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함경남도 안변 지역으로 추측된다. 일찍이 불이현(不而縣, 또는 不耐縣)이 있었던 곳인데,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3세기 중엽까지 동예의 영토였다.
이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정벌로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이곳에 비열홀군(比列忽郡) 또는 천성군(淺城郡)을 두고 지배하였다. 「광개토왕릉비」에는 광개토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을 정할 때 비리성 출신의 2가(家)를 국연(國烟)으로 편재하였다.
한편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해 이곳을 장악하면서 주(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00년(기림이사금 3) 2월 왕이 비열홀(比列忽)에 순행(巡幸)해 나이 많은 자와 가난한 자를 친히 위문하고 곡식을 내려주었고, 481년(소지마립간 3) 2월 왕이 비열성(比列城)에 행행(行幸)해 군사를 위로하고 정포(征袍 : 군복)을 하사했다고 한다.
진흥왕이 동북방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안변 지역은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556년(진흥왕 17) 7월 이곳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두고 사찬(沙飡) 성종(成宗)으로 군주(軍主)로 삼아 지키게 하였다.
561년에 건립된 「창녕진흥왕순수비(昌寧眞興王巡狩碑)」에 보이는 사방군주(四方軍主) 가운데 하나인 ‘비리성군주(碑利城軍主)’의 비리성은 바로 비열홀주를 가리키며, 이 때의 군주는 복등지(福登智) 사척간(沙尺干 : 사손의 이칭)이었다.
즉 이 시기 신라의 영역은 상주(上州)·하주(下州)·신주(新州)·실직주(悉直州)·비열홀주의 5개 광역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진흥왕대에는 안변 지역에 뒷날 신라 6정(停)의 하나인 우수정(牛首停)으로 발전한 비열홀정(比列忽停)이 설치되어 동북방의 군사적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6세기 중반 고구려의 압력으로 신라의 세력이 후퇴해 568년(진흥왕 29) 10월비열홀주는 폐지되었다.
637년(선덕여왕 6)에 고구려에게 빼앗겼다가 668년(문무왕 8)에 되찾아 백성을 옮기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면서 비열주를 설치하고 총관(摠管)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나당전쟁과정에 673년(문무왕 13)비열홀정을 폐지했다가 675년 9월안북하(安北河 : 지금의 함경남도 덕원 북면천)에 연하여 관성(關城)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 결국 비리성은 신라의 비열홀정으로서 비열홀주의 주치(州置)이며 군주의 주둔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