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전라우수영(海南 全羅右水營)은 조선시대 수군 영진보성(營鎭堡城)에 설치된 전라 우도 수군의 본영이다. 앞바다는 명량(鳴梁) 또는 울돌목이라는 매우 좁은 해협이며, 전라우수영 앞으로 양도(羊島)가 있어 명량의 거친 물살을 막아준다. 또한 성의 동쪽으로 약 5㎞ 떨어진 길목이 좁아지는 곳에 원문성(轅門城)을 축조하여 육지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해남 전라우수영은 1992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139호로 지정되었으며, 2016년 9월 30일에 국가지정문화재(현, 국가지정유산) 사적 제535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에 해남 전라우수영(海南 全羅右水營)의 성곽과 성 내부 시설물에 대한 종합적인 지표조사가 이루어졌다. 당시 다양한 문헌 조사와 현황 조사를 통해 성곽의 범위 및 성벽의 잔존 구간이 보고되었으며, 고지도(古地圖)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의 위치가 추정되었다.
2004년 망해루지와 북문지 등을 중심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망해루(望海樓) 초석, 기단석(基壇石) 등 건물지(建物址) 관련 유구(遺構)와 성벽 및 외황(外隍)을 확인하였다. 2009년에는 망해루가 복원되었다. 2011년 시굴 조사를 통해 성벽의 잔존 상태와 수구 등을 확인하였다. 2017년에 망해루의 서측 성벽이 훼손되어 긴급하게 수습 차원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2018년에는 남측 성벽의 훼손 구간에 대한 수습 차원의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때 훼손된 성벽의 절개지(切開地)를 조사하여 성벽의 축조 수법을 확인하였다. 이 조사에서 확인된 축조 수법은 기반층을 정지(整地)하거나 점토 다짐을 한 후 그 위로 석재를 쌓고 최종적으로 흙으로 덮어 마무리한 방식이었다. 또한 2018년에 망해루서문지 구간에서 성벽 및 치성(雉城) 유구를 확인하였으며, 북문지동문지 구간에서 성벽 유구, 영창 추정 지역에서 성벽 유구 및 생활 유적을 확인하였다.
2019년에 동헌 추정지 관련 유구, 남측 성벽 유구를 확인하였다. 2020년에는 동헌 추정지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동헌 및 내아 관련 건물지 10여 동과 축대, 보도 시설, 출입 시설 등의 유구를 확인하였다.
해남 전라우수영은 처음에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옥구현에 설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태종 8년(1408)에 지금의 함평군 학교면 학교리에 있는 당시 무안(務安)의 대굴포(大掘浦)로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을 옮겼다. 그러나 수군처치사영이 바닷가가 아닌 영산강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데다가 영산강이 구불구불한 사행천(蛇行川)인 까닭에 병선이 드나드는 데 문제가 있었다. 이로 인해 세종 14년(1432) 전라수영을 목포로 옮기게 된다. 세종 22년(1440)에는 전라수영을 해남의 황원곶(黃原串)으로 다시 옮겼다. 전라수영은 1464년(세조 10)에 절도사영으로 승격되었다. 1479년(성종 10)에 순천 내례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후부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이라 칭하게 되었다.
전라우수영에는 수사 1인, 우후 1인, 전선 2척, 거북선 2척, 방선(防船) 1척, 병선 3척, 해골선 1척, 사후선 8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해남 전라우수영은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39호 전라우수영성지로 지정되었다. 이후 2016년 9월 30일 대한민국 사적 제535호 해남 전라우수영으로 지정되었다.
해남 전라우수영은 해안에 인접한 해안성(海岸城)으로 축성되었다. 성은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성곽에는 4개소의 누문(樓門) 형식의 성문이 있고, 북문 밖 서쪽에 망해루가 있으며, 체성벽 위에 여장(女墻)이 있다. 성내의 도로는 4대문을 기준으로 "십(十)"자 형태를 이루면서 주요 시설과의 접근로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성내의 도로망은 현재 우수영 마을의 도로망과 대체로 일치한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따르면, 전라우수영은 둘레 3,848척, 높이 12척, 성첩(城堞) 680개, 옹성문 4개소, 수구문 1개소로 이루어진 석축성이다. 성내의 주요 시설을 살펴보면, 관사로 내아(內衙), 제승당 등 25개소의 각종 당청(當廳)과 주요 시설, 선청과 집회소(集會所)로 이용된 12개소의 누정이 있었다. 이 중 선창은 성의 남문 밖에 석축(石築)으로 만들었다. 현재 어사 동헌(御使東軒), 객사(客舍), 영창(營倉), 작청(作廳), 충무공 비각(忠武公碑閣), 제언(堤堰), 정곶사(鼎串寺), 태평정(太平亭), 망해루(望海樓) 등이 남아 있다. 군기고(軍器庫), 남장대(南將臺), 사대문(四大門)은 없어졌다. 1947년에 통제사 충무공 명량대첩비를 경복궁에서 문내면 학동리 1186-7번지로 이전 설치하였다.
전라우수영의 체성(体城)은 뒤채움 방식으로 쌓았다. 지표에서부터 석재→사질점토→석재의 순으로 번갈아 쌓아 판축(板築)과 유사한 수법으로 성을 조성하였다. 뒤채움에 사용한 석재는 1550㎝ 내외이며, 열을 지어 쌓은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다. 체성의 지대석은 길이 약 110㎝ 이상, 높이 25㎝ 내외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지대석 남측 아래쪽의 면석은 길이 약 70㎝ 이상, 높이 50㎝ 내외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또한 길이 약 30110㎝, 높이 25~60㎝ 내외의 거칠게 다듬은 석재를 외벽의 면석으로 사용하였다. 면석과 지대석은 경사진 지형을 따라 계단식으로 조성하였으며, 1열은 풍화 암반 위에 바로 올려 조성하였다. 지대석의 석렬은 북서-남동 방향으로 확인되는데 이는 추정되는 외황(外隍)과 동일한 방향이다. 지대석과 외황과의 거리는 약 300㎝ 내외이다.
체성에서 직각 방향으로 돌출된 곳에 치성(雉城)을 조성하였다. 체성과 치성이 이어진 부분이 남은 성벽 중 가장 높은 부분이다. 성벽의 잔존 최대 높이는 약 3.3m이다. 가장 높은 성벽의 상부 뒤채움 높이를 보면 체성의 잔존 최대 높이는 약 4m 내외가 된다. 치성(雉城)의 경우 대부분 길이 약 2540㎝ 크기의 다듬지 않은 잡석을 사용하여 쌓았으나, 치성의 전면부는 길이 약 5060㎝, 높이 15㎝ 내외의 거칠게 다듬은 판석(板石)을 사용하였다.
추정 외황(外隍)은 자연층인 풍화 암반을 굴착하여 조성하였다. 추정 외황의 방향은 체성 지대석의 방향과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