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전라우수영 ( )

해남 전라우수영
해남 전라우수영
건축
유적
문화재
조선 초기, 전라남도 해남군에 축조한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 사적.
이칭
약칭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유적
건립 시기
세종 22년(1440)
관련 국가
조선, 일본
관련 인물
이순신, 이억기
높이
12척
둘레
3,848척
면적
230.820㎡
소재지
전라남도 해남군 남문길 25-2 (문내면)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2016년 9월 30일 지정)
소재지
전라남도 해남군 남문길 25-2 (문내면)
내용 요약

해남 전라우수영(海南 全羅右水營)은 조선시대 수군 영진보성(營鎭堡城)에 설치된 전라 우도 수군의 본영이다. 앞바다는 명량(鳴梁) 또는 울돌목이라는 매우 좁은 해협이며, 전라우수영 앞으로 양도(羊島)가 있어 명량의 거친 물살을 막아준다. 또한 성의 동쪽으로 약 5㎞ 떨어진 길목이 좁아지는 곳에 원문성(轅門城)을 축조하여 육지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해남 전라우수영은 1992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139호로 지정되었으며, 2016년 9월 30일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35호로 지정되었다.

정의
조선 초기, 전라남도 해남군에 축조한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 사적.
발굴경위 및 결과

2000년에 해남 전라우수영(海南 全羅右水營)의 성곽과 성 내부 시설물에 대한 종합적인 지표조사가 이루어졌다. 당시 다양한 문헌 조사와 현황 조사를 통해 성곽의 범위 및 성벽의 잔존 구간이 보고되었으며, 주3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의 위치가 추정되었다.

2004년 망해루지와 북문지 등을 중심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주4 초석, 주5주27 관련 주8와 성벽 및 외황(外隍)을 확인하였다. 2009년에는 망해루가 복원되었다. 2011년 시굴 조사를 통해 성벽의 잔존 상태와 수구 등을 확인하였다. 2017년에 망해루의 서측 성벽이 훼손되어 긴급하게 수습 차원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2018년에는 남측 성벽의 훼손 구간에 대한 수습 차원의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때 훼손된 성벽의 주6를 조사하여 성벽의 축조 수법을 확인하였다. 이 조사에서 확인된 축조 수법은 기반층을 주7하거나 점토 다짐을 한 후 그 위로 석재를 쌓고 최종적으로 흙으로 덮어 마무리한 방식이었다. 또한 2018년에 망해루~서문지 구간에서 성벽 및 주26 유구를 확인하였으며, 북문지~동문지 구간에서 성벽 유구, 영창 추정 지역에서 성벽 유구 및 생활 유적을 확인하였다.

2019년에 동헌 추정지 관련 유구, 남측 성벽 유구를 확인하였다. 2020년에는 동헌 추정지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동헌 및 내아 관련 건물지 10여 동과 주9, 보도 시설, 출입 시설 등의 유구를 확인하였다.

건립경위

해남 전라우수영은 처음에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현에 설치되었다고 알려져 주1 그러다가 태종 8년(1408)에 지금의 함평군 학교면 학교리에 있는 당시 무안(務安)의 대굴포(大掘浦)로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을 옮겼다. 그러나 수군처치사영이 바닷가가 아닌 영산강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데다가 영산강이 구불구불한 주10인 까닭에 병선이 드나드는 데 문제가 있었다. 이로 인해 세종 14년(1432) 전라수영을 목포로 옮기게 된다. 세종 22년(1440)에는 전라수영을 해남의 황원곶(黃原串)으로 다시 주2 전라수영은 1464년(세조 10)에 절도사영으로 승격되었다. 1479년(성종 10)에 순천 주11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후부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이라 칭하게 되었다.

전라우수영에는 수사 1인, 우후 1인, 전선 2척, 거북선 2척, 주12 1척, 병선 3척, 해골선 1척, 사후선 8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변천

해남 전라우수영은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39호 전라우수영성지로 지정되었다. 이후 2016년 9월 30일 대한민국 사적 제535호 해남 전라우수영으로 지정되었다.

형태와 특징

해남 전라우수영은 해안에 인접한 해안성(海岸城)으로 축성되었다. 성은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성곽에는 4개소의 주13 형식의 성문이 있고, 북문 밖 서쪽에 망해루가 있으며, 체성벽 위에 여장(女墻)이 있다. 성내의 도로는 4대문을 기준으로 "십(十)"자 형태를 이루면서 주요 시설과의 접근로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성내의 도로망은 현재 우수영 마을의 도로망과 대체로 일치한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따르면, 전라우수영은 둘레 3,848척, 높이 12척, 주14 680개, 옹성문 4개소, 수구문 1개소로 이루어진 석축성이다. 성내의 주요 시설을 살펴보면, 관사주15, 제승당 등 25개소의 각종 주16과 주요 시설, 선청과 주17로 이용된 12개소의 누정이 있었다. 이 중 선창은 성의 남문 밖에 주18으로 만들었다. 현재 어사 동헌(御使東軒), 객사(客舍), 주19, 주20, 충무공 비각(忠武公碑閣), 주21, 정곶사(鼎串寺), 태평정(太平亭), 망해루(望海樓) 등이 남아 있다. 주22, 남장대(南將臺), 사대문(四大門)은 없어졌다. 1947년에 통제사 충무공 명량대첩비를 경복궁에서 문내면 학동리 1186-7번지로 이전 설치하였다.

전라우수영의 체성(体城)은 뒤채움 방식으로 쌓았다. 지표에서부터 석재→사질점토→석재의 순으로 번갈아 쌓아 주25과 유사한 수법으로 성을 조성하였다. 뒤채움에 사용한 석재는 15~50㎝ 내외이며, 열을 지어 쌓은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다. 체성의 지대석은 길이 약 110㎝ 이상, 높이 25㎝ 내외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지대석 남측 아래쪽의 면석은 길이 약 70㎝ 이상, 높이 50㎝ 내외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또한 길이 약 30~110㎝, 높이 25~60㎝ 내외의 거칠게 다듬은 석재를 외벽의 면석으로 사용하였다. 면석과 지대석은 경사진 지형을 따라 계단식으로 조성하였으며, 1열은 풍화 암반 위에 바로 올려 조성하였다. 지대석의 석렬은 북서-남동 방향으로 확인되는데 이는 추정되는 외황(外隍)과 동일한 방향이다. 지대석과 외황과의 거리는 약 300㎝ 내외이다.

체성에서 직각 방향으로 돌출된 곳에 치성(雉城)을 조성하였다. 체성과 치성이 이어진 부분이 남은 성벽 중 가장 높은 부분이다. 성벽의 잔존 최대 높이는 약 3.3m이다. 가장 높은 성벽의 상부 뒤채움 높이를 보면 체성의 잔존 최대 높이는 약 4m 내외가 된다. 치성(雉城)의 경우 대부분 길이 약 25~40㎝ 크기의 다듬지 않은 잡석을 사용하여 쌓았으나, 치성의 주23는 길이 약 50~60㎝, 높이 15㎝ 내외의 거칠게 다듬은 주24을 사용하였다.

추정 외황(外隍)은 자연층인 풍화 암반을 굴착하여 조성하였다. 추정 외황의 방향은 체성 지대석의 방향과 일치한다.

의의 및 평가

해남 전라우수영은 성종 10년(1479) 전라수영이 분리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들어선 후 전라우수영으로 이름 붙여졌다. 전라우수영은 임진왜란 당시 명량대첩으로 인해 잘 알려진 곳이다. 성의 형태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편이며, 종합 정비 계획에 따라 순차적으로 정비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기존에 토성으로 알려진 성곽이 석성으로 확인되었고, 발굴 조사에서 우수영 관련 유적이 확인되어 관련 연구가 먼저 진행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원전

『조선왕조실록』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大東地志)』

단행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라우수영성 편』(『조선시대 수군진조사』, 2011)

논문

고용규, 「전라우수영(성)의 역사와 성격」(『전라우수영성의 역사적 의의와 복원·정비』, 해남군·명지대학교, 2012)
주석
주1

『태종실록』권16 8년 12월24일 정유

주2

고용규, 「전라우수영(성)의 역사와 성격」, 『전라우수영성의 역사적 의의와 복원·정비』, 해남군·명지대학교, 2012.

주3

제작 연대가 오래된 지도. 근대적인 투영법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의 회화적인 지도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말샘

주4

백제 무왕 때인 636년에 지어진 누각. 바다를 바라보는 누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우리말샘

주5

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로 쌓는 돌. 우리말샘

주6

도로를 내거나 시설물을 건축하기 위하여 산을 깎아 놓아 비탈진 곳. 우리말샘

주7

땅을 반반하고 고르게 만들다. 우리말샘

주8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우리말샘

주9

높이 쌓아 올린 대나 터. 우리말샘

주10

뱀이 기어가는 모양처럼 구불구불 흘러가는 하천. 우리말샘

주11

현 여수 일원

주12

조선 시대에, 수군이 사용하던 병선. 중맹선을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13

다락으로 오르내리는 문. 우리말샘

주14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15

조선 시대에, 지방 관아에 있던 안채. 우리말샘

주16

관청이 스스로를 가리켜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7

여러 사람이 어떤 목적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모이는 곳. 우리말샘

주18

돌로 쌓아 만드는 일. 우리말샘

주19

법을 어긴 군인을 가두기 위하여 부대 안에 설치한 감옥. 우리말샘

주20

군아(郡衙)에서 구실아치가 일을 보던 곳. 우리말샘

주21

발전(發電), 수리(水利) 따위의 목적으로 강이나 바닷물을 막아 두기 위하여 쌓은 둑. 우리말샘

주22

무기를 넣어 두는 창고. 우리말샘

주23

서측

주24

판자 모양으로 가공되어 바닥이나 벽면에 붙이는 석재. 암석 가운데 15~38cm의 납작하고 편평한 암석을 말한다. 지붕, 바닥, 벽면이나 도로 따위에 이용된다. 우리말샘

주25

판자와 판자 사이에 흙을 넣고 공이로 다지는 일. 또는 그 판자와 공이. 우리말샘

주26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27

어떤 건물이 있던 터. 우리말샘

집필자
이일갑(시공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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