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예지숙"
검색결과 총 65건
박치은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부인청년단 부단장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97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대한독립부인청년단 부단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수감된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구호하는 활동 등을 하였다. 1921년 4월 단원들과 함께 검거되었으며, 1922년 4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박치은 (朴致恩)
박치은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부인청년단 부단장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97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대한독립부인청년단 부단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수감된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구호하는 활동 등을 하였다. 1921년 4월 단원들과 함께 검거되었으며, 1922년 4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안애자는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 진남포지회 회장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5월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 진남포지회를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 외 민립대학설립운동, 근우회, 신간회 등에 참여하였으며, 진남포 지역 사회사업에도 헌신하였다.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안애자 (安愛慈)
안애자는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 진남포지회 회장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5월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 진남포지회를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 외 민립대학설립운동, 근우회, 신간회 등에 참여하였으며, 진남포 지역 사회사업에도 헌신하였다.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안정석은 일제강점기 비밀결사 송죽회, 대한애국부인회 등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금,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감리교 신도로 전도 활동을 하다가 1913년 송죽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3·1운동 당시 숭의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고 격문을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대한애국부인회의 회장을 역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안정석 (安貞錫)
안정석은 일제강점기 비밀결사 송죽회, 대한애국부인회 등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금,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감리교 신도로 전도 활동을 하다가 1913년 송죽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3·1운동 당시 숭의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고 격문을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대한애국부인회의 회장을 역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양제현은 일제강점기 미주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대한여자애국단 등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92년에 태어났으며, 출신지는 미상이다. 대한인국민회 후원과 일화 배척을 목적으로 조직된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미주 지역 여성 단체들이 연합하여 조직한 대한여자애국단에도 참여하였다. 본부와 샌프란시스코지부에서 회장과 위원을 역임하면서 한인 여성 사회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양제현 (梁齊賢)
양제현은 일제강점기 미주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대한여자애국단 등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92년에 태어났으며, 출신지는 미상이다. 대한인국민회 후원과 일화 배척을 목적으로 조직된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미주 지역 여성 단체들이 연합하여 조직한 대한여자애국단에도 참여하였다. 본부와 샌프란시스코지부에서 회장과 위원을 역임하면서 한인 여성 사회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겸양은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 활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6월 한영신 등과 장로교계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11월 감리교파 애국부인회와 통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가 출범하자, 서기를 맡아 활동하였다. 1919년 말 목포 정명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으며, 재직 중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탁아소 설립 사업에도 참여하는 등 사회사업을 하였다.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겸양 (李謙良)
이겸양은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 활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6월 한영신 등과 장로교계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11월 감리교파 애국부인회와 통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가 출범하자, 서기를 맡아 활동하였다. 1919년 말 목포 정명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으며, 재직 중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탁아소 설립 사업에도 참여하는 등 사회사업을 하였다.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석담은 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 의병에게 숙식과 자금을 지원하고, 임시은사금 지급을 거부한 여성 항일운동가이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에 반발하여 정미의병이 봉기하였을 때, 황해도 평산군에서 의병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자금을 지원하였다. 평산 지역의 유서 깊은 양반가 안주인이었으며, 지역 주민들과 함께 의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한일합병 후에도 일제가 민심 수습 차원에서 지급한 임시은사금을 거부하는 등 저항 의식을 보여주었다.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석담 (李石潭)
이석담은 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 의병에게 숙식과 자금을 지원하고, 임시은사금 지급을 거부한 여성 항일운동가이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에 반발하여 정미의병이 봉기하였을 때, 황해도 평산군에서 의병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자금을 지원하였다. 평산 지역의 유서 깊은 양반가 안주인이었으며, 지역 주민들과 함께 의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한일합병 후에도 일제가 민심 수습 차원에서 지급한 임시은사금을 거부하는 등 저항 의식을 보여주었다.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인순은 일제강점기에 여성 교육에 힘쓰고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큰딸로, 1893년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일원으로 가족들과 함께 조국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다. 할아버지 이발, 아버지 이동휘, 남편 정창빈, 동생 이의순, 동생의 남편 오영선도 모두 독립운동가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계 여학교에서 근대 교육을 받았고, 이후 함흥, 성진, 북간도 등지에서 여성 교육에 힘썼다. 1919년 블리다보스톡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인순 (李仁橓)
이인순은 일제강점기에 여성 교육에 힘쓰고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큰딸로, 1893년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일원으로 가족들과 함께 조국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다. 할아버지 이발, 아버지 이동휘, 남편 정창빈, 동생 이의순, 동생의 남편 오영선도 모두 독립운동가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계 여학교에서 근대 교육을 받았고, 이후 함흥, 성진, 북간도 등지에서 여성 교육에 힘썼다. 1919년 블리다보스톡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화숙은 일제강점기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을 역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9월 대한애국부인회 2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민족대표 30명에 여성 대표로 참여하였다. 대한적십자회 부설 간호원양성소에서 간호사 교육을 이수하기도 하였다. 1920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화숙 (李華淑)
이화숙은 일제강점기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을 역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9월 대한애국부인회 2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민족대표 30명에 여성 대표로 참여하였다. 대한적십자회 부설 간호원양성소에서 간호사 교육을 이수하기도 하였다. 1920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임메불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여자애국단, 대한인국민회 등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84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미국 각지의 부인회를 통합하여 출범한 대한여자애국단의 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 동포 구제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임메불 (林메불)
임메불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여자애국단, 대한인국민회 등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84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미국 각지의 부인회를 통합하여 출범한 대한여자애국단의 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 동포 구제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조애실은 일제강점기 여성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문맹 퇴치에 힘쓴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32년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태어났으며, 1940년 아오지탄광 광산촌에 야학을 설치하여 부녀자들의 문맹 퇴치에 힘썼다. 1942년 서울로 상경하였고, 교회에서 알게 된 여성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글자를 공부하도록 권유하였다. 1944년부터는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며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조애실 (趙愛實)
조애실은 일제강점기 여성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문맹 퇴치에 힘쓴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32년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태어났으며, 1940년 아오지탄광 광산촌에 야학을 설치하여 부녀자들의 문맹 퇴치에 힘썼다. 1942년 서울로 상경하였고, 교회에서 알게 된 여성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글자를 공부하도록 권유하였다. 1944년부터는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며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차보석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여자애국단 단장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92년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에서 재상해유일학생회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흥사단에도 가담하였다. 이후 도미하여 대한여자애국단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여성 이민 사회의 지도자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과 구제 활동, 동포 사회 계몽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차보석 (車寶錫)
차보석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여자애국단 단장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92년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에서 재상해유일학생회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흥사단에도 가담하였다. 이후 도미하여 대한여자애국단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여성 이민 사회의 지도자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과 구제 활동, 동포 사회 계몽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최서경은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에서 상해한인애국부인회 집사를 맡아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났으며, 남편은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에 조력한 김홍일이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상해한인애국부인회 집사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3·1운동 기념일, 8·29 경술국치 기념일에 전단을 배포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2년 2월 상하이사변으로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국군 부상 병사에게 위문품을 보내기도 하였다. 1955년 사망하였으며,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최서경 (崔曙卿)
최서경은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에서 상해한인애국부인회 집사를 맡아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났으며, 남편은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에 조력한 김홍일이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상해한인애국부인회 집사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3·1운동 기념일, 8·29 경술국치 기념일에 전단을 배포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2년 2월 상하이사변으로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국군 부상 병사에게 위문품을 보내기도 하였다. 1955년 사망하였으며,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최예근은 일제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 자금과 연락문 등을 전달하며 항일 활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24년 8월 충청남도 서산군에서 태어났다. 1935년 10월 중국 펑톈 서탑신사 방화사건 때 어머니 정신기와 현장에 간 혐의로 체포되어 2주일간 구류되었다. 이후 1940년 일제의 감시를 피해 펑톈에서 사평가로 이주하였다. 1940년 7월 독립운동 관련 연락문과 군자금 등을 전달하기 위해 펑톈행 열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으며, 2011년 사망하였다.
최예근 (崔禮根)
최예근은 일제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 자금과 연락문 등을 전달하며 항일 활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24년 8월 충청남도 서산군에서 태어났다. 1935년 10월 중국 펑톈 서탑신사 방화사건 때 어머니 정신기와 현장에 간 혐의로 체포되어 2주일간 구류되었다. 이후 1940년 일제의 감시를 피해 펑톈에서 사평가로 이주하였다. 1940년 7월 독립운동 관련 연락문과 군자금 등을 전달하기 위해 펑톈행 열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으며, 2011년 사망하였다.
기생은 국가 의례나 궁중의 연회에서 여악을 담당한 전문 예술가로 활동한 여성들을 말한다. 전근대시대에 기생의 성 접대는 공식적인 업무가 아니었지만, 활동 전반에 성 접대가 매개되어 있었다. 근대사회에 들어 조선총독부는 성매매를 겸하면서 유흥업을 하는 여성으로 기생을 규정하여 이들을 등록하고 관리하였다. 기생들은 사회의 선량한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혐오의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 활동을 전개하였고 민족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성매매와 유흥을 기생과 연결시키는 인식은 현대사회에 더욱 강화되었다.
기생 (妓生)
기생은 국가 의례나 궁중의 연회에서 여악을 담당한 전문 예술가로 활동한 여성들을 말한다. 전근대시대에 기생의 성 접대는 공식적인 업무가 아니었지만, 활동 전반에 성 접대가 매개되어 있었다. 근대사회에 들어 조선총독부는 성매매를 겸하면서 유흥업을 하는 여성으로 기생을 규정하여 이들을 등록하고 관리하였다. 기생들은 사회의 선량한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혐오의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 활동을 전개하였고 민족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성매매와 유흥을 기생과 연결시키는 인식은 현대사회에 더욱 강화되었다.
모자원은 한국전쟁의 피해자인 전쟁미망인과 그의 부양가족을 돌보기 위해 설치한 구호 시설이다. 모자원 설립을 위한 재정은 외국 원조 기관의 도움을 통해 마련하였다. 50만 명에 달하는 전쟁미망인 중 수혜를 받은 사람이 1% 정도에 불과했다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도 있다. 모자원은 전쟁 후 복구기를 지나 1960년대 들어서면서 도시 빈민 여성과 성매매 여성을 대상으로 운영되었다.
모자원 (母子院)
모자원은 한국전쟁의 피해자인 전쟁미망인과 그의 부양가족을 돌보기 위해 설치한 구호 시설이다. 모자원 설립을 위한 재정은 외국 원조 기관의 도움을 통해 마련하였다. 50만 명에 달하는 전쟁미망인 중 수혜를 받은 사람이 1% 정도에 불과했다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도 있다. 모자원은 전쟁 후 복구기를 지나 1960년대 들어서면서 도시 빈민 여성과 성매매 여성을 대상으로 운영되었다.
보모는 육아 교육 기관 등지에서 어린이를 돌보고 교육하는 여성을 말한다. 전통 시대에 왕실 자녀의 양육을 맡은 궁녀에게 일정한 관직을 주었던 일은 고려시대부터 확인된다. 조선시대에는 원자, 대군, 왕자, 공주 등 왕실의 어린 구성원을 양육하기 위하여 보모 상궁이나 보모를 두었다. 근대 이후 유치원이 설립되면서 보모는 유치원 교사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현재에는 보육원, 탁아소 등에서 어린이를 돌보며 가르치는 여성을 두루 지칭한다.
보모 (保姆)
보모는 육아 교육 기관 등지에서 어린이를 돌보고 교육하는 여성을 말한다. 전통 시대에 왕실 자녀의 양육을 맡은 궁녀에게 일정한 관직을 주었던 일은 고려시대부터 확인된다. 조선시대에는 원자, 대군, 왕자, 공주 등 왕실의 어린 구성원을 양육하기 위하여 보모 상궁이나 보모를 두었다. 근대 이후 유치원이 설립되면서 보모는 유치원 교사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현재에는 보육원, 탁아소 등에서 어린이를 돌보며 가르치는 여성을 두루 지칭한다.
문일평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사학자 겸 언론인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조선일보』 편집고문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한국사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제에 의해 국학 연구의 기초가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 연구를 통해 언외(言外)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문일평 (文一平)
문일평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사학자 겸 언론인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조선일보』 편집고문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한국사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제에 의해 국학 연구의 기초가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 연구를 통해 언외(言外)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박애는 일제강점기 한인사회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중진을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다. 그는 귀화한 한인 사회주의자이며, 러시아혁명 초기 극동소비에트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혁명기구원회(모플) 극동부장, 코민테른 동양위원부 한국위원, 소련공산당 연해주위원회 약소민족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박애 (朴愛)
박애는 일제강점기 한인사회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중진을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다. 그는 귀화한 한인 사회주의자이며, 러시아혁명 초기 극동소비에트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혁명기구원회(모플) 극동부장, 코민테른 동양위원부 한국위원, 소련공산당 연해주위원회 약소민족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박창극은 일제강점기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한 한국인 사회주의 운동가로, 고려혁명군정의회 정치부 비서, 러시아공산당 수찬군당위원회 조선분과장을 지냈다. 고려공산당 창립준비대표회 준비위원회 참여하였으며, 소련공산당 블라디보스토크위원회 산하에 민족정치국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박창극 (朴昌極)
박창극은 일제강점기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한 한국인 사회주의 운동가로, 고려혁명군정의회 정치부 비서, 러시아공산당 수찬군당위원회 조선분과장을 지냈다. 고려공산당 창립준비대표회 준비위원회 참여하였으며, 소련공산당 블라디보스토크위원회 산하에 민족정치국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박창은은 러시아 극동국 한인부에서 활동하고 대한의용군 결성에 참여하고 대한국민의회 비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이명은 박이반이며, 1920년 12월부터 러시아 '극동국 한인부’ 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초에 러시아령에서 소집된 전한의병대회와 대한의용단 결성에 참여하였다.
박창은 (朴昌殷)
박창은은 러시아 극동국 한인부에서 활동하고 대한의용군 결성에 참여하고 대한국민의회 비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이명은 박이반이며, 1920년 12월부터 러시아 '극동국 한인부’ 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초에 러시아령에서 소집된 전한의병대회와 대한의용단 결성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