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신앙은 집안에 위치하는 신적 존재들에게 종교적인 믿음을 바치는 민간신앙이다. 가정 단위의 신앙으로, 유교의 제례가 남성 위주이며 형식성·이념성·논리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것과 달리, 집안의 부녀자들이 주가 되며 소박하고 현실적이며 정적인 것이 특징이다. 조령·삼신·성주·조왕신앙 등의 가신신앙은 민간·무속신앙과 뒤섞이고 겹치는 부분도 많다. 유구한 한민족의 농경생활 역사에서 생활과 밀착된 종교현상으로, 가족의 생일·제사·명절에 마련한 음식을 바쳤다가 물리는 식으로 주부들을 중심으로 검소하게 전승되다가 현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소멸되어 버린 신앙이다.
가신신앙은 가정 단위의 신앙이지만, 유교적인 제례와는 전혀 갈래가 다르다. 성격상으로 유교 제례는 남성들이 주가 되고 형식성 · 이념성 · 논리성 등의 특징을 지니는 데 비해서, 가신신앙은 부인들이 주가 되며 소박하고 현실적이며 정적인 것을 특징으로 한다. 무속이나 동제(洞祭) 등과 같이 원초 이래로 점차 자연적으로 발생해서 전승되어온 민간신앙의 한 갈래이다. 이러한 민간신앙은 기성 종교들과는 달라서 교주나 창시자가 없고, 교리나 경전 · 교단조직들이 희박하며, 각별한 윤리관의 강조도 적고, 논리적인 구분의식도 많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특히, 가신신앙은 민간신앙 중에서도 그런 성격을 가장 많이 띠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민간신앙의 신관(神觀)은 흔히 다신다령교적(多神多靈敎的)인 성격을 띠는데, 이것은 가신신앙과 무속신앙, 그리고 동제를 비롯한 마을신앙이 모두 기본성격으로 공유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혼합되어서 구분이 어렵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를테면 주요한 가신인 조상신이나 성주 · 터주 등은 그대로 그것이 굿의 주요한 제차인 조상거리 · 성주거리 · 대감거리의 신들이 된다. 조왕(竈王)이나 삼신(産神)도 주요한 가신인데, 호남지방의 굿은 조왕굿에서부터 본격화되고, 제주지방의 굿에서는 삼신을 모시는 불도맞이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가신신앙과 무속신앙에는 서로 겹치는 면이 많으며, 이러한 경향은 마을신앙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는데, 마을이나 공동체의 서낭굿 · 대동굿 · 별신굿 등에서도 위의 조상거리 · 성주거리는 주요한 굿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신신앙과 무속신앙이 근원적으로는 같았을 가능성도 많다. 그런데 고대 부락국가의 종교행사들에 관한 언급은 일찍부터 기록에 나오고 신성 무구(神聖巫具)도 많이 출토되었으나, 가신신앙에 관해서는 그 성격상 기록이나 출토품이 없다. 지금까지의 가신신앙연구도 무속신앙연구의 일부분으로 이루어져왔고 독자적인 주제로 관심을 모으는 경우는 적은 편이었다.
가신의 종류를 이능화(李能和)는 성주(城主) · 터주 · 제석(帝釋) · 업(業) · 조왕 · 문신(門神) 등 6종을 들었고, 아키바(秋葉隆)는 성주 · 제석 · 대감(大監) · 지신(地神) · 터주 · 조왕 · 걸립(乞粒) · 수문장 · 측신(厠神) 등 9종을, 그리고 임동권(任東權)은 성주 · 터주 · 제석 · 사창신(司倉神) · 조왕 · 수문신 · 측신 등 8종을 든 바 있다. 여기에서는 제석신앙을 포함하는 조령(祖靈) · 삼신 · 성주 · 조왕, 터주와 업, 문신과 측신 등에 대한 신앙을 소개하고, 그밖에 용왕과 칠성, 풍신(風神) 영등에 관한 집안신앙에 대해서도 언급하도록 한다.
한국의 전통적인 민간신앙에서 행해져온 조령신앙은 원래 유교적인 조상숭배와는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교식 조상숭배의 그늘에 가려서 지금은 거의 소멸상태에 이르렀고, 또한 지난날의 기록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단편적인 기록과 최근의 민속조사를 통해 조령신앙의 역사와 현황을 살펴볼 수 있다.
조령신앙의 역사에서 먼저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신라의 시조신 김알지(金閼智)의 신화에 등장하는 황금궤이다. 이것은 오늘날 호남지방에서 조령의 신체(神體)로 모시는 제석오가리와 영남지방의 세존단지(또는 시준단지)나 조상당세기에 해당하는 고대 왕가의 조령신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의 「 노무편(老巫篇)」과 『삼국유사』에서도 제석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만, 조령신앙의 구체적인 역사를 더듬기는 불가능한 상태이다. 지금까지도 호남지방에서는 제석오가리라는 오지그릇 항아리를 종손이나 장남의 집 안방 또는 마루에 모시는 사례를 볼 수 있는데, 그 안에는 추수한 햅쌀을 넣는다.
이것을 조상의 위패를 모신 감실 옆에 두는 경우도 있고, 그 옆에 몸오가리라고 하는 오지그릇들을 놓는 경우도 있다. 몸오가리는 위패 내지 신주독(신줏단지)을 대신하는 것으로서, 유교식 조상제사의 대수(代數)와 마찬가지로 4대 이내이거나 아니면 각 대의 내외를 별도로 해서 여덟 개 이내일 수도 있다. 몸오가리에는 쌀이나 한지를 넣는데, 한지에는 조상의 이름을 적기도 하며, 뚜껑이 있는 대바구니로 오지그릇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오가리가 4대봉사의 위패격이라면, 제석오가리는 조상 전체를 포괄하는 조령의 상징인 셈이다.
제석오가리는 부루단지 또는 조상단지라고도 부르며, 몸오가리는 신주단지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을 모시려면 조심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해서 지금은 모시는 집이 드물다. 이것에 대한 제사는 명절이나 가족의 생일 등에 행하며, 차린 음식을 먼저 이 제석오가리와 몸오가리에 바쳤다가 물리는데, 불교식으로 술과 고기는 놓지 않는다. 음식을 바치고는 농사가 잘되고 집안이 무고하며 자손들이 번영하게 해달라고 빈다. 아울러 특기할 만한 것은, 전라남도지방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이러한 신앙에서 ‘조상할매’라는 여신관념(女神觀念)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영남지방에서는 이것이 각각 ‘세존단지’와 ‘조상당세기’라는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다. 세존단지는 시조단지 또는 시준단지라고도 하며, 한 집에 한 개로써 조상 전체를 상징하고, 조상당세기는 4대봉사의 위패 대신으로 네 개 또는 여덟 개 이내이다. 음식을 바칠 때 술과 고기를 놓지 않는다든가 여신관념이 강한 것도 호남지방과 같다. 호남지방에 비해 영남지방에서는 그 실물들을 최근까지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영남 · 호남 지방과 달리 중부지방에서는 이러한 조령숭배의 농촌 사회적인 통념을 민속에서 찾아보기가 이미 어려운 실정이다. 물론, 중부지방 굿의 열두거리 가운데 엄연히 제석거리가 있고 조상거리도 따로 있으나, 이 경우에 제석은 수명신이나 농신적(農神的)인 성격을 더 많이 띠고 있다. 또 자료도 매우 드물고 단편적으로만 나타난다. 그리고 제주도의 경우에는 조령신앙이 훨씬 많이 전승되고 있으나, 그 양상이 매우 다양하고 성격도 복잡하며 육지와는 다른 점이 많다. 이 조령신앙은 그 원초적인 여신성 · 농신성 · 조령성 · 삼신성에 다시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적인 불교성과 조선시대적인 유교 제례성까지 모두 받아들여왔다.
조령신앙은 농경민족다운 평화와 포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이룩되어온 우리 나라의 전체 종교문화사를 상징적으로 집약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도 조령신앙은 우리 나라 민속의 특징을 복합해서 대변하는 살아 있는 신앙이었으나, 이제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이능화는 삼신이란 삼신(三神)이 아니라 태신(胎神), 즉 산신(産神)이라고 밝힌 바 있다. 즉, ‘삼 가른다’는 말에서와 같이 ‘삼’은 곧 ‘태(胎)’를 뜻한다는 것이다. 삼신신앙의 발생동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의학이 덜 발달된 옛 사회일수록 산모와 산아의 사망률이 높았고 이에 대한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서도 그 중요한 요인의 하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남아존중관념이 강했고, 남아가 잉태되기를 바라는 기자신앙(祈子信仰)에서부터 안산(安産)과 양육의 바람도 컸다.
그런 바람에 바탕해서 원초사회 이래로 형성되어 전승되어왔을 삼신관념이나 그 신앙은 지금도 남아있는데, 한 형태로 보통 안방 윗목의 선반 또는 시렁 위에 삼신단지를 모셔놓는다. 안에는 쌀을 넣고 한지로 덮은 다음 왼새끼(외로 꼰 새끼)로 묶어놓는데, 단지 대신 바가지를 사용하기도 하며, 또 평소에는 아무 형태도 없이 이른바 ‘건궁삼신’으로 마음속으로만 위하는 경우도 있다. 삼신을 위하는 날은 산후 7일, 3 · 7일 등이며, 가족의 생일이나 명절 등에 음식을 바치는 경우도 있다.
평소에는 건궁삼신으로 모시다가 산전 · 산후 기간에만 새로이 삼신단지를 마련하기도 하며, 이때 금줄을 치고 외부사람의 출입을 금하는데, 이것도 어린 생명의 출생과 성장에 부정한 일이 없도록 조심하려는 마음의 다짐을 종교적으로 강화하려는 징표로 볼 수 있다. 자손의 번창과 가세의 융성을 아울러 기원하던 삼신신앙의 풍속은 이제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이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던 남아존중관념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치관의 하나로 남아 있어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성주는 가옥의 수호신이며, ‘성조(成造)’라고도 한다. 성주신앙의 역사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가신들과 마찬가지로 옛 기록이 없다. 고대 제천의식 이래의 유습이라는 학자들의 견해도 있으나, 아직은 모두 추측일 뿐이고 분명한 증거제시는 불가능한 상태이다. 성주는 가옥의 수호신이므로 조상단지처럼 맏아들의 집에만 있을 수 있다는 제한성이 없다. 가정이 형성되고 가옥이 마련되면 모셔지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가신신앙보다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다만, 그 형태에서는 지역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전라남도에서는 성주 독을 대청마루 안쪽 한구석에 놓고 봄가을로 겉보리와 벼를 번갈아 가며 넣는 형태가 많다. 독 대신 작은 동이를 사용하거나 한지로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전북특별자치도에서는 아무 형태도 없이 치성을 드릴 때면 안방에서 마음속으로만 위하는 ‘건궁성주’ 또는 ‘뜬성주’의 예가 많다.
그리고 경기도 · 충청도 · 경상도 지역에는 한지를 신체(神體)로 하는 경우가 많으나, 곳에 따라서는 독이나 단지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며, 강원도에서는 한지의 경우와 단지의 경우가 거의 같은 비율로 발견된다. 성주는 마루에 모시는 것이 원칙이지만, 마루가 없으면 안방에 모신다. 한지를 신체로 삼는 경우에는 대들보나 안방 문 위 대공에 가로 세로 각 30㎝, 40㎝ 정도의 크기로 접어서 붙인다. 다른 가신신앙과 마찬가지로 대개 부인들이 가족의 생일이나 명절에 마련한 음식을 조상들과 함께 성주에게도 먼저 바치고 집안의 평안과 풍농을 빈다.
무속의 굿에서도 성주거리는, 특히 중부지방의 열두거리에서는 빠지지 않는 주요한 제차이며, 또한 손진태(孫晉泰)가 「성주신가(城主神歌)」를 소개한 이래로 서사무가인 성주풀이의 전승이 여러 편 채록되기도 했다. 그리고 성주는 봄가을의 안택(安宅)이나 고사에서도 다른 가신들과 함께 모셔지지만, 상량식이나 낙성식, 또는 이사의 경우 등 새로운 가옥이 마련되거나 새 가정이 형성되었을 때에는 흔히 단독으로 모셔지는 독자성을 보이기도 한다. 성주는 언제나 집 중앙에 위치하고 어느 집에서나 대개 모시는 신이기 때문에 가신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중시되는 존재이다.
조왕은 본래 불의 신으로, 그 역사에 대해서는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에 중국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능화는 이것을 환인(桓因)의 신시(神市) 이래로 전승된 풍습이라고 하였다. 불에 대한 신앙 자체는 원초 이래의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 뒤의 역사는 분명하지 않고 현재까지 민간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어왔다. 조왕은 부엌에 위치하는 존재이고, 따라서 여성, 특히 주부의 신앙처럼 된 일면이 있다.
충청도 일부를 포함한 호남일대에서는 조왕중발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부뚜막 위에 작은 물그릇을 고정시키고 매일 또는 며칠에 한번씩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그 앞에서 손을 비비며 치성을 드린다. 가족의 생일이나 명절에는 음식을 바치며, 주로 자손의 안녕함을 기원하므로 마치 소박한 모성애의 상징으로 보이는 면도 있다. 그 밖의 지방에서는 조왕의 형태가 구체화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조왕신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이른바 건궁조왕인 셈이며, 필요하면 솥뚜껑을 뒤집어놓고는 거기에 음식을 차리고 빈다.
그리고 영남의 오구굿이든 호남의 씻김굿이든간에 굿의 제차가 먼저 부정굿을 친 다음에 조왕굿에서부터 본격화되듯이, 조왕은 무속에서도 중요한 신이다. 또한, 최근까지 도회지에서도 이사할 때 우선 연탄이나 난로 등 불을 먼저 들여놓는다거나 이사 문안에 성냥을 사가는 것도 모두 불의 신인 조왕과 관련된 유습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제주도 서사무가에서 조왕할망은 문전신(門前神) 남선비의 본처이고, 첩인 변소귀신과는 원수이기 때문에 부엌과 변소 사이에서는 검부러기 하나라도 내왕하면 큰 동티(動土)가 난다고 해서 조심하는 위생관념의 작용도 볼 수 있다.
또한, 제주도에 전승되는 신구간(新舊間) 풍습도 조왕신앙과 관계가 깊다. 그것은 대한이 지난 5일 뒤부터 입춘 전 3일까지 7,8일간 조왕을 비롯한 여러 가신들이 승천하여 옥황상제 앞에서 회의를 하므로, 이 때 집수리나 이사를 하면 아무 탈이 없고, 일년내의 빚 청산 등 묵은 일을 이때에 다 마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중국에 강하게 남아 있는 관습이며, 우리 나라의 경우 그 영향을 받은 것이겠으나 중국에서는 조왕이 남신이라는 점이 다르다.
터주와 업에 관한 옛 기록은 없고, 현재 남아 있는 양상도 제대로 수집되기 전에 거의 다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터주는 택지신(宅地神)이다. 그 신체는 대개 항아리에 쌀이나 벼 또는 콩 · 팥을 같이 넣어서 짚주저리를 씌우고 뒤뜰 장독대 근처에 놓아둔다. 그런데 터주관념은 충청북도 이북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고, 현재 영남 · 호남 지방에서는 터주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호남지방에는 희미하나마 ‘ 철륭’이라는 관념이 있는데, 이 역시 뒤꼍에 한지나 곡식을 넣은 단지를 묻고 위에 주저리를 씌우며, 명절 때면 주부들이 집안의 평안을 기원한다. 영남지방의 지신밟기라는 것도 이러한 택지신 관념과 관련이 있는 풍습인 듯하다.
한편, 업은 재신(財神)으로, 구렁이 · 족제비 · 두꺼비 등을 그 실체라고 여기면서, 이 업이 나가면 집안이 망한다고 생각한다. 업에 대해서는 이덕무(李德懋)의 문집에 뱀 · 족제비 외에 망아지업에 관한 언급이 있고, 돼지 · 고양이 · 소 등의 업과 인업(人業) 이야기도 있으나, 그 신앙의 역사는 아직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현재 중부지방에서는 업의 신체를 역시 뒤꼍에 짚주저리를 씌운 형태로 모신다.
그러나 영남 · 호남 지방에는 터주와 마찬가지로 업이라는 관념도 없으며, 다만 영남지방에는 풍농과 집안의 무고를 위해 곳간이나 다락에 모시는 용단지라는 것이 있고, 호남지방에서는 이따금 귀 달린 뱀이 집을 지켜준다는 관념을 볼 수 있어서, 제주도의 뱀 숭배와 가까운 재신신앙이 엿보이기도 한다. 제주도의 칠성본풀이에 의하면, 중의 자식을 잉태하고 버림받은 귀한 집 외동딸이 뱀으로 변해서 곳간의 ‘안칠성’이 되고, 그 막내딸은 뒤꼍 주저리 밑 기왓장 속으로 들어가서 ‘밧칠성’이 되었다고 한다.
문신은 글자 그대로 문을 지키는 신으로, 문신풍속은 서울과 제주도에서만 특히 뚜렷한 전승자료들이 보인다. 서울에는 옛날부터 큰 대문들이 있어서 문신상들이 다양했고, 『삼국사기』에서부터 4성문제(四城門祭)를 지냈다는 기록도 보인다. 『삼국유사』에도 처용(處容)의 형상을 대문에 붙여 잡귀를 쫓았다는 문신신앙풍속이 언급되었다. 조선 초기의 『용재총화』에도 처용이나 종규(鍾馗) · 화계호도(畵鷄虎圖) 등 연초(年初)의 다양한 문신신앙 풍속이 언급되었고, 그것은 『동국세시기』 등 후기의 기록들에서도 다양하게 계속되고 있다.
다른 지방에도 문신관념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제주도에서는 특히 뚜렷한 관념을 볼 수 있다. 문전본풀이에 의하면, 가장인 남선비는 올래의 주목지신(柱木之神)이며 정살지신이고, 그 첩이 변소귀신이며 이 사악한 첩에게 살해되었던 본처가 조왕할망이라 한다. 말자성공설화(末子成功說話)의 하나인 이 설화는 어머니를 소생시키고 첩을 처치한 막내인 일곱째 아들이 ‘상방’이라고 부르는 마루의 앞문전신이 되고 있다. 그리고 여섯째 아들이 뒷문전신이 되며, 위의 다섯 아들은 본토의 터주에 해당하는 오방토신으로 배정되는데, 이 신들은 굿에서 무신으로 대접받고 문전본풀이도 가창된다.
변소귀신, 즉 측신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도 신경질적인 젊은 여신으로서 관념되며, 헛기침을 하지 않고 변소에 들어가면 화를 내 탈을 일으키고 그 탈은 굿을 해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공포의 대상이 되어왔다. 집수리를 잘못했을 때에도 변소동티가 특히 무섭다고 여긴다. 측신의 이러한 성격은 변소가 본채와 멀리 떨어져 후미진 곳에 있어서, 특히 밤에는 출입하기가 두렵게 되어 있는 전통적인 가옥구조와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제는 문신과 함께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우물이나 논 · 바다 등 물에 관계되는 신앙행위에는 으레 용왕관념이 따르게 마련이다. 특히, 우물과 용의 복합관념에 관한 역사적 기록으로서는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부인이 우물에서 출현한 용의 겨드랑이로부터 탄생했다고 하는 사례가 있다. 또한 『고려사』 고려세계(高麗世系)에도 왕건의 할머니인 용녀가 개성대정(開城大井)을 통해 서해로 출입하였다고 하는 사례가 언급되고 있다. 용왕에 관한 신앙행위 가운데에는 마을공동제나 무당의 굿으로 벌이는 경우도 많지만, 순전히 가정에서 또는 주부들만의 행사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월 열나흗날에 우물물을 모두 퍼내고 제상을 차려 기원하는 사례들이 전국적으로 드문드문 볼 수 있거니와, 충청남도의 서해 장고도(長古島)에서는 2월 첫 진일(辰日) 만조 때 각 가정의 주부들이 바닷가에서 짚을 깔고 제상을 차려놓고 가정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기도 하며, 제주도에서도 ‘ 용왕맞이’라는 이름의 가정단위 제례를 바닷가에서 지내는 사례가 많다.
다음에 다양한 것으로 칠성신앙이 있다. 절에 있는 칠성각은 도교 내지 불교적인 것이지만, 위에 언급한 제주도의 안칠성 · 밧칠성과 같이 민간전승의 뱀신앙에 칠성의 이름이 붙는 사례도 있다. 그리고 장독대 곁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평안과 장수를 기원하는 등의 갖가지 칠성신앙 형태들도 적지 않게 산견(散見 : 드문드문 볼 수 있음)된다. 그밖에 특히 산간지방에 가면 중요한 재산의 하나인 소를 위하는 신앙이 있고, 또 비단 해안지대만이 아니고 내륙에도 풍신(風神) ‘영등’에 관한 신앙이 있다. 제주도에서는 마을공동제로 영등굿을 하나, 다른 지방에서는 농사를 위한 풍우(風雨)의 순조를 기원하는 가정단위의 대상신이 된다.
안택(安宅)과 고사(告祀)는 여러 가신들에 대한 종합적인 제의(祭儀)이다. 이에 관한 기록은 세종 때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에서부터 보인다. 즉, “ 사대부의 집에서 매해 초에 기복(祈福)을 하고, 수선(修繕)이나 영조(營造) 등의 경우에는 양재(禳災)를 하는데, 반드시 장님 5, 6명을 써서 독경을 한다.”고 했으니 분명히 안택의 일종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동국세시기』에는 “상원(上元)에서 정월 말 사이에 소경을 불러서 안택경을 읽으며 밤을 새워 액을 막고 복을 빈다.”고 하였고, 또한 “시월을 상달이라 해서 무당을 데려다가 성조신을 맞아 떡과 과일을 놓고 안택하기를 기도한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안택과 고사에 관한 기록이 분명하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안택과 고사는 지방에 따라서 이름이 다양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이 안택과 고사이나, 그 구분은 선명하지 못하다. 다만, 고사는 정월에 지내기도 하지만 대개는 추수 뒤에 지내는 경우가 많아서 감사제의 성격이 강하고, 수시로 지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한편, 안택은 가을보다는 정월에 지내는 경우가 많아서 안택이라는 이름대로 새해에 한해 동안의 집안의 평안을 빈다는 의미가 중심이 되며, 아울러 어떤 재화나 불안 등을 의식했을 때 수시로 지내는 사례도 많아 부정기성을 강하게 보이기도 한다. 경상북도 영덕지방에서는 정월보름 전 또는 10월에도 안택을 한다.
안택은 판수들을 데려다가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주로 독경을 하게 하는데, 조왕 · 성주 · 삼신의 순서로 모신다. 전북특별자치도 지방에서는 ‘도신(禱神)’이라고 해서, 10월 중에 택일해서 추수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가신 전체를 모시는 예들이 있다. 제관은 주부나 더러는 가장들이며, 순서는 먼저 장독대에서 철륭에게 제사하고 다음에 안방에서 성주 · 삼신 · 조상의 상들을 차리고 소지를 올리며, 마지막에 안뜰에서 지신제를 올리고 나서 동네에 떡을 돌린다.
한편, 호남지방에는 ‘올베심리’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벼가 여물 무렵 먼저 잘 익은 부분을 조금 골라 베어서 밥을 짓고 지내는 추수감사제이다. 대상은 유교 제례처럼 조상신들인 경우도 있고, 조령과 함께 성주 · 삼신까지 모시는 경우도 있다. 집안 친척들을 불러서 가장이 제사를 지낸 뒤 함께 회식을 한다. 더러는 벼이삭 심을 한 묶음 매달거나 서너 개의 벼포기를 벽에 가로 걸어두는 경우도 있다. 벼의 먼저 여문 부분을 베어서 천신(薦新)한다는 것은 영남지방의 ‘ 풋바심‘이라는 풍속과도 상통한다.
문화가 변동하는 과정에서 대개 물질적인 측면은 빨리 변하고, 정신적인 측면,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신앙의 측면은 변화의 속도가 가장 늦다. 그러나 근래에 사회나 문화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매우 격심해서 신앙전승까지도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터주나 업, 문신이나 측신 등은 이미 거의 다 사라져가고 있으며, 사례 자체가 매우 드물고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더구나 조령신앙은 일찍부터 유교 제례에 가려서 영남이나 호남지방에서조차 전승자료를 얻기 어려울 만큼 소멸되어버렸다.
앞으로도 근대화의 사회 · 문화 변동과 함께 가신신앙은 점점 더 사라져갈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가신신앙은 무속 및 동제의 전통과 거의 일신동체로서 워낙 그 뿌리가 깊으므로 그다지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며, 가정과 관련된 전통적인 가치관들을 대변하면서 민간의 종교적 심성의 저변에 계속 흐를 것이다.
본래 이 가신신앙들은 유구한 한민족의 농경생활의 역사에서 그 생활과 밀착되어온 종교현상이었다. 자연을 대하는 겸허한 마음가짐의 기반을 이루어온 것이 이 가신신앙이었으며, 특별한 행사보다는 대개 가족의 생일이나 제사 또는 명절에 마련한 음식을 바쳤다가 물리는 식으로 주부들을 중심으로 매우 검소하게 전승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