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윤상현"
검색결과 총 23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남로당의 핵심간부 김삼룡과 이주하가 벌인 일련의 사건 및 체포 과정.
김삼룡·이주하 사건 (金三龍·李舟河 事件)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남로당의 핵심간부 김삼룡과 이주하가 벌인 일련의 사건 및 체포 과정.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에서 6개 남녀중학교 학생들이 벌인 반소(反蘇)·반김일성(反金日成) 시위.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新義州 反共學生義擧)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에서 6개 남녀중학교 학생들이 벌인 반소(反蘇)·반김일성(反金日成) 시위.
해방 이후 국방부차관, 교통부차관, 보사부장관 등을 역임한 관료. 정치가.
이경호 (李坰鎬)
해방 이후 국방부차관, 교통부차관, 보사부장관 등을 역임한 관료. 정치가.
1942년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개편하여 결성된 사회주의 단체.
조선독립동맹 (朝鮮獨立同盟)
1942년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개편하여 결성된 사회주의 단체.
해방 이후 한국은행 조사부장, 한국은행 부총재 등을 역임한 금융인. 언론인, 정치인.
장기영 (張基榮)
해방 이후 한국은행 조사부장, 한국은행 부총재 등을 역임한 금융인. 언론인, 정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의 좌익정당.
조선민족혁명당 (朝鮮民族革命黨)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의 좌익정당.
1945년 8·15 해방 직후 조직되었던 단체.
조선인민공화국 (朝鮮人民共和國)
1945년 8·15 해방 직후 조직되었던 단체.
1945년 해방 직후 여운형이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던 중도좌파 계열의 정치정당.
조선인민당 (朝鮮人民黨)
1945년 해방 직후 여운형이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던 중도좌파 계열의 정치정당.
자유당 정권이 1958년 12월 24일 국회에서 야당의원들을 폭력으로 몰아내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여러 법안들을 통과시킨 일련의 정치사건.
2·4파동 (二四波動)
자유당 정권이 1958년 12월 24일 국회에서 야당의원들을 폭력으로 몰아내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여러 법안들을 통과시킨 일련의 정치사건.
해방 이후 서울특별시장, 외무부장관 , 국민의 당 대표최고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허정 (許政)
해방 이후 서울특별시장, 외무부장관 , 국민의 당 대표최고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일제강점기 때, 변호사로 활동하며 노동자, 빈민층을 변호하였으며, 해방 이후 월북하여, 김일성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정치인·독립운동가.
허헌 (許憲)
일제강점기 때, 변호사로 활동하며 노동자, 빈민층을 변호하였으며, 해방 이후 월북하여, 김일성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정치인·독립운동가.
해방 이후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의장, 세계종교인평화회의 공동의장 등을 역임한 목사. 교육자, 사회운동가.
강원용 (姜元龍)
해방 이후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의장, 세계종교인평화회의 공동의장 등을 역임한 목사. 교육자, 사회운동가.
제2대 국회 무소속의원들의 무소속구락부가 1951년 1·4후퇴 이후 결성한 국회교섭단체.
공화구락부 (共和俱樂部)
제2대 국회 무소속의원들의 무소속구락부가 1951년 1·4후퇴 이후 결성한 국회교섭단체.
공화민정회는 1951년 5월, 제2대 국회에서 공화구락부와 신정동지회가 결합하여 구성한 교섭단체이다. 당시 국회에서 교섭단체를 구성할 때 민정동지회와 국민구락부가 통합하여 70명의 신정동지회가 발족되었다. 신정동지회를 견제하기 위해 의석이 적은 민주국민당과 공화구락부가 제휴하였는데 민주국민당이 요직을 독점하였다. 공화구락부는 반이승만세력과 합동하려는 신정동지회와 결합하여 신당을 결성하려고 하였다. 이승만은 공화민정회에 원외세력과 합동을 제안하여 신당의 성격을 바꾸려 시도하였으나 합동이 결렬되었다. 이승만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공화민정회의 신당 결성을 방해하였다.
공화민정회 (共和民政會)
공화민정회는 1951년 5월, 제2대 국회에서 공화구락부와 신정동지회가 결합하여 구성한 교섭단체이다. 당시 국회에서 교섭단체를 구성할 때 민정동지회와 국민구락부가 통합하여 70명의 신정동지회가 발족되었다. 신정동지회를 견제하기 위해 의석이 적은 민주국민당과 공화구락부가 제휴하였는데 민주국민당이 요직을 독점하였다. 공화구락부는 반이승만세력과 합동하려는 신정동지회와 결합하여 신당을 결성하려고 하였다. 이승만은 공화민정회에 원외세력과 합동을 제안하여 신당의 성격을 바꾸려 시도하였으나 합동이 결렬되었다. 이승만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공화민정회의 신당 결성을 방해하였다.
신정회는 제헌국회에서 활동한 군소 정파이다. 민족청년단을 기초로 1948년 결성된 청구회를 기반으로 한다. 민족청년단 해체, 일민구락부 탄생을 계기로 1949년 5월 7일 신정회가 탄생하였다. 대중 정치를 표방하며 월간지 『신정』을 발간하였다. '정치적 자유', '경제적 향상', '진정한 민족적 민주사회 건설'을 당면 과제로 내세웠다. 중간파의 남북 협상에 의한 평화통일론, 이승만 한민당의 북진통일론을 모두 비판하였다. 1950년 1월 신정회원 전원이 대한국민당으로 통합되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을 계기로 보수화하였으나 점진적이고 온건한 통일론을 주장하였다.
신정회 (新政會)
신정회는 제헌국회에서 활동한 군소 정파이다. 민족청년단을 기초로 1948년 결성된 청구회를 기반으로 한다. 민족청년단 해체, 일민구락부 탄생을 계기로 1949년 5월 7일 신정회가 탄생하였다. 대중 정치를 표방하며 월간지 『신정』을 발간하였다. '정치적 자유', '경제적 향상', '진정한 민족적 민주사회 건설'을 당면 과제로 내세웠다. 중간파의 남북 협상에 의한 평화통일론, 이승만 한민당의 북진통일론을 모두 비판하였다. 1950년 1월 신정회원 전원이 대한국민당으로 통합되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을 계기로 보수화하였으나 점진적이고 온건한 통일론을 주장하였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 적십자회 위원장, 의학과학원 부원장 등을 역임한 의료인.
이병남 (李炳南)
해방 이후 북한에서 적십자회 위원장, 의학과학원 부원장 등을 역임한 의료인.
임정봉대론은 해방 직후 중경임시정부가 유일한 정권 수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한민당계 및 임정계열 인사들이 추진한 운동이다. 해방 직후 송진우는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를 정통으로 환영 추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구 및 임정 세력도 환국과 함께 특별정치위원회를 조직하여 독자적으로 행보하였다. 1947년에 조직한 국민회의를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기관으로 천명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봉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한민당의 입장 보류와 김구의 남한단독선거반대와 남북협상 추진으로 임정법통론을 포기하게 되었다.
임정봉대론 (臨政奉戴論)
임정봉대론은 해방 직후 중경임시정부가 유일한 정권 수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한민당계 및 임정계열 인사들이 추진한 운동이다. 해방 직후 송진우는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를 정통으로 환영 추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구 및 임정 세력도 환국과 함께 특별정치위원회를 조직하여 독자적으로 행보하였다. 1947년에 조직한 국민회의를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기관으로 천명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봉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한민당의 입장 보류와 김구의 남한단독선거반대와 남북협상 추진으로 임정법통론을 포기하게 되었다.
전시연합대학은 문교부령 제19호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에 따라 한국전쟁 중인 1951년 2월 설립된 종합대학 성격의 전시 대학연합체이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대학 교실 등이 파괴되어 정상적인 대학교육이 어렵게 되었다. 1950년 11월 문교 당국은 서울 시내에 있었던 31개의 공사립대학을 망라하여 단일연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51년 1월에 부산으로 환도한 이후 2월에 부산에서 개강하였으며 대전, 전북, 광주의 전시연합대학에도 학생들이 등록하였다. 전란 중에 대학 고등교육의 연속성을 제고하였다는 점에서 교육사적 의의가 크다.
전시연합대학 (戰時聯合大學)
전시연합대학은 문교부령 제19호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에 따라 한국전쟁 중인 1951년 2월 설립된 종합대학 성격의 전시 대학연합체이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대학 교실 등이 파괴되어 정상적인 대학교육이 어렵게 되었다. 1950년 11월 문교 당국은 서울 시내에 있었던 31개의 공사립대학을 망라하여 단일연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51년 1월에 부산으로 환도한 이후 2월에 부산에서 개강하였으며 대전, 전북, 광주의 전시연합대학에도 학생들이 등록하였다. 전란 중에 대학 고등교육의 연속성을 제고하였다는 점에서 교육사적 의의가 크다.
문총구국대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조직한 국군 사기 앙양 단체이다. 1947년 33개 문화단체들이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이하 문총)를 결성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은 비상국민선전대를 조직했다가 문총구국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문총구국대는 국군 정훈국 소속 하에서 육군종군작가단, 해군종군작가단, 공군종군문인단 등으로 나누어 활동했다. 서울 수복 이후 유엔군과 국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자 정훈국과 제휴하여 문인들이 종군을 자원했다. 1·4후퇴 당시에는 대구에 모인 문인들을 중심으로 종군문인단을 결성하여 휴전시까지 활동했다.
문총구국대 (文總救國隊)
문총구국대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조직한 국군 사기 앙양 단체이다. 1947년 33개 문화단체들이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이하 문총)를 결성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은 비상국민선전대를 조직했다가 문총구국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문총구국대는 국군 정훈국 소속 하에서 육군종군작가단, 해군종군작가단, 공군종군문인단 등으로 나누어 활동했다. 서울 수복 이후 유엔군과 국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자 정훈국과 제휴하여 문인들이 종군을 자원했다. 1·4후퇴 당시에는 대구에 모인 문인들을 중심으로 종군문인단을 결성하여 휴전시까지 활동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결성되어, 대한국민당에 흡수된 정당.
대한노농당 (大韓勞農黨)
1948년 제헌국회에서 결성되어, 대한국민당에 흡수된 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