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8년(공민왕 7) 고려에 귀화한 설손이 압록강을 건넌 이후 1년 사이에 지은 시문 300여 수를 1질(秩)로 만들고 이름을 『지동록(之東錄)』이라 붙였다. 『지동록』에 관한 기사는 설손의 아들 설장수(偰長壽, 1341~1399)가 쓴 「근사재일고발(近思齋逸藁跋)」(『동문선』 권103)과 『해동문헌총록』의 「제가잡저술(諸家雜著述)」 등에 보인다. 『지동록』은 현전하지 않아 서지와 내용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근사재일고』는 설손의 문집인데, 고려로 귀화한 후에 원나라에 있을 때 지은 시문 중 기억에 남은 700여 수를 2질(秩)로 편찬한 것이다. 역시 전하지 않는다.
설손은 위구르[回鶻] 사람으로, 대대로 설연하(偰輦河)에서 살았으므로 설(偰)을 성으로 삼았다. 원나라에서 진사과에 급제하고 단본당 정자(端本堂 正字: 황태자의 경서 교육 담당) 벼슬을 하였다.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하여 고려에 귀화한 후에는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종유(從遊)한 인연으로 두터운 대접을 받아 부원군(富原君)에 봉해졌다. 시재(詩才)가 뛰어나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히며, 『동문선』 등 역대 시선집에 한시 32수가 거듭 뽑혀 있다. 「병중영병매(病中詠甁梅)」, 「산중우(山中雨)」가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서지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부전(不傳) 문집이라 그 의의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으며, 다만 산견된 기록을 종합하여 문집의 존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