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이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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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량서당은 20세기 초 교육 근대화의 흐름에 따라 이전부터 존재했던 서당을 시대에 맞게 개조한 비제도적 교육기관을 일컫는다. 한학 공부를 중심으로 운영된 초중등 단계의 서당을 근대적 교육내용이나 교육시설로 개량해 운영했던 초등단계의 교육시설이다. 서당은 식민정부의 통제가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교육기관에서 조선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교육적 요구를 충족시켜 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서당은 조선총독부의 엄격한 관리 아래 두어졌고 개량서당은 초등교육인구 확대를 위한 식민정책의 한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개량서당 (改良書堂)
개량서당은 20세기 초 교육 근대화의 흐름에 따라 이전부터 존재했던 서당을 시대에 맞게 개조한 비제도적 교육기관을 일컫는다. 한학 공부를 중심으로 운영된 초중등 단계의 서당을 근대적 교육내용이나 교육시설로 개량해 운영했던 초등단계의 교육시설이다. 서당은 식민정부의 통제가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교육기관에서 조선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교육적 요구를 충족시켜 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서당은 조선총독부의 엄격한 관리 아래 두어졌고 개량서당은 초등교육인구 확대를 위한 식민정책의 한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경성공업전문학교는 1916년 경성부 동숭동에 설립되었던 관립 공업 전문학교이다. 1915년 3월 「전문학교규칙」의 제정·공포에 따른 후속 조치로 설립되었다. 이를 위해 1916년 4월 1일 칙령 제80호 및 부령 제28호로 이루어진 전 8조의 「경성공업전문학교규정」이 발포되었다. 1922년 3월 「조선총독부제학교관제」에 따라 경성공업전문학교는 경성고등공업학교가 되었다. 경성고등공업학교는 1944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따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흡수되었다.
경성공업전문학교 (京城工業專門學校)
경성공업전문학교는 1916년 경성부 동숭동에 설립되었던 관립 공업 전문학교이다. 1915년 3월 「전문학교규칙」의 제정·공포에 따른 후속 조치로 설립되었다. 이를 위해 1916년 4월 1일 칙령 제80호 및 부령 제28호로 이루어진 전 8조의 「경성공업전문학교규정」이 발포되었다. 1922년 3월 「조선총독부제학교관제」에 따라 경성공업전문학교는 경성고등공업학교가 되었다. 경성고등공업학교는 1944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따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흡수되었다.
경성광산전문학교는 1939년 경성부 동숭동에 설립되었던 관립 전문학교이다. 전쟁에 필요한 광물자원을 원활히 보급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과를 분리, 독립하여 경성광산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채광학과와 야금학과, 광산기계학과 등 3개 학과를 설치하였으며, 수업연한은 3년이었다. 졸업생들은 전원 국영 광산의 간부로 우선 채용되었기 때문에, 취직이 어려웠던 전시체제 아래에서 최고의 입시 경쟁률을 보였다.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이 공포됨에 따라 경성광산전문학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흡수되었다.
경성광산전문학교 (京城鑛山專門學校)
경성광산전문학교는 1939년 경성부 동숭동에 설립되었던 관립 전문학교이다. 전쟁에 필요한 광물자원을 원활히 보급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과를 분리, 독립하여 경성광산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채광학과와 야금학과, 광산기계학과 등 3개 학과를 설치하였으며, 수업연한은 3년이었다. 졸업생들은 전원 국영 광산의 간부로 우선 채용되었기 때문에, 취직이 어려웠던 전시체제 아래에서 최고의 입시 경쟁률을 보였다.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이 공포됨에 따라 경성광산전문학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흡수되었다.
경성법학전문학교는 1922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법관 양성 전문학교이다. 1911년에 설치된 경성전수학교가 「전문학교규칙」에 따라 전문학교급으로 운영되다가, 1922년 교명을 경성법학전문학교로 바꾸면서 공식적인 전문학교가 되었다. 경성전수학교와 달리 일본인 학생의 입학도 허용하였다. 1944년 경성고등상업학교와 통합하여 경성경제전문학교가 되었고, 8·15광복 직후 경성법학전문학교와 서울법정학교로 분리되었다. 이후 경성법학전문학교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계열로 흡수되어 1946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이 되었다.
경성법학전문학교 (京城法學專門學校)
경성법학전문학교는 1922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법관 양성 전문학교이다. 1911년에 설치된 경성전수학교가 「전문학교규칙」에 따라 전문학교급으로 운영되다가, 1922년 교명을 경성법학전문학교로 바꾸면서 공식적인 전문학교가 되었다. 경성전수학교와 달리 일본인 학생의 입학도 허용하였다. 1944년 경성고등상업학교와 통합하여 경성경제전문학교가 되었고, 8·15광복 직후 경성법학전문학교와 서울법정학교로 분리되었다. 이후 경성법학전문학교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계열로 흡수되어 1946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이 되었다.
경성여자사범학교는 1935년 경성부 용두동에 설립되었던 소학교 및 보통학교의 여자 교원양성학교이다. 경성사범학교의 여자강습과를 이관받아 1936년 4월 1일부터 여자 초등교원 양성 교육을 시작하였다. 1941년도까지 관비생과 사비생으로 나누어 운영하다가, 1942년도 입학생부터는 전원 관비생으로 모집하였다. 졸업 후에는 연습과, 강습과의 관비생과 사비생 모두 2년 동안 의무복무를 하였다. 8·15광복 후 경성여자사범학교는 경성여자사범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1946년 경성사범대학과 함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통합, 개편되었다.
경성여자사범학교 (京城女子師範學校)
경성여자사범학교는 1935년 경성부 용두동에 설립되었던 소학교 및 보통학교의 여자 교원양성학교이다. 경성사범학교의 여자강습과를 이관받아 1936년 4월 1일부터 여자 초등교원 양성 교육을 시작하였다. 1941년도까지 관비생과 사비생으로 나누어 운영하다가, 1942년도 입학생부터는 전원 관비생으로 모집하였다. 졸업 후에는 연습과, 강습과의 관비생과 사비생 모두 2년 동안 의무복무를 하였다. 8·15광복 후 경성여자사범학교는 경성여자사범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1946년 경성사범대학과 함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통합, 개편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는 1916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의학전문학교이다. 1916년 4월 1일 칙령 제80호로 「조선총독부전문학교관제」가 발포되었고, 같은 해 조선총독부령 제27호로 「경성의학전문학교규칙」이 공포되어 설립되었다. 질병 진료에 관한 지식 기능을 구비한 의사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8·15광복 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따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합병되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안수경과 김해지, 김영흥 등이 1918년 졸업증서를 받아, 국내에서 의학교육을 받은 최초의 여의사들이 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京城醫學專門學校)
경성의학전문학교는 1916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의학전문학교이다. 1916년 4월 1일 칙령 제80호로 「조선총독부전문학교관제」가 발포되었고, 같은 해 조선총독부령 제27호로 「경성의학전문학교규칙」이 공포되어 설립되었다. 질병 진료에 관한 지식 기능을 구비한 의사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8·15광복 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따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합병되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안수경과 김해지, 김영흥 등이 1918년 졸업증서를 받아, 국내에서 의학교육을 받은 최초의 여의사들이 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1926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대학이다. 1924년 5월 1일 칙령 제103호로 「경성제국대학관제」가 공포되어 경성제국대학 직원과 총장의 역할 및 예과 설치가 확정되었다. 같은 날 발포된 칙령 제104호에는 경성제국대학 학부에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설치할 것과, 그 시작을 1926년 4월 1일로 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가 되었다.
경성제국대학 (京城帝國大學)
경성제국대학은 1926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대학이다. 1924년 5월 1일 칙령 제103호로 「경성제국대학관제」가 공포되어 경성제국대학 직원과 총장의 역할 및 예과 설치가 확정되었다. 같은 날 발포된 칙령 제104호에는 경성제국대학 학부에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설치할 것과, 그 시작을 1926년 4월 1일로 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가 되었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1929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사립 치과의사 양성 전문학교이다. 1929년 2월 조선총독부고시 제25호로 4년제 전문학교로서 설치 인가를 받아, 그해 4월에 개교하였다. 설립자는 재단법인 경성치과의학교이다. 조선인 치과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다는 처음 계획과 달리, 1945년까지 일본인 대비 조선인 졸업생은 약 1/3에 그쳤다.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치에관한법령」에 따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흡수되었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京城齒科醫學專門學校)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1929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사립 치과의사 양성 전문학교이다. 1929년 2월 조선총독부고시 제25호로 4년제 전문학교로서 설치 인가를 받아, 그해 4월에 개교하였다. 설립자는 재단법인 경성치과의학교이다. 조선인 치과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다는 처음 계획과 달리, 1945년까지 일본인 대비 조선인 졸업생은 약 1/3에 그쳤다.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치에관한법령」에 따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흡수되었다.
경신학교는 1905년 한성부 연지동에 설립되었던 증등 과정의 기독교계 사립학교이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가족·사회·국가·세계와 하나님께 봉사하며, 최대한도까지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고, 나아가서는 목회자 양성에 전력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39년 3월 김홍량이 교지와 교사를 매수하였으며, 1941년에 학교를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전하였다. 8·15광복 후 남북분단으로 김홍량이 학교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1946년 김규식이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51년에 3년제 경신고등학교와 경신중학교로 개편되었다.
경신학교 (儆新學校)
경신학교는 1905년 한성부 연지동에 설립되었던 증등 과정의 기독교계 사립학교이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가족·사회·국가·세계와 하나님께 봉사하며, 최대한도까지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고, 나아가서는 목회자 양성에 전력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39년 3월 김홍량이 교지와 교사를 매수하였으며, 1941년에 학교를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전하였다. 8·15광복 후 남북분단으로 김홍량이 학교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1946년 김규식이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51년에 3년제 경신고등학교와 경신중학교로 개편되었다.
고등소학독본은 1906년 11월과 1907년 1월 휘문의숙 편집부에서 자체 편찬하여 사용한 국한문체 민간 독본용 교과서이다. 2권 2책으로 출간되었으며, 1권은 1906년 11월에, 2권은 1907년 1월에 휘문관에서 인쇄되었고, 1908년) 4월에 재판으로 발행되었다.
고등소학독본 (高等小學讀本)
고등소학독본은 1906년 11월과 1907년 1월 휘문의숙 편집부에서 자체 편찬하여 사용한 국한문체 민간 독본용 교과서이다. 2권 2책으로 출간되었으며, 1권은 1906년 11월에, 2권은 1907년 1월에 휘문관에서 인쇄되었고, 1908년) 4월에 재판으로 발행되었다.
광무학교는 1900년 8월 광업 계통의 실업교육을 위해 한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학교이다. 광업 부문에서도 근대식 채굴 기술을 교육하여 전문적인 기술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사회적·현실적 요구에 따라 설치되었다. 농상공부의 광산국에 속하였고, 교장은 농상공부 광산국장 현상건이 맡았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에 따라 농상공부 고문으로 일본인이 부임하면서 광상조사 기술전습소가 설치되었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광무학교는 1907년에 폐교되었다.
광무학교 (磺務學校)
광무학교는 1900년 8월 광업 계통의 실업교육을 위해 한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학교이다. 광업 부문에서도 근대식 채굴 기술을 교육하여 전문적인 기술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사회적·현실적 요구에 따라 설치되었다. 농상공부의 광산국에 속하였고, 교장은 농상공부 광산국장 현상건이 맡았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에 따라 농상공부 고문으로 일본인이 부임하면서 광상조사 기술전습소가 설치되었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광무학교는 1907년에 폐교되었다.
명동학교는 1909년 4월 북간도에 설립되었던 민족교육기관이다. 1908년 북간도 화룡현 명동촌에 설립되었던 명동서숙을 기독교계 학교로 개편하면서 명동학교로 설립하였다.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 내용과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활동 등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았으며, 1925년에 폐교되었다.
명동학교 (明東學校)
명동학교는 1909년 4월 북간도에 설립되었던 민족교육기관이다. 1908년 북간도 화룡현 명동촌에 설립되었던 명동서숙을 기독교계 학교로 개편하면서 명동학교로 설립하였다.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 내용과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활동 등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았으며, 1925년에 폐교되었다.
법관양성소는 1895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법률가 양성기관이다. 갑오개혁 이후 당시 법무대신이었던 서광범이 새로운 사법제도 운영을 위해 법률학교 설치를 건의하면서, 1895년 3월 법률 제1호의 「재판소구성법」과 함께 제49호로 「법관양성소규정」이 공포되었다. 법관양성소는 근대적 법률 및 경제에 관한 전문교육을 실시하면서 우리나라 사법계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법관양성소 (法官養成所)
법관양성소는 1895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법률가 양성기관이다. 갑오개혁 이후 당시 법무대신이었던 서광범이 새로운 사법제도 운영을 위해 법률학교 설치를 건의하면서, 1895년 3월 법률 제1호의 「재판소구성법」과 함께 제49호로 「법관양성소규정」이 공포되었다. 법관양성소는 근대적 법률 및 경제에 관한 전문교육을 실시하면서 우리나라 사법계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대성중학교는 1921년,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촌에 설립된 민족계 사립 중등교육기관이다. 1921년 7월 21일 유교 및 청림교 신도와 지방 부호를 비롯해 조선 각지의 민중들에게서 희사받은 교사건축 기금으로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대성유교 공교회의 주도로 학교가 운영되었으나, 진보적인 학생들로 구성된 학우회를 중심으로 진보적 사상으로 교육내용이 변화되었다. 이후 진보적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일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선봉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성중학교 (大成中學校)
대성중학교는 1921년,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촌에 설립된 민족계 사립 중등교육기관이다. 1921년 7월 21일 유교 및 청림교 신도와 지방 부호를 비롯해 조선 각지의 민중들에게서 희사받은 교사건축 기금으로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대성유교 공교회의 주도로 학교가 운영되었으나, 진보적인 학생들로 구성된 학우회를 중심으로 진보적 사상으로 교육내용이 변화되었다. 이후 진보적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일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선봉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동흥중학교는 1921년,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에 설립된 민족계 사립 중등교육기관이다. 1921년 10월 1일 천도교 신자 최익룡이 용정에 설립했던 동흥소학에 병설된 중학강습반을 승격해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연변 각 지역에서 온 천도교인 자제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일부는 소련 연해주와 조선, 남만주 및 북만주에서 오기도 하였다.
동흥중학교 (東興中學校)
동흥중학교는 1921년,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에 설립된 민족계 사립 중등교육기관이다. 1921년 10월 1일 천도교 신자 최익룡이 용정에 설립했던 동흥소학에 병설된 중학강습반을 승격해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연변 각 지역에서 온 천도교인 자제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일부는 소련 연해주와 조선, 남만주 및 북만주에서 오기도 하였다.
명동여학교는 1911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학교에 병설되었던 민족계 여성교육기관이다. 1911년 이동휘가 길림성 화룡현 명동에 와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이전에 설립되었던 명동학교에 여학교를 병설하며 설립되었다. 1911년 2월 설립된 여성교육기관으로 개화운동, 민중운동, 민족교육운동을 실행하였다.
명동여학교 (明東女學敎)
명동여학교는 1911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학교에 병설되었던 민족계 여성교육기관이다. 1911년 이동휘가 길림성 화룡현 명동에 와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이전에 설립되었던 명동학교에 여학교를 병설하며 설립되었다. 1911년 2월 설립된 여성교육기관으로 개화운동, 민중운동, 민족교육운동을 실행하였다.
명신여학교는 1913년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에 설립한 기독교계 학교이다.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캐나다 장로파 선교사 박걸(朴傑, A.H.Barker)과 그의 부인 레베카가 조선인 소녀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기독교계 학교이다. 1920년 6월 중학교로 승격되어 명신여자중학교가 되었다. 1941년 설립자들이 용정에서 철수한 후, 1943년 다른 학교와 병합되었다가 1945년 다시 회복되었고, 1946년 다른 5개의 중학교와 함께 길림성립용정중학교가 되었다.
명신여학교 (明新女學敎)
명신여학교는 1913년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에 설립한 기독교계 학교이다.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캐나다 장로파 선교사 박걸(朴傑, A.H.Barker)과 그의 부인 레베카가 조선인 소녀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기독교계 학교이다. 1920년 6월 중학교로 승격되어 명신여자중학교가 되었다. 1941년 설립자들이 용정에서 철수한 후, 1943년 다른 학교와 병합되었다가 1945년 다시 회복되었고, 1946년 다른 5개의 중학교와 함께 길림성립용정중학교가 되었다.
문덕중학교는 1917년 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에 설립한 민족계 사립 중등교육기관이다. 전로한족회에 소속되었던 이대유, 김종, 윤창선, 남병규, 김립 등이 중심이 되어 러시아에 있는 한국인을 위해 설립하였다. 교육 내용은 민족 단결, 애국심 배양, 항일투쟁의식 함양,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문덕중학교 (文德中學校)
문덕중학교는 1917년 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에 설립한 민족계 사립 중등교육기관이다. 전로한족회에 소속되었던 이대유, 김종, 윤창선, 남병규, 김립 등이 중심이 되어 러시아에 있는 한국인을 위해 설립하였다. 교육 내용은 민족 단결, 애국심 배양, 항일투쟁의식 함양,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삼일공학학우회는 1925년,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삼일중학의 재학생이 조직한 학생운동 단체이다. 삼일중학은 한인과 중국인 남녀 학생 모두를 교육하는 기관이며, 초급 3학년, 고급 2학년제로 운영되었다. 재학생 중의 일부는 삼일공학학우회를 조직하여 상하이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던 한인학생운동에 참여하여 한국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민족통일전선을 구성하고자 했던 움직임에 적극 동참하였다.
삼일공학학우회 (三一公學學友會)
삼일공학학우회는 1925년,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삼일중학의 재학생이 조직한 학생운동 단체이다. 삼일중학은 한인과 중국인 남녀 학생 모두를 교육하는 기관이며, 초급 3학년, 고급 2학년제로 운영되었다. 재학생 중의 일부는 삼일공학학우회를 조직하여 상하이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던 한인학생운동에 참여하여 한국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민족통일전선을 구성하고자 했던 움직임에 적극 동참하였다.
은진중학교는 1920년 2월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에 설립된 기독교계 사립 중학교이다. 캐나다 장로파 선교사 부두일(富斗一, W.R.Foote)이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에 설립한 기독교계 사립 중학교이자 민족계 교육기관이다. 수업 과목은 자연과학을 위주로 하면서 성경 · 영어 · 한문 등을 교수하였다. 1942년 제3국민고등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광복 후인 1946년 2월 잠시 동안 은진중학교로 복귀하였으나, 같은 해 8월 인근 5개의 중학교와 통합하여 길림성립용정중학교가 되었다.
은진중학교 (恩眞中學敎)
은진중학교는 1920년 2월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에 설립된 기독교계 사립 중학교이다. 캐나다 장로파 선교사 부두일(富斗一, W.R.Foote)이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에 설립한 기독교계 사립 중학교이자 민족계 교육기관이다. 수업 과목은 자연과학을 위주로 하면서 성경 · 영어 · 한문 등을 교수하였다. 1942년 제3국민고등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광복 후인 1946년 2월 잠시 동안 은진중학교로 복귀하였으나, 같은 해 8월 인근 5개의 중학교와 통합하여 길림성립용정중학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