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경도감은 고려 때 한역 정장(正藏)과 교장(敎藏)을 간행하기 위하여 설치한 대장도감(大藏都監)과 교장도감(敎藏都監)의 취지와 규모를 본떴으며, 그중에서도 의천(義天)이 교장을 수집하여 판각한 사적을 본받은 바가 많다. 중앙의 간경도감을 본사(本司)로 하고 지방의 여러 곳에 분사(分司)를 두었는데, 현재까지 밝혀진 지방의 간경도감 분사로는 개성부 · 안동부 · 상주부 · 진주부 · 전주부 · 남원부 등이 있다.
직제는 처음에 도제조(都提調) · 제조 · 사(使) · 부사 · 판관으로 구성되었으나, 그 이듬해인 1462년에 간행한 『능엄경언해』에서부터는 제조 다음에 부제조가 더 표시되고 있다. 이는 직제를 다시 고쳤거나 또는 임용을 더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각 관직에는 한 사람만 임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사람이 임용되었다.
보직된 인원은 그 수가 일정하지 않았으나 대체로 20여 명을 넘었다. 간경에 종사한 역부(役夫)는 170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한때 설치되었던 기관으로는 상당히 큰 규모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당시 간역(刊役)에 30일 이상 종사한 이들에게는 도첩을 주어 승려가 됨을 허락하였는데, 그 수에 정원이 없어 인원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따라서 그에 소요된 경비 또한 상당했던, 대규모의 사업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1461년(세조 7) 6월에 왕명으로 설치하여, 1471년(성종 2) 12월에 폐지하기까지 11년간 존속하였다. 세조는 대군 때부터 불교를 좋아하여 부왕인 세종의 불서 편찬 및 간인(刊印)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찬탈을 속죄하고 불교에 심취하였다.
1457년(세조 3) 왕세자가 병으로 죽자 왕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친히 불경을 사성(寫成)하였다. 또한 대장경 한 질을 비롯한 많은 불경을 경판으로 찍었으며, 『법화경』 등 여러 종류의 불경을 활자로 인출하기도 하였다.
1458년에는 신미(信眉) · 수미(守眉) · 학열(學悅) 등을 시켜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인출하여 각 도의 명산대찰에 분장(分藏)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세조의 숭불 정책 구현을 위한 첫 사업이었다.
또한, 1459년 유신(儒臣)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국역 증보판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 이와 같은 간경 사업의 경험을 살려, 불경 간행을 국가 사업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왕권으로 간경도감을 신설하고 제도화하였다.
간경도감에서 불경의 국역 및 간행이 세조의 강력한 왕권에 의하여 한시적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그의 숭불 정책과 이념이 당시의 지배층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다만 왕실과 일부 계층 그리고 서민층에 의해 받아들여지다가 성종의 등극 이후 폐지되었다.
주요 사업은 명승과 거유를 초빙하여 불경을 국역하고 교감하여 간행하는 일을 위주로 하였지만, 그밖에도 불서를 구입 또는 수집하고 왕실에서 실시하는 불사와 법회를 관장하였으며, 때로는 고승을 접대하는 일까지 맡아보았다. 간경도감의 주된 사업인 간경의 내용은 2종으로 대별된다.
하나는 한자본 불경의 간행 및 반포이다. 고려의 의천이 송나라 · 요나라 · 일본 및 국내에서 교장을 수집하여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엮고 판각하였으나, 그때 간행된 고승들의 장소(章疏)인 교장이 별로 전래되지 않아 주로 그 교장의 판각에 치중하였다. 이는 간경도감 개판본들이 고려의 교장을 번각(飜刻)하거나 복각(覆刻)한 것과 새로 판서본(板書本)을 써서 새겨낸 것이 섞여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다른 또 하나는 국역본 불경의 간행 및 반포이다. 숭유억불책을 써 왔던 조선시대에 침체되어 가는 불교 신앙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가장 기본이 되는 주요 경전을 알기 쉽게 한글로 번역 · 간행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 국역본은 당대의 명필가를 총동원하여 모두 일정한 체재와 형식으로 독특하게 판서본을 써서 정각한 판본인 것이 그 특징이다.
특히, 1462년(세조 8) 『능엄경언해』 발간을 시작으로 1463년에 『법화경언해』, 1464년에 『금강경』, 『심경』, 『미타경』, 『영가집』, 1465년에 『원각경』, 1467년에 『수심결』, 『법어』, 『몽산법어약록』 등의 경전을 국역 · 간행하였다.
이때 간경도감에서 간인(刊印)된 불경은 거의 대부분이 세조가 직접 중심이 되어 구결하고 번역한 것이며, 당시의 고승 신미 · 수미 · 홍준(弘濬) 등과 대신 윤사로(尹師路) · 황수신(黃守身) · 김수온(金守溫) · 한계희(韓繼禧) 등 간경도감 도제조 및 제조들의 도움과 힘이 컸다. 간행된 불서 가운데 현재까지 밝혀진 것을 한자본 불경과 국역본 불경으로 나누어 열거하면 다음 〈표 1〉 · 〈표 2〉와 같다.
연번 | 서명 | 권수 | 저자 | 간행 연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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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금강반야경소개현초(金剛般若經疏開玄鈔) | 6 | 공철(公哲) | 1461 | 본사 |
2 | 대반열반경의기원지(大般涅般經義記圓旨) | 14 | 공공(鞏空) | 1461 | 본사 |
3 | 대승아비달마집집논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 | 16 | 현범(玄範) | 1461∼1462 | 낙질본 |
4 |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讚述) | 2 | 혜정(慧淨) | (?) | 낙질본 |
5 | 정명경집해관중소(淨名經集解關中疏) | 4 | 도액(道液) | 1461∼1462 | 낙질본 |
6 | 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 | 1 | 사효(思孝) | 1461∼1462 | 낙질본 |
7 | 대반열경경소(大般涅槃經疏) | 20 | 법보(法寶) | 1461∼1462 | 낙질본 |
8 | 개사분율종기의경초(開四分律宗記義鏡鈔) | 20 | 행만(行滿) | (?) | 낙질본 |
9 | 수능엄경의소주경(首楞嚴經義疏注經) | 20 | 자선(子璿) | (?) | 낙질본 |
10 | 화엄경론(華嚴經論) | 100 | 영변(靈辯) | (?) | 낙질본 |
11 | 원각예참약본(圓覺禮懺略本) | 4 | 종밀(宗密) | 1461∼1462 | 낙질본 |
12 | 사분율상집기(四分律詳集記) | 14 | 징연(澄淵) | 1461 | 상주 · 안동분사 |
13 | 능엄경계환해산보기(楞嚴經戒環解刪補記) | 1 | (?) | 1461 | 본사 |
14 | 대승기신론필삭기(大乘起信論筆削記) | 6 | 자선(子璿) | 1462 | 전주분사 |
15 | 대방광불화엄경합론(大方廣佛華嚴經合論) | 120 | 이통현(李通玄) | 1462 | 전주분사 |
16 |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의석연밀초(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義釋演蜜鈔) | 10 | 각원(覺苑) | 1462 | 본사 |
17 | 유가론소(瑜伽論疏) | 40 | 지주(智周) | 1462 | 안동분사 |
18 | 능엄경의소(楞嚴經義解) | 30 | 함휘(咸輝) | 1462 | 본사 |
19 | 오삼련약신학비용(五杉練若新學備用) | 3 | 응지(應之) | 1462 | 본사 |
20 | 진실주집(眞實珠集) | 3 | 묘행(妙行) | 1462 | 본사 |
21 |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 2 | 실차난타(實叉難陀) | 1462 | 본사 |
22 | 구사론송소초(俱舍論頌疏鈔) | 8 | 상진(常眞) | 1463 | 진주 · 상주분사 |
23 | 노산집(盧山集) | 10 | 혜원(慧遠) | 1463 | 본사 |
24 | 보리달마사행론(菩提達磨四行論) | 1 | 달마(達磨) | 1464 | 남원분사 |
25 | 선문삼가염송집(禪門三家拈頌集) | 6 | 구암(龜庵) | 1464 | 본사 |
26 |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 3 | 종밀주해(宗密注解) | 1464 | 본사 |
27 | 자애화상광록(慈愛和尙廣錄) | 2 | (?) | 1466 | 본사 |
28 | 무주묘법연화경(無注妙法蓮華經) | 7 | 구마라습(鳩摩羅什) | 1467 | 본사 |
29 | 원종문류집해(圓宗文類集解) | 22 | 의천(義天) | 1468 | 개성분사 |
30 | 석문홍각범림한록(石門洪覺範林閒錄) | 2 | 각범(覺範) | 1468 | 상주분사 |
31 | 금강명경문구소록(金光明經文句疏) | 3 | 지의(智顗) | (?) | 낙질본 |
〈표 1〉 한자본 불경 |
연번 | 서명 | 권수 | 역자 및 주해자 | 간행연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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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대불정수능엄경언해(大佛頂首楞嚴經諺解) | 10 | 반자밀제역(般刺密帝譯), 계환해(戒環解) | 1462 | 본사 |
2 | 묘법연화경언해(妙法蓮華經諺解) | 7 | 구마라습역(鳩摩羅什譯), 계환해(戒環解), 일여집주(一如集注) | 1463 | 본사 |
3 | 선종영가집언해(禪宗永嘉集諺解) | 2 | 현각찬(玄覺撰), 연정정원수정(衍靖淨源修正), 세조구결(世祖口訣) | 1464 | 본사 |
4 |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金剛般若波羅密經諺解) | 2 | 구마라습역(鳩摩羅什譯), 혜능주해(慧能註解) | 1464 | 본사 |
5 |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般若波羅密多心經諺解) | 1 | 현장역(玄奬譯), 중희술(仲希述) | 1464 | 본사 |
6 | 불설아미타경언해(佛說阿彌陀經諺解) | 1 | 구마라습역(鳩摩羅什譯), 지의주석(智顗註釋), 세조역해(世祖譯解) | 1464 | 본사 |
7 | 대방광원각수다라료료의경언해(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諺解) | 10 | 종밀소초(宗密所抄), 세조구결(世祖口訣) | 1465 | 본사 |
8 |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 | 1 | 지눌찬(知訥撰), 비현각결(丕顯閣訣), 신미역(信眉譯) | 1467 | 본사 |
9 | 법어언해(法語諺解) | 1 | 신미역(信眉譯) | 1467 | 본사 |
10 | 몽산화상법어약록(蒙山和尙法語略錄) | 1 | 신미역(信眉譯) | 1467 | 본사 |
〈표 2〉 국역본 불경 |
오늘날의 시각에서 이 사업이 지니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귀중한 국어학 자료를 많이 생산하여 국어학사의 체계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국역본 불전은 훈민정음 창제 직후의 일이므로 오늘날 학계의 연구에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은 물론, 한자본 불서를 국역한 세조의 문화사적 의의도 그 가치를 크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당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주요 불전의 국역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되어 사람들이 불교의 근본 이념과 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얻어 보기 어려운 귀중한 장소 자료(章疏資料)를 많이 생산 · 전유시킴으로써 불학 연구에 크게 기여한 점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