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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회화개념용어

 ‘아름다움’의 뜻을 나타내는 말을 가리키는 철학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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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아름다움’의 뜻을 나타내는 말을 가리키는 철학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어원적 의미
미(美)라고 하는 한자어는 그 구성상으로 볼 때, ‘양(羊)’자와 ‘대(大)’자가 합쳐진 것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자면, 미는 ‘큰 양’으로서, 양이 크면 살지고 맛이 좋다는 뜻을 함축하는 셈이 된다. 양은 말·소·돼지·개·닭과 더불어 이른바 육축(六畜) 중의 하나로서 반찬[膳] 가운데 주가 되기도 하다. 이 ‘선(膳)’은 다시금 고기를 뜻하는 글자[月]와 좋다는 글자[善]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만큼, 양은 상서로움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처럼 미를 맛을 매개로 선(善)과 상통하는 문자로 풀이하는 설명은 이를 곧 ‘달다[甘]’와 바꿔 쓰기도 한다. 단맛은 신맛·쓴맛·매운맛·짠맛과 함께 다섯 가지 맛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다섯 가지 맛이 있는 것[五味之美] 전체를 대표하기도 한다고 일컬어진다. 이러한 미각적 의미로부터 나아가 넓은 의미에서 좋은 것[好]은 모두 아름답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양의 고기가 크다는 뜻으로 이해하여 미를 단순히 좋은 맛이라고 읽는 감각적인 이해 방식에 반대하기도 한다. 즉, 양을 ‘곡삭지희양(告朔之餼羊)’(『논어』, 팔일(八佾) 17), 즉 매월 초하룻날이면 제사 때 하늘에 희생으로 바쳤던 양이라는 의미로부터 전의하기도 한다. 그래서 ‘희생(犧牲)’이라는 내적 의의를 지니는 말로 생각하는 해석도 있다. 희생으로 바쳤던 짐승을 자기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 곧 사회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는 의(義)이다. 이는 ‘아(我)’자 위에 양이 놓여 있는 구조로 읽혀진다.
선은 양을 ‘두(豆)’ 위에 올려놓은 구조이다. 두란 헌대(獻臺)주 01)를 뜻하는 고배(高坏)주 02)와 상통한다. 그래서 결국 선이란 자기가 치르는 희생의 크기가 일정한 규격에 맞아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선을 베푼다는 것은 곧 도덕상 양심의 명령에 따라서 아욕(我慾)을 버려야만 되는 것이다. 확실히 자기가 희생을 치르는 것이므로 선은 희생과 결부되어 있다고 읽혀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치러야 할 희생이 지극히 큰 것이어서 규격을 벗어나 자기 자신이 멸망할 정도로 클 때 ‘(희생)양이 크다’는 구조를 가진 ‘미’자가 나온다는 해석이 있게 된다.
이처럼 단순히 문자 구성을 따져 본다고 하여도 ‘미’와 ‘선’, 나아가 ‘의’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미를 맛[味]과 결부시키는 해석이 보다 앞서고, 선·의와 결부시키는 해석은 다분히 후차적인 듯싶다.
미라는 한자어의 어원적 의미 못지 않게 이에 상응하는 순수한 우리말인 ‘아름다움’의 어원적 의미도 따져 볼 만하다. 그 역시 여러 가지로 풀이된다. ‘아름’은 ‘알다’의 활용형인 명사형으로서 미의 이해 작용을 표상한다. 그리고 ‘다움’은 ‘성질이나 특성이 있음’의 뜻을 더하고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 ‘-답다’의 활용형으로서 ‘격(格)’, 즉 가치를 말한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지(知)의 정상(正相), 지적 가치를 말한다는 풀이가 있다. 이에 따른다면, ‘아름다움’은 알음[知]이 추상적 형식 논리에 그치지 않고 종합적 생활 감정의 이해 작용에 근거를 둔 것을 뜻하게 된다.
또한 미라는 것이 감정적인 것도 아니요, 의지적인 것도 아니요, 이지적인 것도 아니다. 이러한 예지적(叡知的)이라는 견해에는 어느 정도 찬동하지만, 이러한 뜻풀이가 어원 고증으로서는 무리가 있다 하여, ‘아름’을 ‘지’의 뜻이 아니라 ‘실(實)’의 뜻으로 풀어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역시 어원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지적에 부딪친다. 왜냐하면, ‘실’의 고어(古語)는 ‘여름’이다. 그것은 ‘열-(開)’의 명사형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름’과 ‘아람’을 동일시하는 견해는 ‘아람’이 열매[實]라는 말의 범칭이 아니라 ‘알밤’이라는 말로서, 밤이나 도토리가 무르익어 떨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말임을 짐짓 무시한다.
이러한 지적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의 고어 원형이 ‘아ᄅᆞᆷ다옴’임을 근거로 삼고 있다. 이때의 ‘아ᄅᆞᆷ’은 ‘사(私)’의 고훈(古訓)으로서 ‘민(民)’의 통훈(通訓) ‘ᄇᆡᆨ셩(百姓)’의 속훈(俗訓)도 ‘아ᄅᆞᆷ’이지만, 이는 사민(私民)의 뜻이므로 사(私)의 훈(訓) ‘아ᄅᆞᆷ’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는 주장을 오히려 뒷받침해 주는 자료가 된다. 즉, 아름다움은 어원상 ‘제 마음과 같다’,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뜻이 되어, ‘제 미의식에 맞는다’, ‘제 가치 기준에 부합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따라 ‘미’의 어원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고찰한다면, 미는 본래 육체적 생명의 보존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차차 정신적 가치가 갈구되는 방향으로 발전해 오다가 드디어는 개성적 표현과도 맞닿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영역닫기영역열기미의 영역
미 또는 아름다움이 차차 선과 의와 그 뿌리를 같이하는 것으로 의식되는 동시에, ‘대상이(또는 대상에서) 저 곧, 각자[私]와 같을 때(또는 발견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가능해지는 현상 영역에 따라 다양한 유형이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자연과 인생 그리고 예술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자연미는 자연의 경관만이 아니라, 온갖 생물과 무생물을 막론하고 하찮은 유기물이나 무기물에 이르기까지 제 나름대로 모든 자연의 소산 가운데 편재하고 있다. 특히 오랫동안 농경 생활이 중심이 되어온 우리나라의 경우, 자연에 대한 예찬은 일일이 그 예를 들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편재하고 있다.
유의할 것은 기후와 토질을 의미하는 풍토는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그 속에서 가꾸고 변화하는 자연, 역사를 통하여 형성되는 자연이라는 사실이다.
즉, 풍토는 정태적인 자연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사유와 행동 양식을 낳는 문화적 거점으로서 동태적 환경이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태도는 그 자체로서 머무르지 않고 인생과 예술에 대한 태도에도 깊숙한 영향을 미친다.
다음과 같은 표현은 이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한국의 기후는 혹심한 더위와 추위 그리고 집중적 강우로 번갈아 사람들을 짓누른다. 이로써 이 변덕스러운 자연의 위력에 대항하기보다도 구름과 바람의 미묘한 움직임에도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감수성만을 기르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이처럼 수용적인 응전의 자세는 쌀 농사 위주의 한국의 농업 구조에서 비롯되는 수해·한해(旱害) 다음에 찾아오는 기근에 대한 공포와도 결부되어 있었다. 거기에다가 외부 세력에 의한 빈번한 침입, 외적에 의한 지배, 민중에 대한 학정의 역사가 이중 삼중으로 얽힌 이 땅은 무릇 대적할 수 없는 강한 힘에 대해서는 그것이 제풀에 시드는 때를 기다리는 지혜를 한국민에게 터득시켰다.”
이는 기다림의 지혜가 소극적으로 보면 무기력한 체념으로 변질된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보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유연한 달관을 내포한다. 그러면서 농경민의 생활 속에서 다듬어진 의식의 산물로 자연주의를 낳게 한다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자연과 역사가 예술을 가능하게 한 어머니였다는 사고는 물론 서양에서도 일찍부터 주장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자연과의 관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자연에 대한 이른바 ‘무관심적 태도’이다.
이는 자연을 이용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한갓 상찬의 대상으로 보는 것과 직결된 태도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미를 운위함에 있어 공통되는 특징을 이룬다. 단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자연을 대하면서 거기에서 인생과 예술을 위한 모범을 찾으려는 경향이 보다 지속적이고 중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자연미를 독립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 서양과 비교할 때 대조를 이룬다. 서양의 이러한 경향은 자연을 과학적으로 탐구한 결과이다. 즉, 탐구의 결과로 자연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되고, 자연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됐을 때에 탄생한 접근 방식이다.
인생이라는 표현은 인간과 그의 생활 전반을 요약한 것이다. 인생미란 따라서 인간 자체와 인간이 영위하는 생활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자연주의적 경향이 강할 경우 자연에서 발견되는 조화 등의 특징을 인간과 인간 생활에서도 발견해 보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예컨대, 아름다운 사람이란 신체의 외모를 지칭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미란 ‘사람다운 사람’의 인륜적 선에 그 바탕을 두고서야 비로소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예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서양의 경우 18세기에 이르러 순수 예술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고, 그 의의가 “아름다운 자연을 모방하여 독특한 쾌(快)를 산출해 내는 인간 활동”으로 정의되었다.
이러한 개념의 정의는 그 뒤 널리 파급되어 서양은 물론 동양에서도 통용되었다. 그러나 독자적인 해석을 찾는 노력도 없지 않았다. 그러한 노력은 대개 주대(周代)의 육예(六藝)를 근거로 삼는다.
예(藝)는 토괴(土塊)주 03)에다가 초목[艹]을 심는 인력[丸]의 작용[云]이라는 기능을 뜻한다. 주대에는 육예를 교육하였다. 예(禮)는 예의의 기능이요, 악(樂)은 음악의 기능이요, 사(射)는 궁도(弓道)의 기술이요, 어(御)는 기도(騎道)의 기술이요, 서(書)는 사자(寫字)의 능술(能術)이요, 수(數)는 계산의 능술이라 하였다.
즉, 육예의 예는 농사로 치자면 수확을 얻기 위하여 곡식 낟알을 심듯이, 장차 사대부가 되려는 인물의 인간적 결실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기초 교양의 씨앗을 뿌리고 인격의 꽃을 피게 하는 수단으로 여겼다. 결국 인격 도야의 의의가 있다고 보면서 예술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여기에 깃들여 있다.
이미 서양의 경우에도 자유 과목(liberalium artium)이라 하여 오랫동안 이와 비슷한 교육이 실시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이 18세기의 순수 예술 개념을 확립하는 데에 적지 않게 기여한 바 있는 만큼, 육예에서 오늘날에 통용되는 예술 개념의 연원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아주 헛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온갖 활동 역시 역사적인 만큼 미 또는 아름다움이 현상 영역에 따라 어떻게 그 유형을 달리하는가도 역사의 맥락 속에서만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 그 가운데 자연과 인생에서의 아름다움을 독립해서 규명하여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자연미나 인생미(인간미)가 집중적으로 본격화되는 현상 영역은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예술미인 까닭에 앞으로의 검토에서는 주로 예술미 부분에 주목하고자 한다.
영역닫기영역열기미적 범주
미의 유형을 다루는 연구 방법에 속하는 미적 범주론은 금세기 초까지 주로 독일 미학에서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그 연원은 18세기 영국 미학, 특히 버크(Burke.E.)의 「숭고와 미에 대한 우리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1756년)라는 논문이 효시를 이룬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두 종류로 나누어 고통 또는 위험의 관념과 결부된 인간의 자기 보존의 감정과, 인간의 사회성에 큰 몫을 하는 쾌의 감정으로 구분한 뒤, 전자에서 숭고를, 후자에서 미를 도출하였다.
칸트(Kant.I.)가 미와 독립된 숭고의 분석을 꾀할 때, 실상 그는 버크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미와 숭고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① 미가 대상의 형식에 관여하는 반면, 숭고는 몰형식(沒形式)의 대상에 관여한다.
② 미가 한정되지 않는 오성 개념(悟性槪念)의 표현인 반면, 숭고는 한정되지 않는 이성 개념의 표현이다.
③ 미가 질(質)의 표상과 결부된 반면, 숭고는 양(量)의 표상과 결부되어 있다.
④ 미가 직접적인 삶의 촉진 감정인 반면, 숭고는 간접적으로 일어나는 쾌감 내지 일시적으로 멈추었다가 다시 거세게 범람하는 감정이다.
⑤ 미가 유희적 상상력과 결부된 반면, 숭고는 유희가 아니라 진지한 것이다.
그 뒤 피셔(Vischer.F.)는 미와 숭고 외에 희극적인 것을 첨가하여 미의식(美意識)의 3분법을 적용하였다. 졸거(Solger.K.)는 미와 대립되는 추(醜)를 언급하면서 추는 악과 같이 관념의 부정으로만 표시되지만, 미의 위치 안에 설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 형태를 가정하는 하나의 부정으로 표시된다고 보았다.
현대에 이르러 데스와르(Dessoir,M.)는 『미학 및 일반예술학』(1906년)에서 미적 기본 형태를 미적 정취의 기본 형식으로 분석하여 미·숭고·비극미·추·희극미 등으로 표시하였다.
이상의 기본적 유형과 아울러 거기에서 파생되는 미적 유형들도 거론된다. 이 여러 미적 범주들이 서로 미묘하게 혼성되어 여러 가지 특유한 미의 성격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대체로 숭고미의 변형으로 비극미가, 희극미의 변형으로 우아미가 파생되는 것이다. 이 네 개는 단순미·추와 더불어 중요한 미적 범주로서 다루어진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미는 그중 단순미만을 가리킨다. 그것은 순정미(純正美)라고도 표기된다. 조화성·완결성·쾌감성 등의 여러 특질이 가장 순수하고 선명하고 완전하게 구현되는 것으로 용인된다. 그러나 이는 넓은 의미의 ‘미적인 것’의 하나로서 추 역시 이 넓은 의미의 ‘미적인 것’의 하나가 된다.
이러한 앞선 연구로부터 영향받으면서 이른바 한국적 미의식에 대한 관심이 정리된다. 그중에는 예컨대 미적 범주를 문학의 장르와 연결시키는 설명도 있다. 이에 따르면 미적 범주는 숭고·우아·비장(悲壯)·골계(滑稽)의 네 가지를 기본 범주로 삼는다.
우선 숭고는 이념이나 목표 등 ‘있어야 할 것’이 현실 자체인 ‘있는 것’보다 더욱 소중한 가치로서 숭상되는 상태이다. 그리고 동시에 있어야 할 가치와 있는 가치가 서로 융합되어 있는 상태로 설명된다.
신화에서 크게 나타나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사라진 이 숭고에 비하여, 우아는 ‘있어야 할 것’과 ‘있는 것’이 서로 융합하고 있으면서도 ‘있는 것’을 더욱 아름답게 여기는 미의식으로 설명된다.
민담(民譚)에서의 현실 긍정적 세계관이 우아미의 시원이라고 간주된다. 이는 후대의 송(頌)·악부(樂府) 등에서 잘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아미는 이처럼 현실과 화합하면서 있는 그대로를 칭송·찬양하고자 하는 동기를 바탕으로 삼는다.
다른 한편, 비장은 ‘있어야 할 것’과 ‘있는 것’ 중에서 전자의 가치를 더욱 높이 다룬다. 그리고 숭고와는 달리 두 가치가 조화되지 못하고 상반되고 있을 때 해당되는 미의식으로 설명된다.
전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순교자의 순교 행위나 영웅 전설에서 보이는 영웅의 패배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지적된다. 말하자면, 현실 비판적 기능이 말해질 수 있겠다. 서구와는 달리 국문학에서는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다.
골계는 ‘있어야 할 것’보다 ‘있는 것’을 더 드러내 보이는 동시에 두 가치 사이의 상반을 제시한다고 설명된다.
이는 국문학의 지속적인 미의식으로서, 특히 조선 후기에 나타난 대표적인 미의식이라고 지적된다. 이 골계는 익살스러운 해학과 날카로운 비판을 지닌 풍자로 나누어 고려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미를 단순히 조화나 균형 혹은 비례 등과 연관시켜 좁게 해석하는 태도를 벗어나서(외래적인 미 가치 기준의 수용과 우리의 미의식 자체의 시대적 변용으로 인하여) 깨끗하고, 밝고, 예쁘고, 날씬한 것은 물론, 그 반대인 칙칙하고, 어둡고, 무디고, 일그러진 것도 아름다움의 내용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발생한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서양 미학으로부터의 영향 관계를 엿보게 된다. 즉, 우리의 미의식이 정통미인 우아미뿐 아니라, 추악한 것까지도 미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서양 근대 미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이는 특히 ‘멋’에 대한 설명에서 두드러진다. 아름다움의 보다 특수적이고 한국적인 개념으로 ‘고움’과 ‘멋’이 거론되고, 특히 그중에서도 ‘멋’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바로 미적 범주론의 한국적 전개이다. 멋은 맛과의 유비 관계를 통하여 그 특징이 찾아지기도 한다. 이에 관한 견해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멋이라는 말은 맛이라는 말의 의미와 어감이 변형된 말이다. 맛은 미각의 뜻에서 ‘재미’ 또는 ‘흥취’라는 뜻으로 바뀌어 ‘멋’이라는 뜻에 이른다.
② 멋의 바탕은 재미·흥미·흥취에 있다.
③ 멋의 바탕은 조화에 있다.
④ 멋은 치장과 솜씨와 행동의 변화·숙달·세련의 뜻이 있다.
⑤ 멋의 단계의 표현은 멋들다→멋있다→멋지다→멋 떨어지다의 순으로 상승한다.
⑥ 멋의 구경(究竟)은 자유 방종이 격에 맞는 열락(悅樂)이다. 즉, 멋은 멋이 떨어진, 멋없는 멋이 최고 경지이니, 그것은 ‘멋대로’ 해서 격에 맞는 무애자재(無碍自在)의 경지라는 말이다.
멋의 미적 내용은 이와 같은 설명을 바탕으로 ① 형태미로서의 멋, ② 표현미로서의 멋, ③ 정신미로서의 멋이라는 관점에서 계속해서 논의된다.
멋의 형태적 특질로서는 비정제성(非整除性)·다양성·율동성·곡선성이 지적된다. 그리고 멋의 표현적 특질로서는 초규격성(超規格性)·왜형성(歪形性)·완롱성(玩弄性)이 지적된다. 나아가 멋의 정신적 특질로서 무실용성(無實用性)·화동성(和同性)·중절성(中節性)·낙천성(樂天性)이 지적된다.
이러한 미적 범주의 연구는 자칫 미를 정태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들 우려가 있다. 예컨대, 앞에서 살핀 연구는 “멋은 민족 미의식의 집단적·역사적 동일 취향성에 말미암은 것으로, 원시 이래로 지금에 관류하는 하나의 전통이다.”라고 하여, 자칫 그것이 불변의 속성인 듯 오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멋이 예술에서 가장 발현되고 꽃핀 것은 조선시대이고, 멋이라는 말이 성립된 것은 아무래도 조선 말엽 만근(輓近) 백년 이내의 일이요, 이것이 단편적으로나마 논의된 것은 24, 25년 내의 일이다.”라고 함으로써 그것이 지닌 역사적 성격을 다행히도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24, 25년 내란 곧 1940년대 이후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곧 고유섭(高裕燮)이 독일 미학의 영향이 강하던 당시의 교육 상황에서 미학을 전공한 뒤 우리나라의 조형 예술 연구에 몰두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는 한국적 미의식에 대한 관심이 독일 미학의 미적 범주론 연구성과에 힘입고 있다는 간접적인 증거도 된다.
하지만 여하간 무기교의 기교를 우리나라 미술의 특징으로 내세운 그의 견해는 삼국·통일신라·고려·조선 등 시대마다 특징이 있다는 스스로의 주장과도 모순을 일으킨다는 후대의 지적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지적은 “시대를 각 시기별로 잘게 나누고 분야를 세분해서 각 시기의 각 분야 미술의 특징을 과학적으로 분석, 검토하여 그 특징을 정확히 가려내고 이를 재분류, 정리하여 체계화시켜야 한다.”라든가, “이제는 우리나라 미술의 특징이나 그에 내재하는, 그리고 그것을 창출한 다양한 미의식을 일괄해서 보기보다는 어느 특정한 시대나 분야 또는 작가마다의 경우에 따라서 그 특징과 미의식을 뜯어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라는 식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주장들은 과학 시대의 성과를 예술미의 규명에 적용시켜 보려는 그 나름대로 의의 있는 작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각 시대를 특징짓는 기본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른 방식으로 보강한 것처럼 들린다.
영역닫기영역열기한국미의 시대적 전개 과정
  1. 1. 삼국·통일신라시대의 미
    궁극적 존재에 대한 관심을 요약하는 종교 문화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 보여지는 예술에서의 시대적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할 때, 우리가 우선 착안해야 할 것은 이른바 샤머니즘(shamanism) 또는 무교(巫敎)이다.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에서도 무교는 종교사의 제1장을 구성해야 할 종교 현상으로 손꼽힌다. 그러면서 인간의 정신사 또는 문화사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샤머니즘의 전형을 시베리아의 퉁구스 족에서 찾고, 이에 가장 가까운 형태의 하나를 우리나라의 무교에서 찾고 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 샤머니즘 또는 무교는 시기적으로 가장 오랠 뿐 아니라 그 뒤의 문화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면서 오늘날까지도 잔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지핵(地核)으로 간주된다. 즉, 우리의 행동 양식을 결정할 가치 체계와 세계관을 적지 않게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무교의 잔류 현상이 아닌 원형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이의 규명을 위해서는 신화와 제례(祭禮)가 중요한 고찰 대상이 된다. 신화와 제례에 대한 종교학적 분석에 따른다면, 우리 나라 무교의 원형은 대체로 성속 변증법(聖俗辨證法), 신인 융합(神人融合)의 엑스터시, 화복(禍福)의 조절이라는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교제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재생한다는 신비 체험이 음주 가무(飮酒歌舞)를 통하여 가능해진다. 그리고 엑스터시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령(交靈)을 통하여 샤먼은 신의(神意)를 알아내고 영력(靈力)을 빌려 양재초복(禳災招福)의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재액을 없이 하고 축복된 인생을 창조하려는 것이 바로 무교의 본질이라고 보는 이러한 해석과 연관하여 주목할 만한 사항은 곧 음주 가무라는 현상이다. 특히, 우리나라 연극의 기원을 여기에서 찾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비단 연극뿐이 아니라 모든 예술의 뿌리를 이로부터 구하는 해석은 노동, 즉 일을 예술의 기원으로 주장하는 해석과 착종을 이루면서 무시 못할 정도의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
    고대 한국인의 신앙 형태로 요약되는 ① 제천 의례(祭天儀禮)와 광명 신앙(光明信仰), ② 농경 의례와 곡신 신앙(穀神信仰), ③ 가무 새신(歌舞賽神)과 창조 신앙이 한결같이 생산과 연결되어 있음을 결코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고대인들이 가졌던 종교 의례의 궁극적인 목적은 풍부한 삶의 창조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대개 파종이 끝난 5월이나 추수가 끝난 10월에 행하여졌던 것이다.
    이처럼 무교가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을 위하여 지핵적 기능을 담당한다는 견해를 어느 정도 수용한다 해도, 그 초기 단계의 특징으로써 그 뒤의 모두를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고대의 무교 자체가 수호와 축복을 비는 산천제(山川祭)나 조령제(祖靈祭)라는 단순 전승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와 혼합하여 창조적인 형태로 전개되었는가 하면, 개인의 안전과 축복을 찾는 벽사진경사상(辟邪進慶思想)이 무격 신앙(巫覡信仰)으로 전락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 예술미와 연관해서는 무교와 불교가 창조적으로 혼합된 통일신라시대가 주목된다. 이에 앞서 그 이전 단계를 통틀어 ‘힘의 예술’로 설명하는 견해를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이에 따르면, 부족 동맹을 거쳐 국가를 형성한 고구려·백제·신라의 초기 예술들은 현재 남아 있는 유산들을 통하여 볼 때, 대체로 그 결구(結構)가 웅건하고 절조(節調)가 장엄하며 표현이 요약적이라는 특색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단계의 예술미는 세부에 치심(致心)주 04)하지 않고 위의(威儀)주 05)에 치중한다.
    한편으로는 비조각적(非彫刻的)인 가구 조형(架構造型)이 발달하면서 예술적 사고로서의 명상(瞑想)의 정서는 볼 수 없다고 파악된다. 또한 독재적 국가의 권력과 신앙적 신의 위력이 합일되어 연관적 조화를 이루면서 권력의 과장적 표현에서 그 창작 의욕을 발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불교를 제일 먼저 받아들인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는 관찰과 연결된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대륙 문화적 요소가 가장 우세하였다는 주장을 낳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륙 문화란 그 연원이 매우 깊다.
    즉, 시베리아 동토 지대(凍土地帶)에서 생성되었던 샤머니즘 이래의 영향이 깊은 뿌리를 박고 있다. 그리고 북방 스키타이 족의 문화와 함께 구체적으로 그 영향이 나타난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진한(秦漢) 이래의 중국 문화가 농후하게 전래되고 있음도 입증된다.
    이들 문화가 일단 고구려의 영역을 통과하고 있어 백제·신라에의 북방 경로를 통한 전래의 양상이 짐작된다. 그리고 무교 시대와 연관시켜 말한다면, 이는 그 바탕 위에서 불교를 비롯한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특색 있는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과도적 단계로 말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제각기 불교와 중국 문화를 도입하여 원시적인 전통문화 사회로부터 높은 문화 사회에로 비약적인 발전을 초래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를 화랑도에서 찾는 설명이 적지 않다.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대로 화랑도는 유·불·선(儒佛仙) 삼교를 포함한 풍류도(風流道)와 연관되어 있다.
    이 풍류도 가운데 유교의 도의 규범(道義規範)은 인간의 의의와 가치 소재를 자각하게 하였다. 그리고 도교의 정신 자유는 생활의 낭만과 슬기를 확대시켰다. 불교의 불국 정토(佛國淨土)는 이상을 실현화, 구체화시켰다는 설명도 있거니와, 이러한 기본 정신은 화랑의 수양 방식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 내용은 ‘상마이도의(相磨以道義)’, ‘상열이가악(相悅以歌樂)’, ‘유오산수(遊娛山水)’로 요약된다.
    그중 ‘상열이가악’이라는 구절이 주목된다. 이는 무교 시대의 음주 가무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것이 가악(歌樂)을 통하여 아름다운 감정을 기르는 것, 즉 정서의 도야를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에서 엿보이는 미적 성격은 ‘유오산수’의 수양 방식에서도 추출된다. 아름다운 산수를 유람하면서 심신의 단련을 기하는 이 수련 방식은 대자연에 대한 종교적 신앙심과 경외심을 기른다. 한편으로는 빼어난 자연미의 완상(玩賞)을 통하여 조화로운 인격의 연마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화랑 제도의 본질적 성격이 미적 성격을 띠고 있으면서 조화로운 미적 인간의 형성을 지향하였던 신라인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교육적 실천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화랑도가 일단 무교를 주체로 삼아 유불선을 흡수한 가운데 새로이 형성된 것이냐, 아니면 중국 사상의 이입과 더불어서 확실한 사상으로 의식된 것이냐 하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고대 한국인에게도 그 맹아(萌芽)라 할 수 있는 태도나 심정이 존재하였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후자적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은 중국이 일찍이 진대(晉代)에 이르러 진풍류(晉風流)라고 불릴 정도로 풍류를 미적 방향으로 크게 발전시켜 갔다는 설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때의 풍류는 선왕(先王)의 미풍(美風), 개인적으로 탁월한 풍격(風格)이나 품격이 바깥으로 나타난 유형의 자태 내지 음악이 가지는 양식 또는 유의(流儀)라는 의미로서의 예술 작품의 품격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자연물의 속성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는 미적인 것의 존재, 아치(雅致) 있는 초속 비범(超俗非凡) 또는 독자적인 고매한 정신적 경지 그리고 특수한 전의(轉義)로서 호색(好色) 등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풀이된다.
    그러나 설혹 풍류가 이미 중국에서 그 의미가 확정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토착적인 문화와 융합되는 정착 과정에서 발생하는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문화의 맥락 속에서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특징이 더 주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화랑도로 대변되는 이 시기의 문화 예술을 ‘꿈의 예술’로서 특징짓는 견해를 참고함 직하다. 이 견해에 따르자면, 세련된 외래 문화를 받아들일 만한 신앙적 기반이 샤머니즘을 비롯한 민간 신앙에서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이 상태에서 불교의 법열(法悅)과 신흥 의욕에 불타는 국민적 야성이 혼연 합일되어 이루어진 것이 바로 ‘꿈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화랑도는 이 예술 정신이 정치적 및 무력적인 면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풀이하는 것이다.
    꿈의 예술은 생동하는 정신과 이상화(理想化)된 육체의 표현이 균정(均整)됨을 특징으로 삼는다. 석굴암의 조각들에서 그 전형이 발견된다.
    이 조각들은 멀리는 그리스에 기원을 두고 있는 간다라 미술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것이라는 학설이 보편화되어 있다. 꿈의 예술이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엄(eine edle Einfalt und eine stille)이라는 그리스적 예술의 특징화와 비교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신라 문무왕 이후 흥덕왕 때까지를 ‘꿈의 예술’의 시대로 잡는 이러한 해석은 그 뒤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사회가 불안해진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1. 2. 고려시대의 미
    왕조의 쇠퇴기를 맞이하자 사람들은 국가적 관심보다는 개인의 안전과 행복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어떤 면에서 통일신라 후반기에서 고려의 500년을 통틀어 ‘슬픔의 예술’로 특징짓는 것을 무리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실상 적어도 고려 왕조의 문화적 변천만 하더라도 과도기·전성기·혼란기·쇠퇴기 등 네 시기로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좀더 풀어 말한다면, 태조로부터 정종에 이르는 과도기는 신라 문화의 연장기라는 성격을 지니면서 당나라의 제도를 채용하여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문종으로부터 예종에 이르는 전성기는 문신 귀족에 의한 문치 태평(文治太平)을 이루기도 하였다.
    인종으로부터 고종에 이르는 혼란기는 앞선 시기에 잠복하여 있던 정치·사회·문화의 부패적 요소들이 원인이 되어 각종 내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그리고 몽고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그리하여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원종으로부터 공양왕에 이르는 몽고에의 예속을 이기지 못한 채 나라가 망해 버리고 만 것이다.
    지나치게 간략화되었지만 이러한 시기 구분을 감안한다 해도 고려시대는 약 80년에 걸친 전성기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항상 불안 속에서 살아갔던 시대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전성기마저도 혼란기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예술을 ‘슬픔의 예술’로 파악하는 견해의 논거는 그 타당성이 인정될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른다면 ‘슬픔의 예술’은 ‘꿈의 예술’이 그 정신에 내포된 힘을 상실함에 의하여 싹트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힘의 상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지적한다면, 봉건 제후의 배반과 혼란의 질곡에 대한 불평과 원망, 봉건 사회의 포화에서 일어나는 도시 문화와 귀족 문화의 타락을 뜻한다. 병란과 착취 속에 허덕이는 민중의 절망은 그리하여 무상관(無常觀) 속에서 허무주의적 색채로 물들게 된다. 이로 인하여 배태된 ‘슬픔의 예술’은 정토 사상(淨土思想)과 선 사상(禪思想)에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에 위의는 몰락되고 명랑은 퇴색하여 그의 정신이 허무와 향락적 낭만에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규격은 산란되고 절조는 저회(低徊)주 06)하여 그 기법은 불균형에서 비상칭으로 흐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허무한 슬픔 속에는 항시 반성과 명상, 희구와 신앙, 체념과 달관 등이 도사리고 있어 예술 작품 속에서 이상계(理想界)를 찾아 세움으로써 그 나름의 독특한 미, 즉 정적미(靜寂美)를 이루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고려 청자는 바로 이 ‘슬픔의 예술’에 깃든 비상칭 불균형의 정신이 자연한 인공의 극치를 나타낸 뛰어난 예로 지적될 수 있다. 그리고 「가시리」·「청산별곡」·「만전춘 滿殿春」의 고려 가사도 이런 맥락에서 거론된다.
  1. 3. 조선시대의 미
    그것 나름대로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불교 문화가 쇠퇴 일로를 걸으면서 국운이 쇠미해지자, 이에 대한 반발로서 유교주의를 표방한 조선 왕조가 무력 봉기를 통하여 일어선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즉, 고려 말의 타락한 불교를 탄압하고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으면서 소박·건실의 정신을 새 조선은 시대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는 곧 위축되면서 이른바 은일 사상(隱逸思想)이 지배적이 되었다.
    지배 계층 위주, 남성 위주의 문화가 가지는 경직성이 이완될 때 나타나는 평민성이 주목되었다. 그래서 조선 왕조의 예술 문화를 ‘멋’으로 특징화하여 ‘멋의 예술’이라고 이름 짓는 견해가 생겨났다. 시조와 함께 백자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언급되고 있다.
    조선의 역사는 500년이고 그 시작은 14세기 마지막부터이다. 하지만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은 영토가 확정되고 민족으로서 가장 중요한 고유의 문자가 제정되었다는 등의 사실로 미루어, 조선시대야말로 한민족으로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완성, 통일된 시기라는 사실을 중시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조선 왕조 미술의 바탕을 흐르는 정신이나 특색이 한국 미술 전체의 그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결정화된 멋을 한국 예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삼고자 하는 견해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때 멋은 넓은 의미의 자연주의를 포함한다. 또한 인공이면서 자연으로 돌아가고, 인위이면서 인위 이전의 세계를 나타내려는 정신 상태 또는 무기교의 기교를 집약한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예술미의 시대적 전개 과정에 대하여 고찰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문제는 곧 한국미의 이원적 구조라는 문제이다.
    예컨대, 회화에서 도석(道釋)·산수·사군자·괴석(怪石) 등은 문화미적인 것에, 화조(花鳥)·사경 산수(寫景山水)·전각(殿閣)·사녀 풍속(仕女風俗)·전신(傳神) 등은 자연미적인 것에 각각 대응하는 것으로 대략 이해한다.
    이때의 문화미적인 것은 예외 없이 그 사회의 상류 계급의 문화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 문화적 선량(選良), 곧 지식인의 미관이라고 설명할 때에 우리는 이원적 구조의 한 예를 보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미술이나 미의 문제를 포괄하는 문화 일반의 구조가, 본질적으로 이원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이러한 이원성을 중심으로 한국미의 시대적 변천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한다. 즉, 삼국시대만 하여도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문화의 여러 가지 시원적 요소가 미술 작품에 반영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층 문화와 상층 문화가 아직 미분화 상태인 것을 느끼게 한다.
    그 예로, 가령 최고 지배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금관의 형태가 시베리아 전통의 샤머니즘적 요소를 반영한다든지, 곡옥(曲玉)이나 영락(瓔珞) 따위의 장식품이 북방의 민속과 연관된다.
    그리고 「천마도 天馬圖」의 회화적 요소가 스키타이의 토속 장식을 나타내는 등 상층 문화의 표현물 자체가 그대로 대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토착적 내지 시원적 문화 요소가 충분히 확산될 수 있기 전에 중국의 강력한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로 삼국시대에 정착, 성장되는 듯하였던 한국인 고유의(또는 외래적인 것이라 해도 한국인 기질에 맞는) 미적 본질이 통일 이후로 쇠미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런 견해는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일견 무차별적으로 일관되게 간주하는 듯싶다. 하지만 예컨대 신라의 화랑도를 가리켜 미를 실천적으로 추구하는 예술적 인간이라고 정의한 ‘꿈의 예술’ 이해는 한국 미학 사상이 구현하였던 최초의 단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인정된다. 즉, 이 단계에서는 상층과 기층이 맞닿고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귀족 문화를 표방하고 지배 계층에서 중국 지향적인 성향을 고취하였던, 말하자면 세련되고 정제된 미를 이상으로 삼는 중국 미술의 완벽주의를 숭상하였다. 그래서 기층의 미적 요소들이 표면화되지 못하고 의식 속에 침잠되는 형태로 그 존재를 유지해 왔다.
    바로 여기서 앞에서 말한 ‘슬픔의 예술’의 특징화와 연결점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이 슬픔의 예술이 상층 문화와 기층 문화의 분리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더구나, 조선왕조 초기에도 이러한 중국 일변도 현상이 어느 정도 마찬가지로 보여진다. 그러나 17세기에 대내외적인 사회 정세가 급변하면서 양상이 변화되기 시작한다. 새로운 정신 사조가 형성되고, 급기야 민족적 자각이 움트게 되었다. 그 출발은 청나라의 발흥으로 전통적인 중국관에 변화가 온 데서 찾을 수 있다.
    미술도 이와 같은 시대 사상이 크게 작용하여 한마디로 ‘내 것’을 찾아보자는 탈중국적인 방향이 뚜렷해진다. 그리고 전통 속에 용해된 중국적 요소 대신 정통 미술에 밀려났던 민족 고유의 시원적인 미적 요소가 다시금 제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곧 기층적 요소와 상층적 요소의 변증법적 합일 상태의 적극적인 평가를 의미하게 된다. 이는 앞서 말한 멋의 예술 이해와 여전히 맥락이 닿는다.
    여기에서 지적되는 사례들에는 여전히 백자가 포함되어 있다. 그밖에도 분청사기라든가, 정선(鄭敾)·김정희(金正喜)와 같은 작가의 작품도 거론된다.
    분청사기에서 회청색을 감추기 위하여 백토를 한 꺼풀 씌우고 있는 것을 백색에의 애착이 인공의 배제, 자연에 대한 동경이라는 뜻의 자연주의적 취향의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이 다시금 멋과 연결되는 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아직까지 지배 계층의 양반적인 멋과 피지배 계층의 상민적인 멋이 구분된다. 그래서 전자는 중용적인 정일한 감정을 환기하면서 궁극적으로 아악(雅樂)이나 시조창에서 느껴지는 적조미를 향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후자는 비규격적 파격 속에 즉흥적 감정, 즉 ‘신바람’을 환기하면서 판소리·창·마당굿·민화 등에서 느껴지는 변화의 진폭으로 해학과 풍자미를 향하고 있다. 그래서 현실적 한을 해소함으로써 명랑성을 회복하고 있다.
    따라서 양자의 이른바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가능성이 이미 현실성을 나타내고 있었음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우리나라의 최근대사에서 좌절된 듯한 양상을 보인다. 그 주요 원인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일제의 침략이요, 이와 교묘하게 복합되어 있는 서양 문물 내지 예술 문화의 압도적 우세였다.
  1. 4. 서양 문물의 유입과 미의식의 변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표현인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조선(朝鮮)을 영어식으로 풀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근세에 이르러 빈번해지기 시작한 서양과의 접촉으로 인하여 이는 점차 적합하지 못한 상징이 되고 말았다.
    중국에 와 있던 선교사를 통하여 서양 문화가 이 땅에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서학(西學), 즉 천주교가 우리나라의 실학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이미 임진왜란 당시 천주교회의 사제(司祭)가 종군차 이 땅에 다녀간 기록이 있다. 그리고 리치(Ricci,M.)가 지은 『천주실의 天主實義』가 우리나라의 저술 속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1783년 이승훈(李承薰)이 아버지를 따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서양인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온 뒤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람이 급증하였다.
    당시에 만연하던 사회적·정치적 모순을 극복하는 길을 모색하고자 노력한 재야 학자들의 호응을 받았던 서학은 유교적인 의식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사교(邪敎)로 규정되어 금지되었다. 그리고 평등 사상에 감동한 수많은 신자들이 거듭 사형과 박해를 받게 되었다.
    정치적·사회적 이유가 순수한 종교적 이유 못지 않게 크게 작용하였던 수난의 와중에서도 서구적 과학과 기술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고조되었다.
    1631년 정두원(鄭斗源)에 의하여 천주교 서적과 함께 화포·천리경·자명종·만국 지도·천문서·서양 풍속기 등이 전래되는 것을 효시로, 이 땅에 소개된 서구의 과학 기술은 그런 대로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이렇게 소개된 서양 문물 중 예술과 연관된 부분도 결코 무시 못할 정도이다.
    서양화의 재료와 기술의 직접적 도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전통적인 회화 양식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음영법(陰影法)과 투시 도법(透視圖法)을 통한 현실적 입체감이 작품에 구체적으로 반영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박지원(朴趾源)이 천주당 안에서 접한 서양화에 대하여 나타낸 충격의 원인인 분명한 명암법과 투시법에 의한 생생한 현실감이 이 땅의 그림에서도 조금씩 나타나게 된 것이다.
    1873년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쇄국 정책이 개화파 세력에 의하여 막을 내리면서 서양 문물의 직접 도입은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890년과 1892년 약현과 명동에 각각 고딕식 천주교 성당이 세워졌다. 그리고 1900년부터 1909년 덕수궁의 석조전이 프랑스 기술자에 의하여 건조된 것이 상징하듯이,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서양 예술의 직접적인 도입이 눈에 뜨인다.
    이미 1884년 『한성순보』의 해외 문화 소개 기사 가운데 음악·미술이라는 새로운 낱말이 출현하는 것도 이러한 전반적인 기운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이즈음 한국인 경영의 사진관이 이미 출현하였고, 수입 물품 목록에는 양지(洋紙)·연필·양필(洋筆)·악기·촬영기(사진기)·회화·조각이라는 품목이 들어 있었다. 1899년 보스(Vos)라는 서양인 화가가 고종과 황태자의 등신대 초상화를 그리기에 이른다.
    그 뒤 1900년에 프랑스의 레미옹(Remion)이 공예 미술 학교 설립을 위하여 서울에 왔다가 여의치 못하여 4년간 소일하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1900년에 고희동(高羲東)이 일본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유학,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서양화를 전공하게 된 배후에는 레미옹으로부터 받은 인상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미옹에 의한 공예 학교 설립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기독교 선교사들의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된 배재학당·이화학당에서는 서양식 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의 찬송가와 창가에 의하여 양악에 대한 인식이 국민들 일부에서 싹트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사립 학교 외 일본의 정치적 영향 아래 설립된 공립 학교의 교과목에 양악이 포함되었다. 동시에 1901년에 도착한 독일 지휘자 에케르트(Eckert. F.)에 의하여 서양식 군악대에서 연주된 음악이 모두 서양 음악의 악조와 리듬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이후에는 양악이 주도권을 잡게 되는 기틀이 마련된다.
    대체로 흥선 대원군의 실각을 전후로 하여 조선 땅에는 서양 문물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새로운 변화를 촉진하는 데 이르렀다. 이 시기를 전통문화로부터의 전환기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서양 문화의 본격적인 영향력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와의 창조적인 대결을 통해 떳떳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875년의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시작으로 1905년 을사조약을 거쳐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탄압적인 식민 정책을 겪으면서 서양 문화의 영향은 이 땅에서 굴절될 수밖에 없었다.
    망국(亡國)이라는 민족적 비운과 일제의 식민지 통치라는 현실 아래서, 특히 일제의 의도적인 문화 정책에 의하여 학교의 교과목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른 국악이 기생 조합이라는 사회의 음지 속에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해 온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은 이제 일제의 강압 정책에 편승한 상태로서의 서양 문화와 일방적으로 접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조선 왕조를 멸망시키기 이전부터 일제는 보통학교에서의 창가 교육에 일본식 창가를 넣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양악 교육의 흐름은 일본식 양악의 방향으로 흐르다가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조선총독부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물론, 민족의 정기를 일깨울 수 있는 창가를 서양식 곡조에 의하여 창작하고 부르려던 홍난파(洪蘭坡) 등의 선구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들의 교육 배경 탓 때문인지 서양식 찬송가의 테두리를 크게 못 벗어났다.
    미술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손꼽히는 고희동이 1915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다. 그리고 중앙·휘문·보성 등 유수한 사립 학교의 도화(圖畫) 시간을 도맡다시피 하였다. 그래서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일본 혹은 프랑스에 가서 유학하는 동안 적극적인 서구적 체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상파·후기인상파·입체파·야수파·표현파·미래파 등 서구 화단의 여러 경향들이 직접·간접으로 이 땅에 도입된다. 드디어는 추상 미술이라고 통칭되는 구성주의나 순수주의 또는 절대주의와 같은 일련의 기하학적 추상 작품들마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서구 회화에의 동화 과정에서 대부분의 화가들은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회화 양식을 택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주변의 생활 내용을 주제 삼아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자신과 주변의 생활 내용에는 물론 식민지적 현실이 포함됨 직하나, 실상 일제 강점기 초기의 화가들 중 대부분은 일제 식민 통치의 가혹함을 그다지 절실하게 경험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유주의적·개인주의적 생활 양식을 익혔고 이를 작품에 반영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1920년대에 들어서 조선미술전람회(鮮展)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식민지적 현실이나 사회적인 주제는 극도로 기피되었다. 그 대신 아름다운 것,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930년대 후반을 거쳐 1940년대에 이르러 인상파를 극복하려는 작가들과 인상파를 자신의 체질로 육화하려는 작가들도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다양한 예술 운동이 전개된 것 같지만, 여러 가지 유파가 동시에 수용되면서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혼란은 작가들의 노력이 새로운 예술 양식과 결합되어 있는 의식과는 무관하였기에 빚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여하간에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시 체제 아래 일본이 미술계에다 보국(報國)을 요청하면서 한국 화단은 맥없이 이에 무너져 들어갔다.
    당시의 선전 심사 위원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시국하 국민 정신을 반영하여 화제 내용으로 유목적(遊牧的)인 것은 자취를 감추고 자숙 긴장하여 실제적인 것이 많다. 또, 군사적인 것과 총후(銃後) 국민 생활에 관한 것 등 시국에 직접 관계되는 것이 많이 출품되었다.” 이 말은 예술이 선전으로 바뀔 수밖에 없게 되었음을 웅변으로 증명해 주는 사례라 아니할 수 없다.
    음악과 미술에서 본 전반적인 경향은 기타의 예술 분야에서도 대체로 일치한다. 예컨대, 연극의 경우, 봉건적인 사회 체제 속에서 제값을 인정받지 못하던 민속극이 일제에 의하여 탄압되었다. 그 대신 한국 내의 일본인들을 위한 오락거리를 제공한다는 명목 아래 감상적인 신파극이 이 땅의 연극 풍토를 장악하였다. 이 무렵 유치진(柳致眞)을 비롯한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신극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극 운동은 서양의 근대극들을 소개하고 때로는 이와 비슷한 수법으로 창작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하였다. 이 신극운동이 오늘날 차차 자리를 잡아가는 우리나라의 창작 연극을 위한 기초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선각자들 중에는 일본 군국주의라는 정치 권력의 강압에 굴복한 사례를 남긴 이도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1920년대 중엽은 서구 문학의 직접적·간접적 영향 아래 탐미주의적 문학이 일어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문학과 사회 의식을 고취하는 이른바 신경향파의 문학이 일어났던 것은 괄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서 일본 군국주의의 발전에 따르는 위기의식이 이 땅을 휩쓸면서 소위 현실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는 순수 문학이 배태되었다.
    그리고 이들마저 활동이 금제되던 1940년대에 많은 작가들이 일제에 굴복하게 되는 것에서 우리는 식민지 체제 아래 문학이 겪은 운명을 보게 된다.
  1. 5. 광복 이후의 예술 상황
    해방 직후(1945.8.15∼1948.8.15.)에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상황의 격동에 따라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좌·우익의 구분에 따른 수많은 단체와 조직들이 명멸했다. 그러나 그 혼돈의 와중에서도 이후 6·25 전쟁 전후 시기와 대별할 때 매우 고양된 문화·예술 활동이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방 직후 문화 예술인들의 대응이 가장 먼저 표출된 사건은 좌익 문학인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문학건설본부의 결성이었다. 이 조직은 이후 조선문학가동맹(1945.12)으로 변화했다. 이에 대응하여 우익계는 전조선문필가협회(1946.4)를 결성했다.
    미술계·음악계·연극계 등에서도 이러한 사태는 마찬가지였다. 미술계의 경우는 해방 직후 정치적 성격이 아직 선명하지 않았던 조선미술건설본부가 동양화·서양화·조각·공예·아동 미술·선전 미술 등 각 분야를 망라하여 성립되었다(1945.8).
    그러나 좌익계의 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이 따로 결성되자(1945.9) 해체되어 버렸다. 이후 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을 중심으로 조선미술가동맹이 결성되었다.
    조선미술건설본부가 해체된 후 우익계의 미술 단체로는 고회동을 회장으로 한 조선미술가협회가 생겨나 두 단체가 대립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 후에는 미술동맹이 도태되고 조선미술가협회가 대한미술협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연극계의 경우도 해방 직후 아직 좌·우익의 뚜렷한 구별 없이 조선연극건설본부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이후 좌익계의 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연극건설본부 안의 좌익계와 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이 합쳐져 조선연극동맹을 발족하였다.
    일제 잔재 소탕, 봉건 유제 청산, 국수주의 배격, 진보적 민족 연극 수립, 진보적 국제 연극과의 제휴 등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그 산하에 조선예술극장 등의 극단을 두었다.
    한편 조선연극건설본부에서 이탈한 우익계 연극인들은 1947년 유치진 등이 중심이 된 극예술협회를 성립시켜 순수 연극과 순수 예술주의를 지향했다. 이후 대한민국 수립으로 좌익계 연극인 대부분이 월북해 버리자 예술협회가 연극계의 중심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단체들의 결성·해체·재결성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상황은 전체 문화·예술인들을 대표하려는 시도로 좌익계의 조선문화단체총연맹(1946.2)과 우익계의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1947.2)가 결성되는 것으로 하나의 정점을 맞는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 경우 첫째, 해방 도상의 모든 장벽을 철폐하고 완전 자주독립을 촉성하며, 둘째, 세계 문화의 이념에서 민족 문화를 창조하여 전 세계 약소 민족의 자존을 옹호한다는 등의 강령을 내세웠다.
    이로써 우리는 민족 문화를 수립하겠다는 좌·우익 공통의 명제가 현실 속에서는 합치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비정치적인 활동으로 여겨지는 음악의 경우를 들어 당시의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제1기(1945.8.15∼12.31.)에는 민족 음악에 대한 해석자의 입장에 따라 악단이 정비되고 여러 가지 조직이 결성되면서 민족 좌·우파의 틀이 잡혀갔다.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조선음악가동맹이 결성되는데(12.31), 이는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9.15 결성)과 조선음악가협회(10.22 결성)의 일부를 흡수, 7대 강령을 발표했다.
    강령은 일제 잔재 음악의 소탕, 봉건주의적 유물 음악의 청소, 음악의 국수주의적 경향 배격, 악단의 반민주주의적 세력의 추방, 민족적 음악 유산의 정당한 계승과 외래 음악의 비판적 섭취, 진보적 민주주의·민족주의 문화의 건설, 국제 음악과의 교류 협조 등으로 되어 있다.
    이 음악동맹은 12월 말에 이르러 민중 국악 운동을 내세운 국악원(10.10. 결성)과 연계되어 민족 좌파로서 골격을 형성하였다.
    그러면서 고려교향악협회-고려교향악단, 조선음악가협회(10.22. 결성), 이왕직아악부의 후신 구왕부아악부가 연계된 민족 우파와 대립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제2기(1946.1.1∼1947.8.15.)에는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신탁 통치안(1945.12.27)이 알려진 뒤 민족 현실에 대한 정치적 입장에 따라 좌·우익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벽두에 음악동맹은 국악원과 함께 조선문화단체총연맹(문련)에 참여하여 집단 역량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특히 1946년 8월 15일부터 1년 동안 스스로 내건 강령을 구체화시키고자 했다.
    같은 시기에 전국음악문화협회가 현제명(玄濟明)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우익을 대표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채동선(蔡東鮮)을 중심으로 한 고려음악협회가 결성되어(1947.2), 음악동맹의 비조선적 유물론이나 현제명 세력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민족 자결 정신 아래 정통 음악 예술의 연구 창작 및 연주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우익 주도적 입장을 내세웠다.
    채동선은 반탁을 표방하여 우익의 조직체와 맥을 같이 하였다. 그러나 이후 제3기에는 미군정과 당국의 문화 정책 및 사대주의적 극우파를 신랄히 비판한다. 이 점에서 새로운 길로 들어선 것으로 말해진다.
    제3기(1947.8.15∼1948.8.15)는 미군정과 관계 당국이 좌익 계열의 모든 단체들을 비합법적 단체로 규정한 1947년 8월 15일부터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 1년간이다.
    이때 문련뿐 아니라 민주주의 민족 전선 산하의 모든 정당·사회 단체·음악 단체가 불법화되었다. 음악단으로는 국악원·조선가극동맹·대중음악가협회 그리고 음악동맹이 해당된다.
    음악동맹을 제외한 다른 단체들은 자체 조직 개편으로 변화된 상황에 대응하였다. 하지만 음악동맹의 김순남(金順南) 등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진다. 그러나 월북한 그는 북한에서도 1953년에 ‘반동 예술인’의 하나로 숙청되어 악보 그리는 작업으로 연명하다가 1986년 타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6. 정부 수립 이후의 문화예술
    1948년 8월 15일 남쪽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북쪽에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들어섰다. 이로써 해방 후 통일된 민족 국가를 건설하려던 민족의 염원은 좌절되었다. 더구나 6·25 전쟁으로 인한 남북 분단의 고착화는 좀체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민족 성원들에게 안겨 주었다.
    월북·체포·구금·처형·잠적·자수·납치·살해 등의 단어들은 비단 앞에서 예시된 음악의 세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분단 상황 아래 전개된 민족 문화 예술은 남·북 그 어느 쪽도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다.
    그러나 문화·예술은 자유를 생명으로 삼는다는 전제에서 본다면, 자유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대한민국에서 상대적으로나마 좀더 넓은 발전의 여지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1. 6.1. 제1기 정부 수립부터 휴전까지
      정부가 수립되었다고는 하나 식민지적 상황으로 인해 국가 건설에 필수적인 경제적 기반이 붕괴된 상태였다. 그리고 사상 대립으로 인한 치명적인 혼란과 6·25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겹치면서 문화·예술은 뿌리를 내릴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전쟁을 겪는 동안에는 예술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 역시 빈곤과 공포 속에 떨어야 했다. 본래의 예술과는 구별되는 선동·선전 기능의 수행이 그나마 공식적인 활동의 거의 전부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순수 예술을 지향하는 예술 활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반일을 내세우면서도 인력 부족 등을 이유로 친일적 요소가 철저하게 정리되지 못한 상태였다.
      더욱이 미국의 대중문화가 밀려들자 주체적인 민족 문화의 건설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휴전 협정은 또 하나의 단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1. 6.2. 제2기 휴전에서 5·16까지
      1953년 7월 휴전을 맞이했으나,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좀처럼 복구되기 어려웠다. 더구나 국가 안보를 명목으로 국가 권력을 1인 내지 1당 독재 체제 아래 영속시키려는 부정·부패는 민족정기를 더욱 흐리게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도 끈질긴 예술적 노력들은 적지 않은 성과와 새로운 시도들을 낳았다.
      우선 특징적인 것은 전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실존주의에 의지한 예술적 산물들이 특히 문학 분야를 중심으로 하여 큰 흔적을 남긴 것이다. 이들은 대개 전후의 정신적·물질적 폐허 앞에서 인간 조건에 대한 삶과 죽음 그리고 생존의 근거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그리고 나름대로 휴머니즘에 입각한 답변을 시도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들로는 손창섭의 「혈서」, 장용학의 「요한시집」·「원형의 전설」, 선우휘의 「불꽃」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점차 문화적으로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영향권 안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유학 등의 정보 유입을 통해 당대 서구 모더니즘 예술 사조들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미술 분야에서 이제까지의 구상적 아카데미즘의 고루한 양식에 반대하여 나타난 1950년대 말의 앙포르멜 운동은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예술 작품들은 자칫 현실과는 유리된 상태에서, 고전적인 미학 원리의 중심 개념인 독특한 쾌로서의 미를 추구하는 것이, 예술의 전부인 듯한 태도를 반사적으로 고집하게 하는 역작용도 낳았다.
      그리고 대다수의 예술 작업들은 전쟁과 장기집권의 실정으로 인해 고통과 혼란 중에 있는 민족 성원들이 그 와중에서도 지켜 나가야 할 진정한 가치를 충분히 공유할 수 있게 해 주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다만 그러한 정황에서도 「사상계」(1953.4)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지식인들의 비판적 노력과 실존주의 예술 경향을 계승한 사회 고발적인 예술 산물들의 성과들에 대해서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좌절과 체념 그리고 실의에 빠져 있던 민족 성원들에게 1960년의 4·19 혁명은 분명 하나의 혁명이었다. 이를 계기로 타성에 젖어 있던 기성세대 역시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를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동시에 민족의 장래에 대해 어떤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 참여를 감행했으면서도 결코 현실 정치의 담당 세력일 수 없는 학생들의 한계가 정치적인 군부 세력에 의해 가시화되고 말았다.
    1. 6.3. 제3기 5·16부터 제5 공화국까지
      1961년 5월 16일 헌정 질서는 중단되고 대한민국은 군사 독재라는 또 하나의 암초에 올라앉고 말았다. 반공을 국시로 삼고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는 군사 정권은 이른바 근대화를 위한 개발 독재를 강력히 추진해 갔다. 이러한 정책은 공과를 불문하고 우리 삶의 양태를 크게 변화시켰다.
      농촌의 파괴와 도시화, 특히 도시 주변에 대량의 빈민 거주 지역의 증대, 공업의 발달과 유흥 사업의 번창, 도시의 아파트 군들의 성립과 새로운 소비 문화적 생활 양식의 정착, 대중문화의 막대한 보급과 발전 등으로, 아직도 유교적인 전통의 잔재가 사라지지 않고 있던 우리의 삶의 양식은,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산업화를 뒷받침하는 서구화와 좀체 양립하기 힘든 민족 주체성의 확립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 보려는 시도가 정부의 입장에서건 민간의 입장에서건 그리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의 문화 정책은 이 과정에서 대체로 관 주도적인 양태로 지속되었다. 이미 5·16 군사 정변 이후 포고령을 통해 모든 문화·예술 단체를 해체시켰다. 그리고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맹(1962. 1)을 결성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관 주도의 양태는 이후 민족 성현을 기리기 위한 조각물들이나 건축물을 세우는 것을 국가의 문화 정책과 동일시한다거나, 심지어 국전에 새마을부를 설치하고, 새마을 영화·연극을 권장하며, 음반에 이른바 건전 가요를 삽입하게 하는 등의 활동 양식에서도 더욱 분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활동 양식은 민간 부문으로부터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60년대의 경우 문화 예술 영역에서의 새로운 특질은 한편으로는 4·19 혁명이 북돋아 준 희망을 계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 양식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리얼리티와 감수성을 반영하려 한 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순수·참여 논쟁이야말로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사건이었다. 이 논쟁은 결국 가까이는 해방 공간, 멀리는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지는 예술과 사회 참여의 문제를 다시금 변화하는 1960년대의 상황에 맞추어 제기한 것이었다.
      즉, 예술은 사회의 문제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문학과 예술은 근본적인 인간 통찰이나 파악으로서 사회 현실에 참여하려 함은 어렵다는 주장 사이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비록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김수영)라는 범상치 않은 통찰이 제기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논쟁 자체는 보다 심도 있게 전개되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동시에 이 시기부터 한글 세대라고 통칭되는 신세대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세대들의 경험을 표출해 낼 수 있었던 것 역시 특기할 만하다.
      문학 분야에서의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무진기행」 같은 작품들이나 미술에서의 추상 표현주의 양식의 대두, 무용 분야에서의 현대 무용의 적극적인 도입, 연극 분야에서의 부조리극 소개 등의 현상은 이를 말해 준다.
      1970년대는 1960년대의 추세가 더욱 그 윤곽이 뚜렷해진다. 경제 성장의 성과와 후유증이 점차 명확해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그래서 사회의 모순과 갈등에 주목하고 문학과 예술이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한 변화하는 삶의 리얼리티를 예술이라는 매체의 기능과 한계에 입각하여 더욱 심도 있게 드러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이 두 경향은 서로 공존하면서 우리 문화의 두께를 더했다.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특히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대중 매체의 급속한 보급을 통해 막대한 양의 대중문화 산물들이 분출된 것이다. 이로써 문화 예술의 상업성이 증대되는가 하면, ‘청년 문화’로 불리는 청소년 중심의 대중 사회적 하위 문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에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1960년대 후반에 창간되었지만 이 시기부터 적극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창작과 비평」 그리고 1970년대에 창간된 「문학과 지성」 두 계간지의 역할이었다.
      이들은 1960년대의 순수·참여 논의를 한 차원 넘어서서 문화와 예술이 사회적 삶의 총체와 연관된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편집을 고수함으로써 사회적 삶에 대한 예술 문화의 대응력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탈춤 보급 운동에서 출발하여 마당극 또는 민족극으로 불리는 새로운 양식을 창출해 낸 문화 운동도 주목할 만하다. 이 시기의 성과물로는 우선 김지하의 「오적」으로 대표적인 저항시들, 황석영의 「객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으로 대표되는 현실의 모순과 갈등을 드러낸 작품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장호 감독의 영화「별들의 고향」, 김민기의 대중가요 「아침이슬」, 최인호의 소설들에서 엿볼 수 있는 좀더 대중적인 문화 분야의 성과들 역시 특기할 만하다. 동시에 음악·무용·미술 분야에서의 적극적인 현대화의 시도들이나 박경리의 「토지」 혹은 여타 분야에서 예술적 심도를 더한 성과들 역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집권 세력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1979년 10월 26일 18년간 권좌에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신군부에 의해 정권이 계승되면서 민주화에 대한 희망의 불꽃은 다시 한 번 폭풍 앞에 서게 되었다. 신군부에 의한 공포 정치는 예술의 무기력함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한 동시에 예술의 적극적인 무기화를 선언하게 하는 상황을 낳았다.
      거의 전 예술 분야에서 ‘민족 예술’ 혹은 ‘민중 예술’이라는 기치 아래 예술의 적극적인 사회적 영향력 행사를 실험하는 운동이 펼쳐졌다.
      수많은 노동 시·노동 소설이 쓰여졌으며, 마당극·현장극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극 운동, 판화나 걸개그림으로 대표되는 민족 미술 운동, 운동 가요의 보급으로 대표되는 노래 운동, 또 무용에서의 새로운 흐름들이 연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좀더 장기적인 예술 문화의 증진과 자체 단련을 꾀하는 흐름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성장의 과실에 힘입어 예술 각 분야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들이 나타났다. 연극이나 춤 등의 공연 예술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양상은 이전 시기와 비교할 때 폭발적인 공연의 증가와 관객 증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기반이 잡혀 있던 미술·음악 분야에서도 전시와 음악회의 폭발적인 증대 현상이 나타났음은 마찬가지이다.
      또한 유학이나 상호 방문 공연 등의 행사를 통한 국제적인 정보 교류의 증대는 각 영역에서 날로 변화하는 현대 사회의 생활 양식에 대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예술의 토대 마련을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여러 가지 굴곡에도 불구하고 국제 사회에서의 대한민국 위상의 고양은 우리의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고무했다. 그리고 맹목적이었던 서구 추종의 양태를 좀더 주체적인 대응의 양상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음악 분야에서 국악 보급 운동이라든가 춤 분야에서 해외 공연의 증대 등의 현상이 이를 입증한다.
      1987년 6월 29일 드디어 이른바 6·29선언이 이루어지고, 사회 각 분야와 함께 예술도 이제까지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시기를 또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 6.4. 제4기 6·29 선언 이후 현재까지
      6·29 선언 이후 출판 부문에서는 출판사 등록 전면 개방(1987.10.19.)을 비롯하여 판금 도서 해제(1987.10.19, 650종의 판금 대상에서 431종 해제), 출판사 등록 절차 개선과 간행물 납본 제도 개선(1988.7.30.), 월북 작가의 작품 출판과 공산권 자료 개방(1988∼)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공연 예술 부문에서는 금지 가요 해제(1987.8.18.)를 비롯하여 동구권·미수교국 예술 작품 국내 개방(1988.6), 월북 음악가의 곡 해제(1988.10.27.), 공연법 시행령 개정(1989.1.1.)으로 인한 공연물 대본의 사전 심의제 폐지 등의 조치가 있었다.
      6·29 선언은, 집권 세력의 자기 정당화를 위한 치레 행사라고 해석되면서, 국민 일부로부터 ‘당신들의 축제’라는 빈축을 샀던, 1988년 서울올림픽에 대한 문화·예술인들의 참여를 자발적인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개·폐회식의 성공은 국제화 시대에 대비한 한국 문화·예술인들의 자기 확인에 크게 기여했다. 개별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세계적인 보편성에 호소할 수 있는 문화 발전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더구나 1990년 1월 3일 문화 정책을 전담하는 독립된 중앙 행정 부서인 문화부가 탄생했다. 그러나 문화 창조력의 제고, 문화 매개 기능의 확충, 국민의 문화 향수 기회 확대, 국제 문화 교류의 증진 등이 포함된 장기 계획이 2년여 기간 동안 추진되는 과정에서 과거와 마찬가지로 관 주도적인 일회성의 행사나 전시 행정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리고 정부 당국의 투자 의지가 미약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또한 정부가 현대 사회에서 가장 주요한 방송 매체를 아직도 단지 보도 혹은 홍보 매체로 인식하고 있다. 더욱이 정권 홍보의 매체로 인식함으로써 정보화와 국제화라는 조류에 맞설 수 있는 건전한 대중문화의 창출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어느 정도 정당하다 하겠다.
      특히 문화 산업 전반에 대한 정책의 미흡과 무관하지 않은 열악한 문화 산업은 상업주의적인 발상에서 제작된 외국의 정교한 문화 상품들에 대한 종속을 조장하고 있다. 이로써 아직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일제의 잔재 위에 또 다른 폐해가 겹치게 될 위험이 생겨나고 있다.
      정보화와 세계화에 대한 대비만큼이나 시급한 것이 통일에 대한 대비이다. 물론 통일이라는 과제가 우리가 당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우리에 대한 의견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술 활동이 정치적인 분위기 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각계의 많은 인사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은 남·북한의 문화·예술 교류에서 우리가 주도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 나가야 한다는 의식을 묵시적으로나 현시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남·북한의 문화·예술 교류에서 대결 의식은 그 현실성이 어느 정도 인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남·북한간의 문화 교류가 진정한 통일 문화의 형성을 그 이념으로 설정하는 한, 극복되어야 한다.
      통일을 지향하는 문화, 또는 통일 이후 민족적 동질성을 확립하기 위한 통일 문화란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민족적인 보편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 문화’이다.
      흔히 전통문화를 통한 민족적 동질성의 회복이 통일 문화 형성에 중요한 매개물로 기대한다. 하지만 남·북한이 각각 진행해 온 전통문화 연구의 성과 자체를 서로에게 알린다 할지라도 원형적인 상태의 탐색이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동질성의 회복을 위해 생활 문화 영역을 포함하여 전통문화 유산을 확인하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은 그것을 민족의 현재 및 미래 생활을 위해 가장 바람직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현대 예술의 경우에도 남·북한이 함께 상찬하는 문화, 즉 피지배지 시기에 민족적 양심을 지킨 문화인들의 작품 발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원리적으로는 남·북이 서로가 상대편의 이념적인 견고성을 격파하기 위해 자기편의 첨단적인 작품을 강요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견해가 경청될 만하다.
      그리고 동질성을 회복하려고 서둘기보다는 일단 이질성을 확인하고 상대방에게 미래를 위해 적극적으로 기여할 만한 요소를 찾아내어 공유하고자 하는 노력이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무언가를 바치기 위해 쌓아 올린 곳
주02
높은 그릇
주03
주04
마음을 보냄
주05
예법에 맞는 몸가짐
주06
머리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왔다 갔다 함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개정 (1997년)
김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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