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사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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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이다.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 1958년에 사망했다. 성균관 수료 후 일본에 유학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취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 삼균주의를 제창하여 임시정부 정강정책의 바탕으로 삼았다. 광복 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1950년 총선에서 전국최다득표자로 선출되었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조소앙 (趙素昻)
조소앙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이다.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 1958년에 사망했다. 성균관 수료 후 일본에 유학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취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 삼균주의를 제창하여 임시정부 정강정책의 바탕으로 삼았다. 광복 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1950년 총선에서 전국최다득표자로 선출되었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1912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동제사 (同濟社)
1912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전진한은 해방 이후 초대 사회부장관, 민정당 부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사회운동가이다. 1901년 경북 문경 출생으로 서울로 상경해 고학 중 1920년 기미육영회의 동경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유학시절인 1926년 동지들과 ‘협동조합운동사’를 만들어 항일운동, 노동운동, 협동조합운동, 대중운동의 발판을 삼았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초대 사회부장관을 지냈다. 5차례의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민정당 부총재, 민중당 지도위원 등을 지냈으며, 통일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으며, 1972년 4월 별세했다.
전진한 (錢鎭漢)
전진한은 해방 이후 초대 사회부장관, 민정당 부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사회운동가이다. 1901년 경북 문경 출생으로 서울로 상경해 고학 중 1920년 기미육영회의 동경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유학시절인 1926년 동지들과 ‘협동조합운동사’를 만들어 항일운동, 노동운동, 협동조합운동, 대중운동의 발판을 삼았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초대 사회부장관을 지냈다. 5차례의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민정당 부총재, 민중당 지도위원 등을 지냈으며, 통일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으며, 1972년 4월 별세했다.
김성숙은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승려이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호는 운암(雲巖), 성숙(星淑)은 법명이다. 1916년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했다. 주요 독립운동 활동으로 3·1 운동 주도, 조선의열단 가담, 조선의용대 조직 및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역임 등이 있다. 광복 후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지지하였으며, 진보당사건(1955년)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69년 서거하였으며,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성숙 (金星淑)
김성숙은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승려이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호는 운암(雲巖), 성숙(星淑)은 법명이다. 1916년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했다. 주요 독립운동 활동으로 3·1 운동 주도, 조선의열단 가담, 조선의용대 조직 및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역임 등이 있다. 광복 후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지지하였으며, 진보당사건(1955년)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69년 서거하였으며,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박진순은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의 중앙위원 겸 제2비서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7년 테러 조직에 가담한 혐의로 총살되었다가 복권되었다.
박진순 (朴鎭淳)
박진순은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의 중앙위원 겸 제2비서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7년 테러 조직에 가담한 혐의로 총살되었다가 복권되었다.
한인사회당은 1918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李東輝) 등이 조직한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정당이다. 코민테른의 지부로 승인받았으며,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하며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통합 노력이 실패하고, 고려공산당 상해파으로 재편되었다.
한인사회당 (韓人社會黨)
한인사회당은 1918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李東輝) 등이 조직한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정당이다. 코민테른의 지부로 승인받았으며,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하며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통합 노력이 실패하고, 고려공산당 상해파으로 재편되었다.
이인섭은 구한말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연해주에서 김알렉산드리아 등과 교섭하며 사회주의운동을 시작하여 한인사회당 중앙위원, 소련공산당 연해주위 선전선동부원 등을 역임하였다. 국내에서는 대한독립단원을 원조하는 등의 활동을 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이인섭 (李仁燮)
이인섭은 구한말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연해주에서 김알렉산드리아 등과 교섭하며 사회주의운동을 시작하여 한인사회당 중앙위원, 소련공산당 연해주위 선전선동부원 등을 역임하였다. 국내에서는 대한독립단원을 원조하는 등의 활동을 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김만겸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러시아 정부 국경대표부 통역원, 대한국민의회 간부를 지냈다. 1911~1912년 러시아 신문 『달료카야 오크라이나』지 서울 주재 특파원으로서 서울에 거주하였다. 1920년 4월 코민테른 동아비서부의 일원으로 볼세비키와 협력하면서 상하이와 국내를 포함한 한인공산당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김만겸 (金萬謙)
김만겸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러시아 정부 국경대표부 통역원, 대한국민의회 간부를 지냈다. 1911~1912년 러시아 신문 『달료카야 오크라이나』지 서울 주재 특파원으로서 서울에 거주하였다. 1920년 4월 코민테른 동아비서부의 일원으로 볼세비키와 협력하면서 상하이와 국내를 포함한 한인공산당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김규면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기독교도로 개종하였지만, 포교 규칙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교단을 탈퇴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하였고, 중국 관내로 건너가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로 양분된 민족운동의 통합을 시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김규면 (金圭冕)
김규면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기독교도로 개종하였지만, 포교 규칙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교단을 탈퇴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하였고, 중국 관내로 건너가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로 양분된 민족운동의 통합을 시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은 1919년 11월 중국 장백현(長白縣)에서 조직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연계 아래 출범하여 군사 활동, 군자금 모집, 대원 모집 활동, 교육기관 설립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군사부를 연해주 이만[지금의 러시아 달네레첸스크]으로 이동시켰으며, 이후 간도에 남은 본부는 광정단(匡正團)으로 재편되었다.
대한독립군비단 (大韓獨立軍備團)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은 1919년 11월 중국 장백현(長白縣)에서 조직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연계 아래 출범하여 군사 활동, 군자금 모집, 대원 모집 활동, 교육기관 설립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군사부를 연해주 이만[지금의 러시아 달네레첸스크]으로 이동시켰으며, 이후 간도에 남은 본부는 광정단(匡正團)으로 재편되었다.
4·19 이후 조성된 혁신세력들의 정치활동.
혁신운동 (革新運動)
4·19 이후 조성된 혁신세력들의 정치활동.
이용은 일제강점기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국권피탈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한인사회당의 중앙위원으로 군사부를 담당하였으며, 광주봉기에 군사고문으로 참여하였다. 봉기 실패 후 해륙풍 근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8·15광복 후 북한 정권에서 초대 도시경영상을 역임하였다.
이용 (李鏞)
이용은 일제강점기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국권피탈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한인사회당의 중앙위원으로 군사부를 담당하였으며, 광주봉기에 군사고문으로 참여하였다. 봉기 실패 후 해륙풍 근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8·15광복 후 북한 정권에서 초대 도시경영상을 역임하였다.
배헌은 일제강점기 때, 신간회 운동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1913년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고국에 입국해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부터 신간회 운동을 전개하고, 1931년 이리야구협회 창립과 함께 부회장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8월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대한국민당의 부위원장을 맡았다. 1991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배헌 (裵憲)
배헌은 일제강점기 때, 신간회 운동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1913년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고국에 입국해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부터 신간회 운동을 전개하고, 1931년 이리야구협회 창립과 함께 부회장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8월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대한국민당의 부위원장을 맡았다. 1991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다반군대는 러시아 하바롭스크주의 한인 마을인 다반에서 조직된 한인 빨치산부대이다. 1918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조직되고 산하에 적위군이 편성되었다. 적위군은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는 백위군 및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함락·해산되었다. 이후 하바롭스크 동쪽 다반이라는 한인 마을에서 조직된 부대가 다반군대이다. 1919년 이후 러시아 빨치산부대와 협력해 하바롭스크 해방 전투에 참여하였다. 1920년 4월참변 이후 블라고베센스크로 이동해 러시아 인민혁명군 8연대에 배속되었다. 다반군대는 한인사회당이 볼셰비키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토대가 되었다.
다반군대 (다반軍隊)
다반군대는 러시아 하바롭스크주의 한인 마을인 다반에서 조직된 한인 빨치산부대이다. 1918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조직되고 산하에 적위군이 편성되었다. 적위군은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는 백위군 및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함락·해산되었다. 이후 하바롭스크 동쪽 다반이라는 한인 마을에서 조직된 부대가 다반군대이다. 1919년 이후 러시아 빨치산부대와 협력해 하바롭스크 해방 전투에 참여하였다. 1920년 4월참변 이후 블라고베센스크로 이동해 러시아 인민혁명군 8연대에 배속되었다. 다반군대는 한인사회당이 볼셰비키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토대가 되었다.
김립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구한말에 서북학회와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을사늑약 후 블라디보스토크와 북간도를 오가며 간민교육회, 권업회 등을 조직하였다.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나, 모스크바에서 임시정부로 보낸 자금을 감추고 당파적으로 사용했다는 의심을 받고 암살당하였다.
김립 (金立)
김립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구한말에 서북학회와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을사늑약 후 블라디보스토크와 북간도를 오가며 간민교육회, 권업회 등을 조직하였다.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나, 모스크바에서 임시정부로 보낸 자금을 감추고 당파적으로 사용했다는 의심을 받고 암살당하였다.
박애는 일제강점기 한인사회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중진을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다. 그는 귀화한 한인 사회주의자이며, 러시아혁명 초기 극동소비에트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혁명기구원회(모플) 극동부장, 코민테른 동양위원부 한국위원, 소련공산당 연해주위원회 약소민족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박애 (朴愛)
박애는 일제강점기 한인사회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중진을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다. 그는 귀화한 한인 사회주의자이며, 러시아혁명 초기 극동소비에트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혁명기구원회(모플) 극동부장, 코민테른 동양위원부 한국위원, 소련공산당 연해주위원회 약소민족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하구는 일제강점기에 『한인신보』 주필,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위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한북학회, 신민회 등 계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권업신문』을 발행하고, 『한인신보』와 『선봉』의 주필을 지냈다.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 중앙위원을 역임하였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상해파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인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김하구 (金河球)
김하구는 일제강점기에 『한인신보』 주필,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위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한북학회, 신민회 등 계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권업신문』을 발행하고, 『한인신보』와 『선봉』의 주필을 지냈다.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 중앙위원을 역임하였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상해파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인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최성우는 일제강점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으로, 일세당과 한인사회당에서 활동하였다. 러시아공산당과 러시아공산청년동맹 소속으로 코민테른에서 조선 문제를 당담하였다. 1934년에서 1935년까지 코민테른 기관지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조선공산당 행동강령에 대하여」, 「종파와의 투쟁 임무에 관한 조선공산당 발기자 그룹의 서한에 대하여」 등을 기고하였다.
최성우 (崔成宇)
최성우는 일제강점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으로, 일세당과 한인사회당에서 활동하였다. 러시아공산당과 러시아공산청년동맹 소속으로 코민테른에서 조선 문제를 당담하였다. 1934년에서 1935년까지 코민테른 기관지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조선공산당 행동강령에 대하여」, 「종파와의 투쟁 임무에 관한 조선공산당 발기자 그룹의 서한에 대하여」 등을 기고하였다.
일제강점기 한인사회당 회장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장도정 (張道政)
일제강점기 한인사회당 회장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조응순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전재익 의병과 단지동맹에서 활동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였다. 한국의용군 결사대를 조직하고 대장으로서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응순 (趙應順)
조응순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전재익 의병과 단지동맹에서 활동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였다. 한국의용군 결사대를 조직하고 대장으로서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