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설치된 것은 세종 말년이었으나 문종 즉위 후 흥인문(興仁門), 창덕궁 인정전, 수구문(水口門)의 개축공사로 그 소임이 본격화되었다.
관원은 1451년(문종 1)을 기준으로 볼 때 좌의정 황보 인(皇甫仁)과 우의정 김종서(金宗瑞)가 겸임한 도제조(都提調) 2인과 정분(鄭苯)·민신(閔伸)·이교명(李敎命) 등 제조(提調) 3인이 있었다. 당시의 공사가 국가의 중요사업이었고 그 담당자들이 의정부의 정승들이었기 때문에 도청의 실권이 비정상적으로 확대되어 주목되었다.
특히, 기존의 선공감이 유명무실해진 것과 금군인 방패(防牌)와 섭십육(攝十六) 등을 공사에 동원하여 물의를 일으켰던 공사실무자 이명민(李命敏)의 횡포가 크게 문제되었다.
이로써 사헌부·공조·병조를 막론하고 도청혁파상소가 끊이지 않았으나, 1452년(단종 즉위년) 12월 병조판서 정인지(鄭麟趾)가 혁파의 소를 올렸다가 판원사(判院事)로 좌천될 만큼, 당시 도청의 실권은 막강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청의 세력도 궁궐공사의 완성과 함께 퇴조하여, 1453년 말에는 도청 자체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