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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고대사유적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 통구(通溝)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19대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기록한 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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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광개토왕릉비의 비각
분야
고대사
유형
유적
성격
능비
시대
고대-삼국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 통구(通溝)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19대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기록한 능비.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414년(장수왕 3)에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비석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사면석비(四面石碑)로서 높이가 약 6.39m인데,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동쪽 국강상(國岡上)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워졌다.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세 글자를 본떠서 일명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능비는 지금의 압록강 중류의 만포진(滿浦鎭)에서 마주보이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통화전구(通化專區) 집안현(輯安縣)의 현청 소재지인 통구성(通溝城)으로부터 동북쪽 약 4.5㎞ 지점인 태왕촌 대비가(太王村大碑街)에 서 있으며,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대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태왕릉(太王陵)이 있다.
능비의 동북쪽 약 1.5㎞ 지점에 있는 장군총을 대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태왕전(太王塼)이 발견된 뒤 태왕릉설이 보다 더 유력하여졌다.
능비는 동쪽으로 45°정도 치우친 동남향에서 서북향 방향으로 서 있으며, 1928년부터 1976년까지는 집안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의 발기로 세워진 2층 비각 속에 있었으나, 현재는 1982년에 중국당국에 의하여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비 주위는 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철책으로 된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능비는 대석(臺石)과 비신(碑身)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대석과 비신의 일부는 땅속에 묻혀 있다. 대석은 약 20㎝ 두께의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다듬은 것인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장방형으로 3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깨어졌다.
그리고 비신은 방주형(方柱形)의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에 약간의 인공을 가한 것으로, 너비 1.35∼2.0m, 높이 6.39m(朴時亨은 6.34m로 관측하였으며, 중국측의 안내표지판에는 6.12m로 되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王健群의 최근 관측에 의하였다)에 달하는 한국 최대의 크기이며, 개석(蓋石)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로 되어 있다.
비신의 사면에 모두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비문이 조각된 면적은 각 면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5.5m 높이에서부터 조각하기 시작하였으며,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각 면의 위와 아래에는 횡선을 긋고, 매행은 약 13㎝ 간격으로 가는 종선을 그었다.
여기에 한예(漢隷)의 팔분서(八分書)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4∼15㎝ 정도 크기의 문자가 음각(陰刻)되어 있으며, 현재에는 5㎜ 깊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비신의 4면에는 모두 44행 1,775자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종래에는 제1면 제6행만 39자로 생각하고 나머지 43행은 모두 41자로 계산하여 1,802자로 생각하였으나, 3면의 상부가 경사진 까닭에 2면과 4면의 일부에는 원래 문자가 없었다는 왕건군의 최근 연구가 타당성이 있으므로 이에 따랐다).
능비는 광개토왕이 죽은 뒤 만 2년째 되는 414년, 즉 장수왕 3년 9월에 대왕의 능과 함께 건립되었다(종래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년에 따라 414년을 장수왕 2년으로 보았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유월칭원법을 사용하였던 까닭에 광개토왕이 죽은 412년은 곧 장수왕 원년이 된다. 따라서 비가 건립된 414년은 장수왕 3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능비는 고구려의 멸망과 더불어 잊혀졌다가 19세기 말에 재발견되었다. 능비의 존재가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문헌들이지만, 능비가 고구려의 유적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지봉유설(芝峰類說)』 등에는 능비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시조비로 오인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잊혀져왔던 능비가 재발견된 것은 비의 발견경위에 대한 보고가 엇갈려 있어 정설이 없으나, 대체로 청나라가 만주 지역의 봉금(封禁)을 풀고 이 지역에 회인현(懷仁縣)을 설치한 뒤인 1880년을 전후하여 개간에 종사하던 청나라 농부에 의하여 발견된 비를 당시 지사였던 장월(章越)이 관월산(關月山)을 시켜 비를 조사하게 한 뒤 비의 부분적인 탁본이 북경(北京)의 금석학계에 소개됨으로써 비의 실체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비가 재발견된 초기에는 비면의 상태불량과 탁본여건의 미비로 단편적인 탁본이나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 유행하였을 뿐 정교한 원탁은 1887년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882년경에는 마침 만주를 여행중이던 일본군 참모본부의 밀정인 중위 사카와[酒匈景信](뒤에 대위로 승진)에 의하여 비문의 일부 문자가 변조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기초로 한 쌍구가묵본이 일본에 반입되자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하여 비문의 초기 연구가 비밀리에 진행된 끝에 1889년에 그 내용이 세상에 공표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인 1885년경부터는 중국학계에서도 비에 대한 조사와 금석학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뒤 1899년경부터는 일본·청나라 양국에서 비문변조를 합리화하거나 고가매매를 하기 위해 보다 선명한 탁본을 얻고자 비면에 석회칠[石灰付塗]을 감행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비면의 마멸과 일부 문자가 오독되기에 이르렀다.
현재는 ‘쌍구본’이나 석회부도 후의 탁본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뿐, 1890년대 이전의 원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능비연구에 난점을 안겨주고 있다.
한편, 능비의 탁본과 함께 러일전쟁 이후에는 주로 일본인학자에 의해 능비 주변의 유적조사가 진행되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통구(通溝)』·『조선고문화종감(朝鮮古文化綜鑑)』 등으로 정리, 출간되었다.
그 뒤 공백기를 거쳐 1957년부터 임지덕(林至德) 등 일부 중국학자에 의하여 능비 주변의 유적이 재조사되기 시작하였다. 1963년에는 박시형을 비롯한 북한학자와 중국학자의 공동조사가 진행되기도 하였으며, 1981년부터 왕건군을 중심으로 한 중국학계의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왕건군의 『호태왕비연구(好太王碑硏究)』가 공표된 1985년 이후에는 일본학자의 현지조사가 허가되어 최근에는 『호태왕비탐방기(好太王碑探訪記)』 등이 일본에서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서문격으로 제1면 1행에서부터 1면 6행에 걸쳐 추모왕(鄒牟王)의 건국신화를 비롯하여 대주류왕(大朱留王)으로부터 광개토왕에 이르는 대왕의 세계(世系)와 약력 및 비의 건립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제2부는 비문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으로 제1면 7행에서부터 3면 8행에 걸쳐서 대왕의 정복활동과 토경순수(土境巡狩) 기사가 연대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제3부는 제3면 8행에서부터 4면 9행에 걸쳐서 능을 지키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의 명단과 수묘지침 및 수묘인 관리규정이 기술되어 있다.
비문의 기사내용 중 제1부의 고구려 건국신화와 제3부의 수묘인 기사도 고구려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나, 종래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은 제2부의 정복기사이다. 비문의 마멸과 『삼국사기(三國史記)』 및 『자치통감(資治通鑑)』 등 문헌 사료와의 차이에 따라 학계의 견해가 통일되어 있지 않으나, 정복기사는 형식상 8개 기년기사(紀年記事)와 2개의 종합기사로 구분할 수 있으며, 비문의 내용과 연구상의 쟁점을 요약하여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영락 5년(395) 기사: “영락 5년에 대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부산(富山)을 지나 염수(鹽水)가에 이르러 비려(碑麗) 3부락의 600∼700영(營)을 공파하고 수많은 가축을 노획하였으며, 양평도(襄平道)로 개선하는 길에 북풍(北豊) 등 요하(遼河)부근의 토경(土境)을 순수(巡狩)하였다.”고 한다.
전반부의 기사는 비려의 정체와 염수의 위치에 대한 견해가 엇갈려 있어 정복대상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나, 대체로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하던 거란(契丹)을 정복한 기사로 추정된다.
후반부의 순수기사는 유동적인 국경지대의 통치권을 재확인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한 성격의 기사로, 이때에 이르러 요하 일대가 고구려의 영역으로 완전히 편제되었음을 뜻한다.
② 신묘년 기사: 영락 5년 기사 다음에는 다른 기년기사와는 형식을 달리하는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공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라고 하는 이른바 ‘신묘년기사’가 있어 능비연구의 최대 쟁점이 되어왔다.
현재 신묘년기사의 문자판독이나 기사성격에 대한 논의는 결론이 나 있지 않은 상태이나, 이는 신묘년(391)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대체로 영락 6년의 백제정벌 및 8년의 신라정토의 명분을 나타내는 전제문인 동시에 영락 6년에서 17년에 걸쳐 진행된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집약 기술한 집약문일 것으로 추정되며, ‘해(海)’자를 비롯한 일부 문자가 변조 내지 오독(誤讀)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③ 영락 6년: “영락 6년에는 대왕이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관미성(關彌城)·아단성(阿旦成) 등 58성과 7백 촌을 공파하고,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백제의 도성에까지 육박하였다. 이에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이 영원히 신하가 되겠다는 맹세를 하고 항복하므로, 대왕이 은택을 베풀고 백제왕이 바친 생구(生口)와 인질 및 세포(細布)를 받아 개선하였다.”고 한다.
이 때의 작전지역은 대체로 황해도 남부에서 한강유역 및 서해안 일대에 걸친 지역으로 보이며 전쟁의 결과 백제와 예속적인 지배관계인 조공관계(朝貢關係)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④ 영락 8년: “영락 8년에는 소규모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지역의 토곡[帛愼土谷]을 관찰하고, 이어서 인접한 국가의 가태라곡(加太羅谷) 등에서 3백여 인의 민호(民戶)를 획득하는 한편, 이 후부터는 조공관계를 맺기로 하였다.”고 한다. 문자의 마멸과 구체적인 국명의 생략으로 종래부터 8년 기사의 정복대상을 연해주 일대의 숙신(肅愼)이나, 강원도 일대의 예(濊)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어왔다.
그러나 이는 8년 기사 전체를 동일한 성격의 기사로 보았던 때문으로, 전반부와 후반부의 기사가 동일한 지역의 작전기사가 아니라는 점과 동예는 태조왕 때, 숙신은 서천왕 때에 고구려가 이미 정복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반부의 기사는 강원도 일대의 고구려 토경을 관찰한 기사이며, 후반부는 산악을 경계로 하여 이에 인접한 국가, 즉 신라에 대한 복속기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이로부터 신라는 고구려의 조공지배권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⑤ 영락 9년: “영락 9년에는 백제가 전일의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자,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남순(南巡)하였는데, 이때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전일에 이미 대왕의 덕화에 귀의하여 신하가 되었음을 전제로 국경에 침구한 왜구를 격퇴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⑥ 영락 10년: 이를 명분으로 “영락 10년에 왕은 5만의 보기(步騎)를 파견하여 낙동강 유역에서 왜를 격퇴하고, 임나가라(任那加羅)를 복속시키는 한편 신라를 구원하였다. 그 결과 종래와는 달리 신라국왕이 직접 고구려에 조공하였다.”고 한다.
영락 10년의 경우 결락문자가 많아 종래부터 이론이 많은 부분이나, 명확한 것은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조공지배가 강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기사이며, 여기에 등장하는 왜는 신라나 가라와는 달리 공파나 복속의 대상이 아니라 ‘퇴(退)·추(追)·멸(滅)’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본다면, 당시의 왜는 고정된 거점이 있었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또한, 비문의 임나가라는 대가야(大加倻)의 원명으로 추정되며, 작전과정에서도 가라(加羅)·안라(安羅) 등이 주이며, 왜는 종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비문의 기사는 일본에서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근거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반증하는 자료라고 할 것이다.
⑦ 영락 14년: 그 뒤 후연(後燕)과의 전쟁으로 고구려가 남방전선에 소홀해진 틈을 타 백제가 “영락 14년 왜병을 앞세워 고구려의 대방계(帶方界)에 침입하니, 대왕이 친히 수군(水軍)과 친위병[王幢]을 동원하여 이를 격파하고 무수한 왜구를 참살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백제의 도전에 대한 본격적인 응징은 후연과의 전투가 고구려의 승리로 일단락된 뒤인 영락 17년에 이루어진 것 같다.
⑧ 영락 17년: “영락 17년에 대왕은 5만의 보기를 파견하여 백제의 후방영역 깊숙이 쳐들어가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개선하는 길에 사구성(沙溝城) 등 6개의 성을 공파, 획득하였다.”고 한다. 영락 17년의 경우 후연의 숙군성(宿軍城) 공략기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숙군성 공략은 영락 11년의 일로 연대가 맞지 않으며, 능비가 건립된 장수왕대에는 이미 후연을 이은 북연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이 때의 고구려에 있어서는 이미 요하선의 확보가 새로운 영토확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던 까닭에, 능비에서는 숙군성 공략 기사뿐만 아니라 후연정벌기사 전체가 생략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⑨ 영락 20년: 후연과의 공방전과 남진정복이 일단락 된 뒤인 “영락 20년에 대왕은 조공을 중단한 동부여(東夫餘)를 친정하였는데, 동부여가 저항없이 왕의 덕화(德化)에 귀의하자 대왕은 그를 가상히 여겨 은택을 베풀었다.”고 한다.
여기에서의 동부여는 국초의 동부여라기보다는 모용씨에 쫓긴 북부여의 잔류세력이 이동하여 성립된 것으로 보이며, 그 지역은 두만강 유역에서 연해주 일대로 여겨진다. 작전의 성격에 있어서도 군사작전이라기보다는 국내 영토의 순수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⑩ 정복기사의 마지막에는 “대왕이 공파한 성이 64, 촌이 1400이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외정의 총수라기보다는 실질적인 영토로 편입한 것만을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본 것처럼 정복기사는 단순히 외방에 대한 정토기사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토와 복속 및 토경순수라는 당대 고구려 정치사의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유기적 관련을 갖고 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능비의 정복기사는 정토의 명분에서 결과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인의 자존적 국가의식과 대외의식을 배경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는 전제왕권의 확립을 통한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에 있어 주 정복대상은 백제와 신라 및 가라·동부여였으며, 왜와 비려는 단지 토멸의 대상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 및 가라·동부여를 왜·비려와는 성격이 다른 동일세력권 내의 민족집단으로 인식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왕의 정복전은 한민족사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최초의 통일의지의 표현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능비가 재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근 1백여 년 간 한국·중국·일본 3국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어 지금까지 약 2백여 편의 연구업적이 발표되었다.
초기 중국인 학자의 금석학적 연구를 제외하면, 주로 신묘년기사를 비롯한 고대 한일관계가 능비연구의 주류를 이루어왔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능비의 연구는 곧 신묘년 기사의 연구와 궤를 같이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샤반느(Chavannes,E.)를 비롯한 서구학계의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나, 능비연구는 거의 한국·중국·일본 3국 학계에 의해 주도되어 왔으며, 최근에 이르러 능비가 위치한 중국학계의 비에 대한 정밀한 조사와 공개를 계기로 능비에 대한 3국 학계의 관심은 더욱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능비연구의 관심과 시기 및 연구관점을 고려하여 능비연구사를 중국구설·일본구설·한국구설·비문변조설·일본신설·한국신설·중국신설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중국구설(中國舊說): 능비를 재발견한 중국학계의 비문연구는 오히려 일본보다 조금 늦게 시작되어 1895년에야 왕지수(王志修)의 「고구려영락태왕고비가(高句麗永樂太王古碑歌)」를 비롯한 금석학적 연구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왕지수의 연구는 비의 건립연대를 고증한 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정문작(鄭文焯)·영희(榮禧)·나진옥(羅振玉)·양수경(楊守敬)·유절(劉節) 등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중국학계의 연구도 대부분 비의 건립연대 고증, 재발견 경위에 대한 보고, 비문의 해독, 비문서체의 가치 등에 대한 금석학적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 이상의 역사학적 연구로서의 진전은 보지 못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금석학적 연구도 거의 진행되지 못하여 중국학계의 능비연구는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② 일본구설(日本舊說): 능비의 연구사가 신묘년기사의 연구와 궤를 같이하는 주된 이유는 능비의 초기 연구가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한 일본 관학에 의해 주도된 까닭으로, 초기의 탁본과정에서 변조 또는 오독된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일본학계가 능비의 신묘년기사를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의 근거로 제시하였던 때문이다.
사카와에 의해 반입된 쌍구본을 처음으로 해독한 일본 참모본부의 촉탁 요코이[橫井忠直] 이래 ‘왜가 한반도에 침략하여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당시 동아시아의 역사적 상황과는 모순된 견해가 일본학계의 통설로 인정되어 왔으며, 전후에도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이러한 견해가 수정되지 않은 채 계속 주장되었다. 이를 일본구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일본구설의 모순은 여러 각도에서 검토되어 일본학계 자체에서도 그대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 연구사적 의미가 남아 있다고 한다면 단지 일본 근대사학의 체질적 한계를 밝혀주는 지표가 될 뿐이라는 점이다.
③ 한국구설(韓國舊說): 한국에서의 연구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그 석문(釋文)이 수록되고, 『황성신문(皇城新聞)』 등에 비문의 내용에 대한 소개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00년대 초의 한말에 이미 비에 대한 관심이 있었으며, 신채호(申采浩) 등의 비문연구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에서의 능비연구는 정인보(鄭寅普)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에 의한 일본구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그 연구사적 출발을 삼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정인보는 신묘년기사의 ‘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에 대한 일본구설의 해석이 사실에 있어서나 한문의 구조상에 있어 모순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도해파(渡海破)’의 주체를 고구려로 보는 파격적인 신설을 제시하였다.
이후 정인보의 학설에 토대를 두고 수정, 보완된 박시형·김석형(金錫亨)의 새로운 해석이 3한 3국의 ‘일본열도분국설(日本列島分國說)’로까지 발전하게 되자 능비연구는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되었다. 이를 한국구설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1970년대 이후의 문정창(文定昌)·정두희(鄭杜熙)의 견해도 이러한 견해를 계승한 연구라 할 것이다.
④ 비문변조설(碑文變造說): 한국구설의 문제제기에 의한 당연한 귀결로 이진희(李進熙)의 광범위한 비문변조설이 발표되었다. 이는 비문연구가 석독과 해석을 통한 단순한 능비연구단계에서 벗어나 일본인의 한국사연구 체질에까지 연결되어, 그들이 설정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허구를 비롯한 고대 한일관계사의 근본적인 재검토라는 단계로의 전환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이진희가 제시한 비문의 변조문자가 모두 인정되는 것은 아니나, ‘신묘년기사’를 비롯한 몇 군데의 문자가 이상이 있음은 일본학계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비문변조설은 참모본부의 음모와 일본 근대사학의 연구체질 비판에 의하여 비문의 재검토라는 연구사적 전환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비문내용의 구체적 연구로 연결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⑤ 일본신설(日本新說): 비문변조설에 대한 반작용으로 1970년대 이후 일본학계에서는 하마다[浜田耕策]·다케다[武田幸男]·사에키[佐伯有淸] 등에 의하여 비문 전체의 구조적 이해라고 하는 새로운 연구방법이 제시되었다. 이를 일본신설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신설의 경우 새로운 방법론상의 진전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동아시아 교섭사에 있어 왜를 주도적으로 보려는 기본적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일본구설을 합리화하는 한편, 극단적으로 비문사료의 허구성을 강조하여 자체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⑥ 한국신설(韓國新說): 한국학계에서도 이진희의 비문변조설이 소개된 1970년대 이후 이에 자극되어 새로운 판독과 해석은 물론 광개토왕의 영역지배에 이르기까지 주목할만한 연구업적이 나오고 있어, 능비연구가 비로소 한국인 연구자 손에서 본궤도에 오른 느낌이다. 특히 천관우(千寬宇)·김영만(金永萬)·이형구(李亨求)·서영수(徐榮洙) 등의 견해는 한국신설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한국신설의 특징은 이진희의 비문변조설을 토대로 전후 문맥과 서체의 결구(結句)를 중심으로 변조된 문장을 복원하여 합리적 해석을 시도하려 한 점이다.
한국신설의 경우에도 문자 복원의 방법론이나 관점의 차이에 의해 논의의 일치점을 찾지 못하였으나, 이러한 연구에 의하여 신묘년기사 중의 일부 문자가 변조, 오독되었으리라는 점과 신묘년기사가 왜를 주체로 하는 기사가 아니라 고구려를 주체로 하는 기사임이 분명하여졌다.
이러한 연구기반을 통하여 1980년대 이후에는 박성봉(朴性鳳)·서영수 등에 의하여 고구려사의 내재적 발전과정을 해명하고자 하는 능비 본연의 연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⑦ 중국신설(中國新說): 신묘년기사를 중심으로 한 한일학계의 근 1백 년에 걸친 비문에 관한 논쟁도 능비의 현지조사가 수반되지 못한 까닭에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81년부터 능비가 현존하는 중국학계에서 비에 대한 정밀한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어 1984년에는 왕건군의 『호태왕비연구』가 중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출간되고, 중국·일본 학자의 공동참여에 의한 학술회의가 동경과 집안에서 잇따라 개최되기에 이르러 능비연구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지조사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한 왕건군의 연구를 중국신설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왕건군은 초기 중국학계의 연구문헌과 현지조사를 토대로 비문이 오독된 것은 초기의 쌍구가묵본의 영향에 기인한 것이며, 석회도부를 통하여 비문이 변조된 것도 탁공의 역사지식의 무지와 고가매매를 위한 탓으로 돌려, 이진희가 제시한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비문변조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왕건군의 연구는 탁공의 직접 기록에 의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진희가 제시한 초기 탁본의 편년적 고증이 결여되어 있는 까닭에, 탁본이 매매대상이 되기 이전의 변조사실에 대하여는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쟁점이 되어왔던 신묘년기사의 경우 일본신설을 수용하여 문자 자체는 이상이 없으나, 당시의 왜는 북구주일대(北九州一帶)의 해적집단으로 보아 일본구설의 임나일본부설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파악하여, 신묘년기사를 다분히 과장적인 기사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일본신설과는 달리 신묘년기사를 단지 영락 6년 기사의 전치문으로 본 까닭에, 일본신설이 극복하고자 하였던 종래의 모순점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이는 중국학계가 능비에 관한 연구 축적의 기반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현지조사의 이점을 살려 비문의 총 문자수를 1,775자로 파악한 점과 종래 의문시해 오던 일부 결락문자를 판독, 보강한 것은 일단 새로운 연구성과로 평가된다.
이상의 연구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능비의 연구는 문헌사료의 부족이라는 한국고대사가 갖는 일반적 한계와 고구려사연구의 현실적 한계 및 3국 학계의 처지의 차이에 의하여 방대한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논의는 핵심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신묘년기사를 비롯한 광개토왕릉비의 연구는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고대사 자체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학계의 한국사 왜곡에 대한 체질비판에까지 연결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비문의 올바른 판독과 해석은 곧 왜곡된 한국고대사의 재고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능비연구는 왜의 등장에 대한 논쟁에서 벗어나,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고대사의 발전과정의 해명이라는 능비연구 본류에 도달하기 위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가 요망된다고 할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진서(晉書)

  • 양서(梁書)

  • 자치통감(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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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高句麗永樂好太王古碑歌攷』(王志修,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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