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호는 일제강점기 전라북도지사, 조선총독부학무국장, 중추원부의장 등을 역임한 관료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67년(고종 4)에 태어나 1946년에 사망했다. 1882년 무과에 급제하고 1883년 설치된 통역관 양성소에서 영어를 배웠다. 1894년 일본군과 함께 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으며 1895년 춘생문사건에 가담하였다가 변심하여 밀고하였다가 일본으로 망명했다. 1910년 이후 경상북도 장관, 전라북도 장관, 전라북도지사 등을 역임하며 일제에 협력하였다. 1924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취임하였고, 일제의 조선통치를 찬양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어려서 한문을 배우고 1882년 무과에 급제했다. 1883년 통리교섭아문에 설치된 통역관 양성소 동문학(同文學)에서 영어를 배웠다. 1886년 3월 미국인 선교사 알렌(H. N. Allen)이 세운 제중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1887년 효력부위 용양위 좌부장(效力副尉龍驤衛左部將)에 임명되었다. 연무공원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미국인 교관 다이(W. Mc. Dye)의 눈에 들어 1889년 1월 가설부장(加設部長)으로 발탁되었고, 2월 친군 장위영 초관, 1891년 2월 학도부장을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2차 봉기를 하자 10월에 정부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직한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에서 교도소 영관(敎導所領官)으로 지목되어 일본군과 함께 농민군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전의, 논산 등지에서 많은 농민군을 살육하고 공주 우금치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을 다시 빼앗았다. 이어 청일전쟁 평양전투에서 일본 육군 중장 노즈 미치쓰라[野津道貫] 제5사단장을 수행하는 평양대 대대장으로 일본군을 도왔다. 1895년 3월 육군 정위(正尉)로 진급했고, 5월 훈련대 제2대대 제1중대장에서 면직되었으나 8월 육군 참령(參領)으로 진급하면서 훈련대 제3대대 대대장이 되었다.
을미사변 후 고종이 경복궁에 감금당하자 1895년 11월 고종을 탈출시키려던 ‘ 춘생문사건’에 가담하면서 성문을 열기로 약속했지만, 거사 전에 변심하여 군부대신 어윤중(魚允中)에게 밀고하여 실패하게 만들었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성공하자 일본공사관의 보호를 받아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망명 중이던 1900년 유길준이 도모한 쿠데타계획에 가담했다. 1907년 8월 귀국해서 9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특사로 사면되었다. 10월 중추원 부찬의를 거쳐 1908년 6월 평안남도관찰사 겸 평안남도재판소 판사를 지냈으며, 1908년 7월 평양일어학교 교장, 1909년 4월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장을 겸임했다.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후인 1910년 10월부터 경상북도장관을 지냈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1월 고등관 2등으로 승진했다. 1914년부터 1916년 3월까지 도장관으로 경상북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 협력했다. 1916년 3월 사망한 이두황(李斗璜)의 후임으로 전라북도장관으로 옮겨 전라북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했으며, 4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전북지부장을 맡았다. 1918년 11월 일본정부가 주는 훈4등 서보장과 금배(金杯)를 받았다. 1919년 4월 전북지역 지주와 관료를 규합해서 전북자성회(全北自省會)를 조직했으며, 8월 관제 개정으로 전라북도지사가 되었다. 1920년 6월 훈3등 서보장을 받았고, 9월 고등관 1등에 올랐다. 1921년 8월부터 문관분한령(文官分限令)에 따라 2년간 휴직한 후 1923년 8월 퇴직했다.
1921년 8월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촉탁, 9월 조선총독부 조선중앙위생회 위원, 1922년 4월 조선권업신탁㈜ 취체역, 11월 일선융화단체인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 감사를 지냈다. 1923년 1월 고학생구제방법 연구회와 불교흥륭회 발기회에 참석하였고, 8월 해동은행 취체역이 되었으며, 11월 경성부 부협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1924년 2월 경성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 이사 및 평의원으로 선임되었고, 7월 전조선공직자대회 간화회 실행위원으로 미국의 배일법(排日法)을 규탄하는 항의문을 채택했으며, 9월 계림전기㈜ 발기인, 11월 조선물산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4년 12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취임했는데, 조선총독부의 국장급에 오른 최초의 한국인이다. 학무국장으로 재임하면서 경성제국대학 창설위원회 위원, 고적조사위원회 위원, 사립학교 교원자격 인정위원회 위원장,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 등을 겸직했다. 1925년 전문학교 입학자 검정시험위원회 위원장, 같은 해 7월 조선사편수회 위원, 1926년 세제조사위원회 임시위원, 1928년 조선비행학교 창립위원회 교섭위원 및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위원을 겸직하면서 식민지교육을 정립하는데 앞장섰다.
1925년 5월 조선불교단 상담역, 1926년 동민회 상담역으로 위촉되었다. 1928년 11월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고, 1929년 1월 학무국장직에서 물러났다. 학무국장 시절에 일제의 조선통치를 찬양하는 글을 여러 편 발표했는데, 대표적으로 「조선교육의 회고」(『조선급만주』 1925.9.), 「과거 20년간 조선의 교육발달」(『조선급만주』 1927.4.), 「문정쇄신(文政刷新)의 제일보」(『신민』 1929.1.)와 같은 기고문이 있다.
1931년 1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로 임명되어 1940년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2,5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2년 2월 중추원 대표로 재만주 조선동포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인을 위문했다. 1933년 7월 중추원 시정연구회 사회부장이 되었으며, 1935년 10월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1936년 11월 경성 부민관에서 조선에 징병제도실시를 요청하는 운동을 벌였고, 1937년 7월 중일전쟁 직후 경성교화단체연합회 주최 시국강연회 연사로 나섰으며, 1939년 11월 조선유도(儒道)연합회 이사로 추대되었다.
1940년 2월 11일 창씨개명을 실시하자마자 같은 달 22일 리노이에 진호(李家軫鎬)라고 바꾸었으며, 11월 기원2600년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받아 ‘기원 2600년 축전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5월 중추원 칙임관 대우 부의장에 임명되면서 3,500원의 수당을 받았으며, 같은달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8월 흥아보국단 경기도위원, 임전대책협의회 위원, 9월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12월 조선유도연합회 고문, 1942년 3월 조선마사회 평의원으로 추대되었고, 1941년 11월 경성학료(學寮)경영㈜을 설립했다. 1943년 6월부터 중추원 고문으로 수당 3,000원을 받았고, 10월 일본제국의회 귀족원의 칙선의원에 선임되었다. 1945년 2월 훈2등 서보장을 받았고, 7월 조선국민의용대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이진호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8 · 9 · 11 · 13 · 17 · 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4: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43∼40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