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림사 무구정광탑원기 ( )

고대사
유물
855년 경주 창림사에서 문성왕이 석탑의 조성하고 발원내용을 새긴 사리함 기록.
이칭
이칭
창림사무구정탑지(昌林寺無垢淨塔誌), 이천 영원사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 (利川靈源寺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
정의
855년 경주 창림사에서 문성왕이 석탑의 조성하고 발원내용을 새긴 사리함 기록.
개설

「창림사무구정탑원기」는 문성왕이 855년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多羅尼經)』의 내용에 따라 무구정탑을 만들며 발원한 내용과 참여자의 명단을 적어 놓은 기록이다.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 불사활동에는 왕족 여러 명이 참여하였다. 발원문은 문한관인 한림랑(翰林郞) 김립지(金立之)가 왕명을 받아 지었으며, 글씨는 왕희지체를 집자한 것으로, 글자의 윤곽을 따라 그리는 쌍구법(雙鉤法)으로 새겨 놓았다.

내용

문성왕이 여러 겁(劫) 동안의 선행이 인천의 세계에서 으뜸으로서 중생들의 윤회를 안타깝게 여기고 모두를 부처의 정토로 이끌고자 한다. 그래서 가장 큰 공덕을 얻을 수 있는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하여 중생을 구제하고자 한다. 그 결과로 문성왕은 영원히 인천세계의 주인이 되고, 사후에도 귀한 지위가 이어지기를 발원하였다.

발원내용에서 그대로 이해되듯이, 문성왕이 윤회세계에서의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선행이 계속되길 바라고, 삼세(三世)를 넘어 영원히 인천세계의 주인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이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도의 실천의지를 역설한 것이며, 국왕으로서의 포부를 밝힌 것이다.

이 사업에는 여러 왕족이 참여하였다. 웅주(熊州) 기량현(祁梁縣; 충남 아산)의 현령 김예(金銳)가 수조탑사(修造塔使)로, 숙부 항열의 무주(武州; 전남지역) 장사(長史) 김계종(金繼宗)과 강주(康州; 경남) 사수현(泗水縣; 경남 사천) 현령 김훈영(金勳榮) 등이 참여하였다. 불교계에서는 정법전(政法典)의 승관으로 판사인 대덕 계현(啓玄)과 강주 함안군통(咸安郡統)인 교장(敎章)이 참여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전 봉덕사(奉德寺) 상좌인 청현(淸玄)도 함께 하였다. 또한 실무는 집사시랑(執事侍郞)인 김원필(金元弼)을 비롯 김의령(金嶷寧) 세택(洗宅)의 대나마로 서림군(西林郡; 충남 서천) 태수인 김양박(金梁博)이 지휘하였다. 구체적인 실무 수행은 전 창부사(倉府史)였던 김기언(金奇言)과 김박기(金朴基)가 담당하였다.

특징

국왕이 발원하는 사업에 왕족이 주요 책임자로 참여하면서 정법전의 승관이 함께하고, 중하급 관리들이 실무를 담당하는 것은 의례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신라는 흥덕왕 사후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희강왕으로부터 민애왕에 이르는 동안 왕위쟁탈은 4촌·6촌 등 극히 가까운 혈족 사이에서 벌어졌다. 문성왕의 부친인 신무왕이 장보고의 군사를 빌리어 거사에 성공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문성왕이 불사활동을 일으키기 위해 여러 왕족들을 동원한 것은 김씨 왕족들의 단합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더욱 이보다 몇 년 앞서 세운 법광사 석탑은 단월(檀越: 시주)이 정토에 나고, 왕의 복과 수명이 오래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 점에서 문성왕대의 사업은 왕실간의 용서와 화해를 위한 단합보다는 국왕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현황

한편 사리함은 1824년에 석공이 창림사 삼층석탑을 도괴할 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사경문(寫經文)과 함께 발견된 것이었다. 당시 금석학에 조예가 깊던 추사 김정희가 이를 모사(模寫)해 두었고 그것이 『慶州南山の佛蹟』(1940년)에 수록되어 존재가 알려졌다.

그러나 실물의 행방은 알 수 없는데, 최근 수원 용주사(龍珠寺) 효행박물관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리함은 이천 영원사(靈源寺)에서 1968년 대웅전을 해체하던 중 기단에서 출토된 뒤, 2011년 효행박물관에 기탁되었다고 한다. 영원사는 안동 김씨의 원찰(願刹)로, 1827년 김조순(金祖淳)의 시주로 중건되었다. 당시 김정희가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과 친근한 사이였던 점을 미루어, 1824년 출토된 사리함이 김조순 일가로 들어갔고, 영원사를 중건하면서 대웅전의 진단구(鎭壇具)로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의견도 있어 현재 문화재 지정은 보류되어 있다. 따라서 앞으로 면밀한 검토를 행한 뒤 진품여부를 결정지을 필요가 있다.

의의와 평가

흥덕왕 사후 극심하게 벌어진 왕위쟁탈전은 문성왕대에 이르러서도 장보고의 난을 비롯 여전하였다. 그런데 이 「창림사무구정탑원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국왕의 선행을 통한 인과(因果)만 강조하고 있다. 이는 문성왕이 왕위쟁탈전의 두려움을 신앙을 통해 극복하려 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왕위쟁탈전에 따른 용서와 화해가 없는 것이어서 이후 신라 사회가 정치적 안정을 얻어 새롭게 반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지 못하였다. 그리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조탑공덕사상을 설법한 경전인데, 이는 통일신라시대에 널리 유행하는 배경이 되었다. 특히 국가나 왕실의 불사활동에서 많은 사례가 발견되는데, 본 탑은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동사강목(東史綱目)』
『한국금석문집성 14 -신라10 조상명-』(김복순·한정호, 한국국학진흥원, 2012)
『역주 한국고대금석문』Ⅲ(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이기동, 일조각, 1981)
『新羅史の諸問題』(末松保和, 東洋文庫, 1954)
『慶州南山の佛蹟』(朝鮮總督府, 1940)
「경주 남산 출소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와 무구정탑」(신용철, 『동악미술사학』 15, 2013)
「문성왕대의 정국과 창림사 무구정탑원기 조성의 정치적 배경」(강재광, 『한국고대사탐구』 7, 2011)
집필자
곽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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