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

조각
작품
김만술이 1947년에 제작한 청동 조각.
정의
김만술이 1947년에 제작한 청동 조각.
개설

청동. 높이 70㎝, 너비 30㎝, 두께 3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만술(金萬述)은 출생지인 경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조각가이다. 이 작품은 1947년에 제작된 것으로, 1940년대 전반의 수업기를 거친 이후 제작된 작가의 초기 작품에 해당한다. 몸을 묶은 줄을 끊어내려는 남성을 역동적으로 조각하여 제목 「해방」이 의미하는 바를 성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제작한 시기로 미루어 볼 때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은유한 것으로 추측된다.

내용

남성은 몸과 오른팔을 두른 밧줄을 잡아당겨 풀어내려 하고 있으며 굽혔던 상체를 일으켜 세우면서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부릅떠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다. 구속을 의미하는 밧줄을 풀어내는 손과 결연한 표정이 암시하는 바는 자유와 해방을 향한 단호하고 절대적인 의지이다. 인체는 과장이나 변형이 없이 평이하게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

조각에는 “1947.7 金萬述 作(김만술 작)”이라는 사인이 있다. 남아있는 작품이 극히 적은 1940년대의 조각으로 희소성이 높고, 특히 해방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다룬 조각 작품이면서 그 메세지가 분명한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원본은 석고상으로 개인이 소장하고 있으며, 이것을 모본으로 청동으로 다시 주조한 작품 10여 점이 전하고 있다. 이 작품의 받침대는 한반도 지도의 형상으로 보인다. 경주 예술가협회가 주최한 미군진주환영기념미술전에 출품된 바 있다.

김만술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의 히나고 지츠조(日名子実三) 조각연구소에서 수업하였다. 히나고 지츠조는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조각과를 졸업하고 제전(帝展)에 입선하면서 활동한 작가로, 사실적인 양식의 인물 조각상이나 여성 누드상 등의 관전용 작품 이외에도 기념탑이나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탑」(미야자키(宮崎)시 소재, 1938) 등 공공조각을 다수 제작하였고 무공훈장이나 일본 축구협회의 심볼을 도안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히나고 지츠조의 조각 작품 『정찰(偵察)』은 1934년 이왕직에서 구입하여 덕수궁 미술관에 소장, 전시된 바 있으며, 1944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을 하기도 했다. 그의 관전풍 사실주의 양식과 공공 기념 조각상에 치중하는 경향은 해방 이후 김만술의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다.

김만술은 1942년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김광작(金光作)이라는 이름으로 「박군의 상」을 출품하여 입선했으며, 1944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는 「와다나베(渡邊)씨의 초상」과 「침부(針婦)의 습작(習作)」(1944)으로 입선했다. 해방 이후에는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소녀두상」으로 특선을 했으며, 1953년에는 「흉상」으로 무감사 입선을 했다. 그는 해방 이후에 경주에 정착하였으며, 1956년부터 신라조각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경주 지역의 기념 조각과 초상 조각을 제작하였다. 1949~51년까지 경주예술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의의와 평가

「해방」은 역동적인 시대의 상황과 역사를 인물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1959년에 제작된 「역사 1」, 「역사 2」와 함께 작가의 대표작이다.

참고문헌

『근대문화유산 조각분야 목록화 조사보고서』(문화재청, 2011)
『한국 근대미술의 역사』(최열, 열화당, 1998)
집필자
서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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