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1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 · 전적 · 공조좌랑에 이르렀다. 앞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병조좌랑 · 교리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에 제수되었다. 이어 이조좌랑이 되어 어사로 관동(關東)에 나가 서리들의 정치와 백성들의 폐해를 살폈다. 다시 옥당(玉堂)에서 근무하다가 이조로 옮겨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이곳에서 승문원제술관(承文院製述官) · 한학교수(漢學敎授) · 교리 · 사국수찬(史局修撰) 등을 겸대하다가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모시고 가서 이식(李植)과 함께 팔도에 보내는 교서를 지었다. 이어 응교 · 사간에 승진된 뒤 검상(檢詳) · 사인(舍人) · 집의 · 이조참의로 승진했다. 다시 사가독서를 허락받고 호당에 들어갔고 승문원부제조가 되었다.
그 뒤 병조참의 · 우승지 · 형조참의 · 좌승지 · 남양부사 · 대사간 · 대사성 ·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39년(인조 17) 도승지 등을 거쳐 1641년 한성부우윤 · 대사헌이 되었다.
이 해 도승지로서 홍문관 · 예문관의 양관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43년 이경여(李敬輿) · 신익성(申翊聖) 등과 함께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瀋陽)에 잡혀가 억류되었다.
이듬 해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어 심양에 가서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시고 왔다.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한 자문(咨文)을 썼다 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풀려나와 예조판서가 되었다.
아버지 이정구, 아들 이일상(李一相)과 더불어 3대가 대제학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병자호란 때 심양까지 잡혀갔던 의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저서로 『백주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