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신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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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선전군은 고려 말과 조선 초 사수시(司水寺)에 두었던 관직이다. 『고려사』 백관지에 의하면, 사수시는 병선(兵船)과 선군(船軍)을 관장하던 관청이었고, 도부서(都府署)의 후신이었다. 1390년(공양왕 2)에 도부서를 혁파하여 사수서(司水署)라 하였다가, 곧이어 사수시로 개칭되었다. 여기에 소속된 관선전군은 1391년(공양왕 3)에 설치되었으며, 각 나루에서 관청 소유의 선박을 맡아본 것으로 파악된다.
관선전군 (官船典軍)
관선전군은 고려 말과 조선 초 사수시(司水寺)에 두었던 관직이다. 『고려사』 백관지에 의하면, 사수시는 병선(兵船)과 선군(船軍)을 관장하던 관청이었고, 도부서(都府署)의 후신이었다. 1390년(공양왕 2)에 도부서를 혁파하여 사수서(司水署)라 하였다가, 곧이어 사수시로 개칭되었다. 여기에 소속된 관선전군은 1391년(공양왕 3)에 설치되었으며, 각 나루에서 관청 소유의 선박을 맡아본 것으로 파악된다.
광군사는 고려시대 광군을 통제하던 관서이다. 광군은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947년(정종 2)에 조직되었는데, 이는 지방 호족의 지휘 아래 있던 농민예비군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 병력은 약 30만에 달하였다. 광군사는 광군의 통수부로서 국도 개경에 설치되었고, 지방에 산재해 있던 광군의 각 부대를 중앙정부에서 통제하기 위한 관서였을 것이다. 광군사는 뒤에 광군도감으로 개칭되었다가 1011년(현종 2)에 다시 광군사로 개칭되었다.
광군사 (光軍司)
광군사는 고려시대 광군을 통제하던 관서이다. 광군은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947년(정종 2)에 조직되었는데, 이는 지방 호족의 지휘 아래 있던 농민예비군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 병력은 약 30만에 달하였다. 광군사는 광군의 통수부로서 국도 개경에 설치되었고, 지방에 산재해 있던 광군의 각 부대를 중앙정부에서 통제하기 위한 관서였을 것이다. 광군사는 뒤에 광군도감으로 개칭되었다가 1011년(현종 2)에 다시 광군사로 개칭되었다.
금유는 고려 전기 중앙에서 지방에 임시로 파견한 관원이다. 금유와 더불어 파견한 관원이 조장이다. 금유와 조장은 그 설치 시기와 임무가 분명하지 않지만, 조장은 조세를 징수·보관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금유는 지방 통제와 일반 행정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의 토착세력 가운데 적임자를 선임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금유 (今有)
금유는 고려 전기 중앙에서 지방에 임시로 파견한 관원이다. 금유와 더불어 파견한 관원이 조장이다. 금유와 조장은 그 설치 시기와 임무가 분명하지 않지만, 조장은 조세를 징수·보관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금유는 지방 통제와 일반 행정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의 토착세력 가운데 적임자를 선임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별초는 고려시대에 용맹한 자들을 특별히 가려 뽑아 조직한 특수 부대이다. 고려시대의 별초는 처음 명종대에 조위총의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규군 내의 정예한 자들을 임시로 뽑아 조직되었던 선봉대였다. 그런데 그 임시로 뽑아 쓴다는 의미가 점차 국내외의 비상 시기를 당해 전국적으로 상설의 면이 보이는 한편, 기존의 무력 장치보다 더 많은 활약을 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이미 기존의 병제가 유명무실화된 상황에서 별초라는 새로운 동원 체제로 대체되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별초는 중앙의 경별초와 지방의 외별초로 구분된다.
별초 (別抄)
별초는 고려시대에 용맹한 자들을 특별히 가려 뽑아 조직한 특수 부대이다. 고려시대의 별초는 처음 명종대에 조위총의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규군 내의 정예한 자들을 임시로 뽑아 조직되었던 선봉대였다. 그런데 그 임시로 뽑아 쓴다는 의미가 점차 국내외의 비상 시기를 당해 전국적으로 상설의 면이 보이는 한편, 기존의 무력 장치보다 더 많은 활약을 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이미 기존의 병제가 유명무실화된 상황에서 별초라는 새로운 동원 체제로 대체되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별초는 중앙의 경별초와 지방의 외별초로 구분된다.
서눌은 고려 전기에 문하시중, 중대광, 삼중대광 내사령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996년(성종 15)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6대 성종~10대 정종까지 정치의 중심에서 활약하였다. 이에 따라 서눌은 할아버지 서필, 아버지 서희와 더불어 최고 관직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3대가 모두 종묘(宗廟)에 배향되었다.
서눌 (徐訥)
서눌은 고려 전기에 문하시중, 중대광, 삼중대광 내사령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996년(성종 15)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6대 성종~10대 정종까지 정치의 중심에서 활약하였다. 이에 따라 서눌은 할아버지 서필, 아버지 서희와 더불어 최고 관직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3대가 모두 종묘(宗廟)에 배향되었다.
서필은 고려 전기 광종의 정치 개혁을 보좌한 문신이다. 그의 집안은 이천의 유력한 호족으로 보이며, 서필이 처음 출사하였다. 그는 재상직에 있으면서 광종의 호족 억압책과 귀화 중국인 우대책에 대해서는 적극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광종의 정치 개혁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에 따라 서필 가문은 서필-서희-서눌 3대가 줄곧 최고 관직을 역임한 데다가 또한 3대가 모두 종묘에 배향되기도 하였다.
서필 (徐弼)
서필은 고려 전기 광종의 정치 개혁을 보좌한 문신이다. 그의 집안은 이천의 유력한 호족으로 보이며, 서필이 처음 출사하였다. 그는 재상직에 있으면서 광종의 호족 억압책과 귀화 중국인 우대책에 대해서는 적극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광종의 정치 개혁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에 따라 서필 가문은 서필-서희-서눌 3대가 줄곧 최고 관직을 역임한 데다가 또한 3대가 모두 종묘에 배향되기도 하였다.
서희는 고려 전기 강동6주를 획득하여 북쪽 변방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공헌한 문신이자 외교가이다. 942년(태조 25)에 태어나 998년(목종 1)에 사망하였다. 960년에 과거에 급제한 뒤 두루 관직을 거쳐 최고직에 이르렀다. 972년 직접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 10여 년간 단절되었던 외교 관계를 복원하였다. 993년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해 물리쳤고, 이 담판의 약속을 토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강동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아 북쪽 변방을 압록강까지 넓혔다.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서희 (徐熙)
서희는 고려 전기 강동6주를 획득하여 북쪽 변방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공헌한 문신이자 외교가이다. 942년(태조 25)에 태어나 998년(목종 1)에 사망하였다. 960년에 과거에 급제한 뒤 두루 관직을 거쳐 최고직에 이르렀다. 972년 직접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 10여 년간 단절되었던 외교 관계를 복원하였다. 993년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해 물리쳤고, 이 담판의 약속을 토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강동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아 북쪽 변방을 압록강까지 넓혔다.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설신은 고려 후기 최씨무신정권에서 상서좌복야, 추밀원부사, 형부상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순창군 호장의 증손이며, 외가도 순창군 호장이었다. 그는 시부와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어 과거를 거쳐 내외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232년(고종 19) 몽골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과중한 공물 징수에 대한 고려의 입장을 전하였으며 그해 재침한 몽골군에게 억류되었다가 처인성 승첩 이후 풀려나기도 하였으며, 1242년(고종 29) 동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하였다. 1251년(고종 38)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묘지명이 전하고 있다.
설신 (薛愼)
설신은 고려 후기 최씨무신정권에서 상서좌복야, 추밀원부사, 형부상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순창군 호장의 증손이며, 외가도 순창군 호장이었다. 그는 시부와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어 과거를 거쳐 내외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232년(고종 19) 몽골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과중한 공물 징수에 대한 고려의 입장을 전하였으며 그해 재침한 몽골군에게 억류되었다가 처인성 승첩 이후 풀려나기도 하였으며, 1242년(고종 29) 동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하였다. 1251년(고종 38)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묘지명이 전하고 있다.
손변은 고려 후기 최씨무신정권에서 추밀원사, 수사공 좌복야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금의가 주관한 과거에서 전경성·최자 등과 함께 급제하였고, 이후 금의 문생들과 교류하면서 세계관을 넓혔다. 지방관으로 나가 남매간의 송사를 현명하게 해결하는 등 여러 공적을 세웠다. 하지만 부인 집안이 미천하여 청요직에 오르지 못하였고, 아들 손세정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손변 (孫抃)
손변은 고려 후기 최씨무신정권에서 추밀원사, 수사공 좌복야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금의가 주관한 과거에서 전경성·최자 등과 함께 급제하였고, 이후 금의 문생들과 교류하면서 세계관을 넓혔다. 지방관으로 나가 남매간의 송사를 현명하게 해결하는 등 여러 공적을 세웠다. 하지만 부인 집안이 미천하여 청요직에 오르지 못하였고, 아들 손세정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송방영은 고려 후기 원 간섭기에 좌승지, 밀직부사, 지밀직사사 등을 역임한 관리이다. 『고려사』 등 기록에서 그의 직책이 장군부터 확인되어 무신에서 성장한 인물로 보인다. 원 간섭기 충렬왕의 측근으로 활약하였고, 주로 원나라와 관련된 일들이 많았다. 충선왕의 폐위 및 귀국을 방해한 사건에 관여하여, 충선왕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원나라로 잡혀가 처형되었다.
송방영 (宋邦英)
송방영은 고려 후기 원 간섭기에 좌승지, 밀직부사, 지밀직사사 등을 역임한 관리이다. 『고려사』 등 기록에서 그의 직책이 장군부터 확인되어 무신에서 성장한 인물로 보인다. 원 간섭기 충렬왕의 측근으로 활약하였고, 주로 원나라와 관련된 일들이 많았다. 충선왕의 폐위 및 귀국을 방해한 사건에 관여하여, 충선왕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원나라로 잡혀가 처형되었다.
숙종은 고려 전기 제15대(재위: 1095~1105) 왕이다. 친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1년 만에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했다. 1097년(숙종 2) 주화를 만들어 통용시켰고, 1101년 은병을 만들었으며, 1102년 해동통보 1만 5천 관을 만들어 문·무 양반과 군인들에게 분배했다. 양주에 남경을 두어 궁궐을 지었으며, 서경에 기자사당을 만들었다. 여진정벌을 단행하였지만 실패하고, 별무반을 처음 설치하였다. 1105년 서경에 순행하여 동명왕묘에 제사하고,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수레 안에서 사망했다.
숙종 (肅宗)
숙종은 고려 전기 제15대(재위: 1095~1105) 왕이다. 친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1년 만에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했다. 1097년(숙종 2) 주화를 만들어 통용시켰고, 1101년 은병을 만들었으며, 1102년 해동통보 1만 5천 관을 만들어 문·무 양반과 군인들에게 분배했다. 양주에 남경을 두어 궁궐을 지었으며, 서경에 기자사당을 만들었다. 여진정벌을 단행하였지만 실패하고, 별무반을 처음 설치하였다. 1105년 서경에 순행하여 동명왕묘에 제사하고,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수레 안에서 사망했다.
순군부는 고려 전기의 군사기구이다. 군사 업무를 담당하던 병부가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순군부가 설치되어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것은 많은 사병을 거느린 호족들이 발호하던 시대적인 상황에 기인하였다. 순군부는 병부보다 상위의 정치 조직이었으며, 경종 때까지 그 위상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성종 때 군사제도가 2군 6위로 정착되면서 순군부의 역할이 약화하여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순군부 (徇軍府)
순군부는 고려 전기의 군사기구이다. 군사 업무를 담당하던 병부가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순군부가 설치되어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것은 많은 사병을 거느린 호족들이 발호하던 시대적인 상황에 기인하였다. 순군부는 병부보다 상위의 정치 조직이었으며, 경종 때까지 그 위상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성종 때 군사제도가 2군 6위로 정착되면서 순군부의 역할이 약화하여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예종은 고려 전기 제1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105~1122년이며, 숙종의 맏아들이다.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여진정벌에 힘썼다. 윤관·오연총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쳐서 대파하게 하고, 정복 지역에 구성을 설치했다가 1년 만에 구성을 철폐하고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여진의 금나라, 거란의 요나라 사이에서는 대체로 중립 외교를 펼쳤다. 국학에 학과별 전문 강좌인 칠재를 설치하고 양현고라는 장학재단을 두었으며, 이름난 선비를 뽑아 학관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여 유학을 크게 일으켰다. 송의 궁중에서 쓰던 대성악을 들여왔다.
예종 (睿宗)
예종은 고려 전기 제1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105~1122년이며, 숙종의 맏아들이다.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여진정벌에 힘썼다. 윤관·오연총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쳐서 대파하게 하고, 정복 지역에 구성을 설치했다가 1년 만에 구성을 철폐하고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여진의 금나라, 거란의 요나라 사이에서는 대체로 중립 외교를 펼쳤다. 국학에 학과별 전문 강좌인 칠재를 설치하고 양현고라는 장학재단을 두었으며, 이름난 선비를 뽑아 학관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여 유학을 크게 일으켰다. 송의 궁중에서 쓰던 대성악을 들여왔다.
지유는 고려시대 특수부대 및 단위 조직의 지휘관이다. 별무반·5군·금군·별초군 등의 특수부대 및 자문·군기감·장야서·도교서 등 단위 조직에 속한 일부 공장에도 주어졌다. 낭장·별장·산원 등 중하위 무관들이 주로 이에 보임되었다. 이들의 역할에서 볼 때 주로 신뢰할 만하거나 충성심이 높은 자들이 임명되었고, 정권 변동에서 이들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하였다.
지유 (指諭)
지유는 고려시대 특수부대 및 단위 조직의 지휘관이다. 별무반·5군·금군·별초군 등의 특수부대 및 자문·군기감·장야서·도교서 등 단위 조직에 속한 일부 공장에도 주어졌다. 낭장·별장·산원 등 중하위 무관들이 주로 이에 보임되었다. 이들의 역할에서 볼 때 주로 신뢰할 만하거나 충성심이 높은 자들이 임명되었고, 정권 변동에서 이들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하였다.
지채문은 고려 전기에 우상시, 상장군, 우복야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그의 관직이 중랑장에서 상장군까지 확인되는데, 이는 그가 하위 무관에서 출세했던 인물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거란과의 2차 전쟁을 직접 경험하였고, 현종의 나주 몽진을 자청해서 호종하였다. 국왕 일행이 여러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면서 최종 목적지였던 나주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지채문 등 국왕을 호위했던 관료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채문 (智蔡文)
지채문은 고려 전기에 우상시, 상장군, 우복야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그의 관직이 중랑장에서 상장군까지 확인되는데, 이는 그가 하위 무관에서 출세했던 인물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거란과의 2차 전쟁을 직접 경험하였고, 현종의 나주 몽진을 자청해서 호종하였다. 국왕 일행이 여러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면서 최종 목적지였던 나주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지채문 등 국왕을 호위했던 관료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척준경은 고려 전기에 이부상서 참지정사,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관리이다. 가난하여 학문을 닦지 못하고 무뢰배들과 교유하다가 후에 숙종으로 즉위한 계림군을 추종하는 자가 되어 무관의 길을 걸었다. 윤관을 따라 동여진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인종의 묵인 아래 이자겸 제거 거사가 일어나자 이자겸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궁궐을 불사르고 진압하였다. 이후 인종의 설득으로 이자겸 제거에 앞장섰고,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인종이 그의 왕실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복권시켰으나 얼마 후 사망하였다.
척준경 (拓俊京)
척준경은 고려 전기에 이부상서 참지정사,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관리이다. 가난하여 학문을 닦지 못하고 무뢰배들과 교유하다가 후에 숙종으로 즉위한 계림군을 추종하는 자가 되어 무관의 길을 걸었다. 윤관을 따라 동여진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인종의 묵인 아래 이자겸 제거 거사가 일어나자 이자겸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궁궐을 불사르고 진압하였다. 이후 인종의 설득으로 이자겸 제거에 앞장섰고,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인종이 그의 왕실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복권시켰으나 얼마 후 사망하였다.
화통도감은 고려말 화약·화기의 제조를 맡아보던 임시 관청이다. 1377년(우왕 3)에 최무선의 건의로 설치된 것이다. 최무선은 고려말 횡행하던 왜구를 격멸하는 데 화약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원나라 염초 기술자 이원으로부터 화약을 제조하는 법을 배워 국가에 건의해서 화통도감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화통도감에서 개발한 20여 종의 화기들은 왜구들과의 전투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화통도감 (火筒都監)
화통도감은 고려말 화약·화기의 제조를 맡아보던 임시 관청이다. 1377년(우왕 3)에 최무선의 건의로 설치된 것이다. 최무선은 고려말 횡행하던 왜구를 격멸하는 데 화약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원나라 염초 기술자 이원으로부터 화약을 제조하는 법을 배워 국가에 건의해서 화통도감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화통도감에서 개발한 20여 종의 화기들은 왜구들과의 전투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희종은 고려 후기 제21대(재위: 1204~1211) 왕이다. 그는 제20대 신종(神宗)의 맏아들로서 1181년(명종 11)에 태어나서 1200년(신종 3)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24세 되던 해에 신종의 선양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는 이미 최충헌의 정치적 기반이 확고해질 무렵이었고 그가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되었다. 그는 왕권의 제약과 국왕 교체의 위협 속에 1211년(희종 7) 최충헌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실패하여 폐위되었다.
희종 (熙宗)
희종은 고려 후기 제21대(재위: 1204~1211) 왕이다. 그는 제20대 신종(神宗)의 맏아들로서 1181년(명종 11)에 태어나서 1200년(신종 3)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24세 되던 해에 신종의 선양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는 이미 최충헌의 정치적 기반이 확고해질 무렵이었고 그가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되었다. 그는 왕권의 제약과 국왕 교체의 위협 속에 1211년(희종 7) 최충헌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실패하여 폐위되었다.
김용재는 1258년(고종 45) 무오정변(戊午政變)에 참여하여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을 거처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된 무신이다. 무오정변은 김인준(金仁俊)과 유경(柳璥) 등을 중심으로 최씨 무신 정권의 4대 집정자 최의(崔竩)를 제거하여 왕정복고를 이룬 정변을 가리킨다. 김용재는 김준의 아들이며, 전전승지동정(殿前承旨同正)으로 정변에 참여였다. 이후 김주(金柱)로 개명하고서 김준 집권기에 권력을 남용하다가 임연(林衍) 등의 무진정변 때 제거되었다.
김용재 (金用材)
김용재는 1258년(고종 45) 무오정변(戊午政變)에 참여하여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을 거처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된 무신이다. 무오정변은 김인준(金仁俊)과 유경(柳璥) 등을 중심으로 최씨 무신 정권의 4대 집정자 최의(崔竩)를 제거하여 왕정복고를 이룬 정변을 가리킨다. 김용재는 김준의 아들이며, 전전승지동정(殿前承旨同正)으로 정변에 참여였다. 이후 김주(金柱)로 개명하고서 김준 집권기에 권력을 남용하다가 임연(林衍) 등의 무진정변 때 제거되었다.
신윤화는 1258년(고종 45) 무오정변(戊午政變)에 참여하여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에 책록된 무신이다. 무오정변은 김인준(金仁俊)과 유경(柳璥) 등을 중심으로 최씨 무신 정권의 4대 집정자 최의(崔竩)를 제거하여 왕정복고를 이룬 정변을 가리킨다. 이때 신윤화는 정6품의 낭장(郎將)으로서 참여하여 이들을 보좌하였고, 그 공로로 정4품의 장군(將軍)이 되어 몽골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였다.
신윤화 (辛允和)
신윤화는 1258년(고종 45) 무오정변(戊午政變)에 참여하여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에 책록된 무신이다. 무오정변은 김인준(金仁俊)과 유경(柳璥) 등을 중심으로 최씨 무신 정권의 4대 집정자 최의(崔竩)를 제거하여 왕정복고를 이룬 정변을 가리킨다. 이때 신윤화는 정6품의 낭장(郎將)으로서 참여하여 이들을 보좌하였고, 그 공로로 정4품의 장군(將軍)이 되어 몽골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