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순당집(中順堂集)』에 관한 기록은 『목은집』과 『용재총화』 권8, 『해동문헌총록』의 「제가시문집(諸家詩文集)」 등에 보이나, 『고려사』 권114 「나흥유열전」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 문집은 그의 생전에 상주(尙州)에서 간행하였으며(『목은시고』 권23, 「나판서장간중순당집어상주…(羅判書將刊中順堂集於尙州…)」), 그의 부탁에 의해 이색(李穡, 1328∼1396)이 「중순당집서(中順堂集序)」(『목은문고』 권9)와 「발나흥유하시권(跋羅興儒賀詩卷)」(『목은문고』 권13)을 썼다. 이색의 서문에 의하면, 나흥유가 공민왕의 지우(知遇)와 관련하여 읊은 연구(聯句)에 당시 사대부들이 축하한 시 90편, 나흥유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보고 느낀 것을 읊은 시 250편, 일본 승려가 지어준 시 10편을 합하여 문집으로 편찬하였다고 한다. 『용재총화』에는 『중순당집』이 한 질(秩)이라 하였으나, 현전하지 않아 서지와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의 시는 『동문선』 권21에 7언절구 「봉사일본(奉使日本)」 1수가 전한다.
나흥유는 본관이 나주(羅州)이고, 금남우수(錦南迂叟)라 자호하였다. 중순당(中順堂)은 그가 거처하던 집으로, 당호(堂號)로써 호를 삼은 것이다. 일찍이 조정에 글을 올려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일본 사람들이 그를 간첩으로 의심하여 구금하자 “내 나이 150살에 도술(道術)이 있다.”고 속여 풀려났는데, 당시 그의 실제 나이는 60세였다고 한다.
서지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부전(不傳) 문집이라 그 의의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으며, 다만 산견된 기록을 종합하여 문집의 존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