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년(충렬왕 26) 앞서 부임한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 고르기스[闊里吉思]는 권력을 가지고 뇌물수수와 작폐가 매우 심하였다. 당시 전판밀직사사(前判密直司事) 유비(柳庇)는 송서의 아버지 첨의중찬(僉議中贊) 송분에게 개인적 감정을 가지고 고르기스에게 모함을 하였다. 이로 인해 송서는 당시 장군이었는데 아버지와 형제인 우부승지(右副承旨) 송린(宋璘), 낭장(郎將) 송유(宋瑈), 조카 우부승지 송방영(宋邦英), 장군 신단(臣旦) 등과 함께 순마소(巡馬所)에 있는 감옥에 갇혀 신문을 받았으며 그 일가가 곤욕을 치렀다. 결국 원나라가 관리를 보내어 고려 국왕이 보는 앞에서 심문한 결과 무고(誣告)임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331년(충혜왕 원년) 충혜왕(忠惠王)이 즉위하여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임명하였다. 이후 충정왕(忠定王)이 폐위되고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자, 8월에 구신훈로(舊臣勳老)로서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판전리사(判典理事)로 임명되어 수상(首相)으로서 행정을 맡아보게 되었다. 이때는 기철(奇轍) 일가의 득세기(得勢期)로 이를 견제하기 위한 시종공신(侍從功臣) 조일신(趙日新) 계의 세력, 왕이 부임하기 전 섭정권단(攝政權斷) 정동성사(征東省事)로 대행권을 장악한 이제현(李齊賢) 계의 3파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1352년(공민왕 1) 3월에서 10월에 걸쳐 조일신이 기철 일가를 숙청하고 이제현을 견제하여 은퇴시키고, 9월에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실권을 장악하였다. 10월 1일에는 조일신이 자신의 반란을 획책하여 추종세력이었던 좌정승(左政丞) 정천기(鄭天起)·찬성사(贊成事) 최화상(崔和尙)·판삼사사(判三司事) 이권(李權)·판밀직(判密直) 나영(羅英) 등을 거꾸로 숙청하고, 도당에 죄를 뒤집어 씌우고 인사를 자신의 뜻대로 하여 송서를 우정승(右政丞)으로, 자기는 좌정승 판군부감찰사(判軍簿監察事)가 되었다. 공민왕이 조일신을 죽인 이후 이듬해 2월에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