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의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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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용군은 한국전쟁 초기 북한의 전시동원령에 따라 정규군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군대 또는 군인이다. 1950년 7월 1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선포한 ‘전시동원령’에 근거해 모집되었다. 개전 초에는 출옥한 좌익사범, 지하활동가, 보도연맹원 등이 자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7월 2일부터 ‘군중대회’ 또는 ‘궐기대회’ 등을 집단적인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북한은 의용군 모집을 위해 복구된 당조직과 노동·청년·학생·여성단체들을 총동원했다. 한국전쟁 중 인민의용군으로 참가한 인원은 적게는 10만에서 많게는 4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인민의용군 (人民義勇軍)
인민의용군은 한국전쟁 초기 북한의 전시동원령에 따라 정규군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군대 또는 군인이다. 1950년 7월 1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선포한 ‘전시동원령’에 근거해 모집되었다. 개전 초에는 출옥한 좌익사범, 지하활동가, 보도연맹원 등이 자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7월 2일부터 ‘군중대회’ 또는 ‘궐기대회’ 등을 집단적인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북한은 의용군 모집을 위해 복구된 당조직과 노동·청년·학생·여성단체들을 총동원했다. 한국전쟁 중 인민의용군으로 참가한 인원은 적게는 10만에서 많게는 4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은 1919년 11월 중국 장백현(長白縣)에서 조직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연계 아래 출범하여 군사 활동, 군자금 모집, 대원 모집 활동, 교육기관 설립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군사부를 연해주 이만[지금의 러시아 달네레첸스크]으로 이동시켰으며, 이후 간도에 남은 본부는 광정단(匡正團)으로 재편되었다.
대한독립군비단 (大韓獨立軍備團)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은 1919년 11월 중국 장백현(長白縣)에서 조직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연계 아래 출범하여 군사 활동, 군자금 모집, 대원 모집 활동, 교육기관 설립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군사부를 연해주 이만[지금의 러시아 달네레첸스크]으로 이동시켰으며, 이후 간도에 남은 본부는 광정단(匡正團)으로 재편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 조선의용군, 조선민족혁명당 특파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 중국군 육군소장을 역임한 군인·독립운동가.
강인수 (姜人壽)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 조선의용군, 조선민족혁명당 특파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 중국군 육군소장을 역임한 군인·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자유시사변과 관련된 사회주의운동가.
박그리고리 (朴Grigory)
일제강점기 자유시사변과 관련된 사회주의운동가.
김홍일은 일제강점기 1·8 일왕저격, 4·29 상해의거 당시의 독립운동가이다.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했다. 신천경신학교 교사 재직 중 항일단체 가담 혐의로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0년 중국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였다. 김구의 요청으로 1932년 이봉창의 1·8 일왕저격 및 윤봉길의 4·29 상해의거용 폭탄을 제작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서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국회의원, 정당 당수 등 정치가로 활동했다.
김홍일 (金弘壹)
김홍일은 일제강점기 1·8 일왕저격, 4·29 상해의거 당시의 독립운동가이다.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했다. 신천경신학교 교사 재직 중 항일단체 가담 혐의로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0년 중국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였다. 김구의 요청으로 1932년 이봉창의 1·8 일왕저격 및 윤봉길의 4·29 상해의거용 폭탄을 제작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서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국회의원, 정당 당수 등 정치가로 활동했다.
박창은은 러시아 극동국 한인부에서 활동하고 대한의용군 결성에 참여하고 대한국민의회 비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이명은 박이반이며, 1920년 12월부터 러시아 '극동국 한인부’ 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초에 러시아령에서 소집된 전한의병대회와 대한의용단 결성에 참여하였다.
박창은 (朴昌殷)
박창은은 러시아 극동국 한인부에서 활동하고 대한의용군 결성에 참여하고 대한국민의회 비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이명은 박이반이며, 1920년 12월부터 러시아 '극동국 한인부’ 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초에 러시아령에서 소집된 전한의병대회와 대한의용단 결성에 참여하였다.
김규면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기독교도로 개종하였지만, 포교 규칙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교단을 탈퇴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하였고, 중국 관내로 건너가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로 양분된 민족운동의 통합을 시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김규면 (金圭冕)
김규면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기독교도로 개종하였지만, 포교 규칙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교단을 탈퇴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하였고, 중국 관내로 건너가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로 양분된 민족운동의 통합을 시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마건은 일제강점기에 적기단 결성 및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대한북로독군부 소속으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대첩에 참여하였다. 또한 대한의용군 소대장으로서 시베리아 내전에 참전하였으며, 적기단을 결성하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동하였다. 만주사변 이후에는 항일유격대를 조직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마건 (馬建)
마건은 일제강점기에 적기단 결성 및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대한북로독군부 소속으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대첩에 참여하였다. 또한 대한의용군 소대장으로서 시베리아 내전에 참전하였으며, 적기단을 결성하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동하였다. 만주사변 이후에는 항일유격대를 조직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강점기 남만임시특별위원회 서기, 남만성위원회 조직부장, 동북항일연군 간부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이동광 (李東光)
일제강점기 남만임시특별위원회 서기, 남만성위원회 조직부장, 동북항일연군 간부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대한독립단과 광복군총영, 독립의용군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유성삼 (劉成三)
일제강점기 때, 대한독립단과 광복군총영, 독립의용군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임시의정원 비서, 중국 첸첸일보 편집조사부장 등을 역임한 천도교인·교육자·독립운동가.
안병무 (安炳武)
일제강점기 때, 임시의정원 비서, 중국 첸첸일보 편집조사부장 등을 역임한 천도교인·교육자·독립운동가.
이용은 일제강점기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국권피탈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한인사회당의 중앙위원으로 군사부를 담당하였으며, 광주봉기에 군사고문으로 참여하였다. 봉기 실패 후 해륙풍 근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8·15광복 후 북한 정권에서 초대 도시경영상을 역임하였다.
이용 (李鏞)
이용은 일제강점기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국권피탈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한인사회당의 중앙위원으로 군사부를 담당하였으며, 광주봉기에 군사고문으로 참여하였다. 봉기 실패 후 해륙풍 근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8·15광복 후 북한 정권에서 초대 도시경영상을 역임하였다.
이홍광은 일제강점기 때, 반석중심현위원회 위원,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 정치위원 등을 역임하며 항일농민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에 태어나 1935년에 사망하였다. 1925년 중국 길림성으로 이주하여 1927년 재만농민동맹에 가입하였다. 이후 반일회와 농민회 등 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1931년 속칭 ‘개잡이대’라고 알려진 적위대를 창건해 항일무장투쟁 및 반봉건투쟁에 앞장섰다. 1932년 남만유격대의 침모장을 맡아 항일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한인으로 조직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를 이끌며 동흥 점령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홍광 (李紅光)
이홍광은 일제강점기 때, 반석중심현위원회 위원,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 정치위원 등을 역임하며 항일농민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에 태어나 1935년에 사망하였다. 1925년 중국 길림성으로 이주하여 1927년 재만농민동맹에 가입하였다. 이후 반일회와 농민회 등 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1931년 속칭 ‘개잡이대’라고 알려진 적위대를 창건해 항일무장투쟁 및 반봉건투쟁에 앞장섰다. 1932년 남만유격대의 침모장을 맡아 항일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한인으로 조직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를 이끌며 동흥 점령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용군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을 벌였고 해방 이후 북한에서, 북조선로동당 황해도당위원장, 중앙당 농업부장 등을 역임한 관료·독립운동가.
박훈일 (朴勳一)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용군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을 벌였고 해방 이후 북한에서, 북조선로동당 황해도당위원장, 중앙당 농업부장 등을 역임한 관료·독립운동가.
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해방 후 입북한 조선의용군 출신의 정치집단.
연안파 (延安派)
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해방 후 입북한 조선의용군 출신의 정치집단.
전국학련구국대는 1950년, 전국학생총연맹 간부 출신들이 조직한 학도의용군이다. 6 · 25전쟁 초기에 부족한 병력 충원과 군 사기 진작에 도움을 주었다. 활동 목적은 학도지원병 모집과 후방 선무공작, 후방 치안 등이었고, 내무부 협조를 얻어 활약하였다. 9 · 28서울수복 이후 해체되었다. 학생 신분으로 국가의 위기에 분연히 일어나 투쟁하였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전국학련구국대 (全國學聯救國隊)
전국학련구국대는 1950년, 전국학생총연맹 간부 출신들이 조직한 학도의용군이다. 6 · 25전쟁 초기에 부족한 병력 충원과 군 사기 진작에 도움을 주었다. 활동 목적은 학도지원병 모집과 후방 선무공작, 후방 치안 등이었고, 내무부 협조를 얻어 활약하였다. 9 · 28서울수복 이후 해체되었다. 학생 신분으로 국가의 위기에 분연히 일어나 투쟁하였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해방 이후 연변에서 『격정시』·『해란강아 말하라』 등을 저술한 소설가.
김학철 (金學鐵)
해방 이후 연변에서 『격정시』·『해란강아 말하라』 등을 저술한 소설가.
6·25전쟁 당시 조국방위를 위해 참전한 642명의 재일동포 청년들로 구성된 의용부대.
재일의용병 (在日義勇兵)
6·25전쟁 당시 조국방위를 위해 참전한 642명의 재일동포 청년들로 구성된 의용부대.
중국 북만주 지역의 조선인이 만든 군대.
길흑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 (吉黑保安總隊 朝鮮獨立大隊)
중국 북만주 지역의 조선인이 만든 군대.
『조선의용대통신』은 1939년 조선의용대 대본부에서 조선의용대의 공작과 활동을 다룬 회보이며 기관지이다. 조선의용대통신은 계림에 도착하여 한중간의 연합 항일 공작을 올바르게 전개하고자 발간하였다. 판매본이었으며, 1기∼27기는 열흘마다 발간되었고, 28기부터는 반월간, 월간 혹은 부정기 간행물이 되었다. 43기부터는 『조선의용대』로 바뀌었다. 주요 내용은 조선의용대의 활동, 정세분석, 국제정세, 중국 항전 상황, 일본 침략 관련 소식 등이었다. 이 잡지는 조선의용대의 전략과 활동을 알리고, 대외적으로 그들의 항일운동을 홍보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조선의용대통신 (朝鮮義勇隊通訊)
『조선의용대통신』은 1939년 조선의용대 대본부에서 조선의용대의 공작과 활동을 다룬 회보이며 기관지이다. 조선의용대통신은 계림에 도착하여 한중간의 연합 항일 공작을 올바르게 전개하고자 발간하였다. 판매본이었으며, 1기∼27기는 열흘마다 발간되었고, 28기부터는 반월간, 월간 혹은 부정기 간행물이 되었다. 43기부터는 『조선의용대』로 바뀌었다. 주요 내용은 조선의용대의 활동, 정세분석, 국제정세, 중국 항전 상황, 일본 침략 관련 소식 등이었다. 이 잡지는 조선의용대의 전략과 활동을 알리고, 대외적으로 그들의 항일운동을 홍보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