여함으로서 내용의 충실성을 기할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 간행 경비는 한효중이 대부분 부담하고 일부 호서지역 동종들이 여기에 보조하였으며, 간역의 실무는 한혁, 한담(韓潭), 한순립(韓純立), 한급(韓岌) 등 주로 청주지역 인사들이 담당하였다.

한편 발문 뒤에 있는 왕후세계는 한씨가문에서 배출된 역대 왕비들의 명단으로 모두 16명이 수록되어 있다. 청주한씨는 여흥민씨와 더불어 왕후를 많이 배출하기로 이름난 가문이었는데, 여기에는 우리나라는 물론 2명의 명나라 황후도 포함되어 있다.

기록 방식은 누구의 딸이라 기록한 다음 항을 바꾸고 1자 대두하여 모왕(某王)의 모후(某后)라 표기하였는데, 예컨대 예종장순왕후의 경우에는 “한명회녀”(韓明澮女) “예종대왕비장순왕후”(睿宗大王妃章順王后)라 표기하였다.

보도는 7층 횡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맨 앞에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라 판각되어 있다. 자표(字標)는 다른 족보와 마찬가지로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매겨져 있다. 이 족보는 청주한씨 중에서도 시조의 8세손 한악의 2자 공의(公義)수(脩) · 리(理) 계열, 4자 공연(公衍)→주(柱) 계열, 5자 공신(公信)→휴(休) · 영(寧) 계열을 중심으로 수록되어 있다.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는 한수(韓脩)의 증손이며, 족보 간행에 참여한 한급(韓岌)은 한명회의 5세손이다. 선대의 위선사업은 물론 본 족보 간행을 사실상 주도했던 한효순과 한백겸형제는 한수의 3자 한상경의 6세손과 7세손이다.

자손의 총 수록대수는 시조로부터 대략 21-23대이다. 자녀는 선남후녀(先男後女)에 따라 수록하되 사위만 기록하고 외손은 전혀 수록하지 않았다. 다만 왕후세계는 내외손을 막론하고 별판에 수록하였는데, 이는 왕실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서자녀는 이름 위에 서자(庶子) · 서녀(庶女)라 표기하였고, 계후한 경우에는 계자(繼子)라 표기하여 적서와 출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각 인물의 주기는 상대로 올라갈수록 자세하고, 아래로 내려 올수록 소략한 편이다. 예를 들어 한명회는 자(字), 관직(官職), 군호(君號), 시호(諡號), 묘소 위치 등이 배위(配位)의 성관(姓貫)과 봉호(封號) 등이 상술된 반면 그 이하로는 관직만 약술된 경우가 많다.

한편 말미의 간기에는 한효순 등 족보 간행 주관자의 명단은 물론 각수(刻手)들과 서리들의 명단까지 기록되어 있어 서지학적으로도 매우 중요시된다.

이 족보는 조선초기 최고의 문벌을 자랑했던 청주한씨족보의 초간본이라는 점에서 일차적인 중요성이 있다. 그리고 전반적인 체제와 수록 방식이 다른 족보와는 차이점이 있고, 왕실관련 기록에 커다란 비중을 두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다만 자녀를 선남후녀에 따라 수록하고 외손을 생략했다는 점에서는 자료적 가치에 있어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정사본)
『유천집(柳川集)』(한준겸)
집필자
김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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