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3책. 목판본. 1821년(순조 21)에 후손 인욱(仁勗)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정언충(鄭彦忠)·조술도(趙述道)의 서문, 권말에 정내주(鄭來周)·정필규(鄭必奎)·유심춘(柳尋春)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 도서·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에 사(辭) 2편, 부(賦) 2편, 오언절구(五言絶句) 105수, 오언율시(五言律詩) 94수, 오언배율(五言排律) 5수, 권2에 오언고시(五言古詩) 23수, 육언(六言) 2수, 칠언절구(七言絶句) 163수, 권3에 칠언율시(七言律詩) 88수, 칠언배율(七言排律) 16수, 칠언고시(七言古詩) 10수, 잡시(雜詩) 3수, 만사(挽詞) 40수, 권4에 소(疏) 2편, 서(書) 7편, 기(記) 2편, 제문 9편, 지갈(誌碣) 2편, 행록(行錄)·유사·잡저, 부록으로 묘지명·묘갈명·가장(家狀)·제문·만사·고유문(告由文)·봉안문(奉安文)·습유(拾遺)가 실려 있다.
시는 은퇴 후 진성(眞城)에서 지내면서 감회를 읊은 것이다. 유여일(柳汝一)·한유백(韓裕伯)·박순(朴淳) 등의 시에 차운(次韻)한 것이 여러 편 있다. 청절(淸絶)하고 격조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당대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남극관(南克寬)도 그의 시에 대해 체기(體氣)가 고묘(高妙)하고 흥기(興寄)가 심원하다고 평가하였다. 시 가운데에서도 특히 오언절구에 뛰어났으며, 당체(唐體)를 본받았다.
소(疏)는 용궁(龍宮) 지방에서 광해군 때부터 규정보다 더 많이 징수되고 있는 전세(田稅)의 하중(下中) 등급의 세를 줄여달라고 요청한 것과, 영양(英陽)의 복현(復縣)을 요청한 것이다. 서(書)는 주로 스승인 정경세(鄭經世)에게 예설(禮說)에 관해 질의 응답하면서 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