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신앙은 물을 관장하는 신을 모시는 신앙이다. 수신은 물의 성격이나 규모에 따라 해신(海神), 강신(江神), 지소신(池沼神), 천정신(泉井神) 등으로 변별되기도 한다. 민속에 나타난 수신신앙은 집단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어민들이 숭앙하는 용왕신은 풍어의 신이면서, 주민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농촌에서는 농경과 관련하여 비를 관장하는 신으로 숭앙되었다. 대체로 어떤 물이거나 용이 수신으로 많이 나타나기에 수신신앙은 용신신앙과 상통한다. 한편, 수신신앙은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와 융화하여 호국용신 사상을 낳기도 하였다.
수신은 물의 성격이나 규모에 따라 해신(海神) · 강신(江神) · 지소신(池沼神) · 천정신(泉井神) 등으로 변별되기도 하고, 신의 형체도 용 · 뱀 · 거북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대체로 어떤 물이거나 용이 수신으로 많이 나타나기에 수신신앙은 용신신앙과 상통한다.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강한 수신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건국신화를 검토하면 수신이 국가의 조상신 또는 수호신으로 숭앙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시조 주몽(朱蒙)은 천신(天神)인 해모수(解慕漱)와 수신인 하백녀(河伯女) 사이에서 출생한다. 하백의 딸인 유화(柳花)는 고구려의 국모신(國母神)으로 숭앙되었으며, 고구려의 왕들은 항상 천제자(天帝子)와 하백외손(河伯外孫)의 후예임을 긍지로 삼았다.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에서는 수신이 천신과 한가지로 높게 숭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동부여조(東扶餘條)에는 해부루가 동해가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세웠는데, 아들이 없어서 곤연(鯤淵)이라는 연못가에서 금빛이 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를 얻어다가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이 아이가 곧 금와왕(金蛙王)이라는 기록이 있다. 금와왕은 사실상 동부여 국조의 성격을 가지는데, 그가 출현한 곳이 연못가로서 그 형체가 물과 친연성(親緣性)이 강한 개구리를 닮았다는 점에서 수신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수신의 후예를 왕으로 모셨다는 것은 동부여에서 수신을 국가의 조상신으로 숭앙했음을 말해주는 점이다.
신라의 국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왕비는 알영(閼英)인데, 그녀는 알영정(閼英井)이라는 못에서 계룡(鷄龍)이 출현하여 왼쪽 갈빗대 사이로 낳은 동녀(童女)이다. 알영은 용의 후예로 왕비가 되어 박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으로 신라인의 숭앙을 받았다. 이러한 점에서 신라에서도 수신이 국가의 조상신으로 숭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純貞公)의 부인 수로(水路)는 자용(姿容)이 매우 아름다웠다. 순정공이 강릉태수가 되어 부임해 가는 도중 바다에 임한 정자에서 점심을 먹는데 해룡이 수로부인을 납치해갔다. 순정공은 한 노인의 말을 듣고 「해가(海歌)」를 불러 부인을 찾았는데, 부인의 말은 바다 속에는 칠보로 된 궁전이 있었고 음식이 맛있고 향기로웠으며 또한 깨끗하다고 했다. 이 시기에는 이미 해신으로서 용신이 숭앙되었고 바다 가운데 용궁이라는 별세계가 있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헌강왕 때에 동해 용자(東海龍子)인 처용(處容)이 왕을 따라 서울에 와서 왕정(王政)을 보좌하고 역신(疫神)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수신인 용신은 인간의 병마를 구축하는 신으로 신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의 수신신앙의 면모는 기록이 적어 알 길이 없다. 다만, 서동설화(薯童說話)를 보면 서동의 어머니는 과부로 지룡(池龍)과 통하여 서동을 낳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서동은 용신의 후예임을 알 수 있는데 그가 뒤에 무왕이 되었다는 점에서 백제사회에서도 수신이 국가의 조상신이나 수호신으로 숭앙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이처럼 고대국가에서 수신에 대한 신앙이 천신 신앙에 버금갈 정도로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신신앙은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와 융화하여 호국용신사상을 낳기도 하였다. 신라 문무왕이 죽어서 호국용신이 되었다는 설화는 수신이 수호신으로 신앙되었음을 말해주는 단적인 근거가 된다.
고려조에 들어와서도 수신신앙은 쇠퇴하지 않고 더욱 고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국조인 왕건(王建)의 아버지인 용건(龍建)은 작제건(作帝建)과 용녀(龍女)인 원창왕후(元昌王后)의 소생이다. 작제건이 아버지를 찾아 중국으로 가는데 서해용왕의 부탁을 받고 여래상(如來像)으로 둔갑한 여우를 활로 쏘아 죽이고 용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낳은 사남 중 장남이 바로 용건이다. 용녀의 후손이 국조가 되었다는 『고려사』 「세가(世家)」의 기록에서 우리는 고려시대에도 용신이 조상신으로 신성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의 건국신화라 할 수 있는 「용비어천가」에서도 세종의 육대조(六代祖)를 육룡(六龍)에 비의(比擬)하고 있다. 그밖에 많은 시가나 소설에서도 수신에 대한 신앙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조선조의 고전소설인 「홍길동전」 · 「소대성전」 등에는 주인공의 전생신분이 용이나 용의 자식으로 되어 있다. 또한, 「심청전」에서는 인당수 수신에 대한 인신공희(人身供犧)의 습속이 나타난다. 이처럼 수신은 우리 민족의 수호신 또는 조상신으로 많은 사람의 숭앙의 대상이 되었다.
민속에 나타난 수신신앙은 신앙집단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주로 하는 어촌의 어민들은 수신에 대한 신앙이 매우 강하다. 동해안 어촌에서는 마을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어 용왕신을 모시고 정월 대보름에 행하는 동제(洞祭) 때나 몇 년마다 하는 풍어제(豊魚祭) 때에 마을 전체의 행사로서 용왕제를 올린다. 어촌의 용왕당은 바다를 관장하는 수신이면서 마을 전체의 안녕함을 보살펴주는 마을 수호신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서해안 일대에서도 밤이나 새벽에 부녀자들이 간단한 제물을 가지고 바닷가에 나가서 용왕제를 지내며, 고기잡이를 떠날 때에는 배에서 용왕제를 크게 지낸다. 어촌에서 숭앙하는 용왕신은 바다의 신이면서 물고기를 많이 잡도록 도와주는 풍어의 신이다. 또한 어로(漁撈)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을 지켜주는 수호신이기도 하다.
한편 농촌에서는 농경과 관련하여 비를 관장하는 신으로 수신이 숭앙되었다. 해가 바뀐 뒤 처음으로 맞이하는 일진을 상진일(上辰日)이라고 하는데, 이날 새벽에는 부녀자들이 남보다 먼저 일어나 우물물을 길어온다. 이날 새벽에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우물에 알을 슬어놓고 간다고 하여 그 우물을 제일 처음 먹는 사람은 그해 농사가 대풍이 들고 아들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 습속을 ‘ 용알뜨기’라고 하는데 먼저 물을 길어간 사람은 그 표적으로 지푸라기를 우물에 띄워놓는다고 한다. 또한 상진일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가 용의 머리털처럼 길어진다고 하여 머리를 감는 습속도 있다.
상원일(上元日)에는 아침해가 뜨기 전에는 샘물을 긷지 않는 습속이 있다. 물을 길으면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상원일에는 남의 집에 가서 물을 먹지 않는다. 만약 물을 먹으면 자기 집의 여름농사가 비 때문에 망친다고 한다. 이처럼 물에 대한 여러 가지 속신과 금기가 농사의 풍흉과 관련되어 전해진다.
농사에서는 가뭄의 폐해가 가장 무섭다. 음력 5월 전후 모내기철에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낸다. 충청북도 단양군에서는 비가 오지 않으면 이장이 제주가 되어 개 · 돼지 · 소 등의 머리를 용소(龍沼)에 넣고 기우제를 지내는데, 이렇게 하면 용신이 더럽혀진 물을 깨끗하게 하려고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비는 옥황상제의 명령으로 용신이 내려준다고 믿으며, 비를 관장하는 신으로서 수신신앙이 농촌에서는 특히 강하다. 그밖에 영험이 있는 물에 가서 자손을 빌거나 소원을 비는 영수신앙(靈水信仰)도 널리 퍼져 있다.
제주시 용담동에는 용소 또는 용연(龍淵)이라는 못이 있는데, 이 못에는 동해용이 와서 풍치를 즐겼고 용이 머물러 있다고 하여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전라남도 고흥군 풍양면 풍도농장 못에도 용신이 있다고 한다. 이 못에서 고기를 잡다가 그물이 터져 고기를 놓아주었는데 다음날 물고기들이 앞산의 정상에 죽어 쌓여 있었는데 이것은 연못의 용신이 노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가뭄에 마르지 않는 샘이나 깊은 웅덩이에는 영험한 수신이 있다고 믿으며, 이 수신은 아들 점지를 비롯하여 인간의 여러 가지 결핍을 해소해준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이처럼 수신은 인간의 복을 주는 신으로도 숭앙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