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진시 ()

성진군읍지
성진군읍지
인문지리
지명
함경북도 남단 동해안에 있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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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성진시는 함경북도 남단 동해안에 있는 시이다. 숙신·읍루·예맥·옥저·말갈·부여 등 여러 종족이 활동하는 영역이었는데 고구려의 영토로 통합되었다. 거란과 여진, 몽골의 관할하에 있다가 고려 말엽부터 동북면의 길주에 속하게 되었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천혜의 양항이 있는 항구도시로 배후지의 광산개발과 풍부한 전력을 이용한 중화학공업이 발달하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정착하여 교회 사업을 펼치면서 종교도시로 유명해졌다. 1951년 12월 성진시와 학성군이 김책군으로 바뀌었다. 1961년 12월 김책군이 김책시로 되어 종전의 학성군까지 김책시로 편입되었다.

정의
함경북도 남단 동해안에 있는 시.
개관

동쪽은 동해에, 남서쪽 · 서쪽 · 북쪽은 학성군에 둘러싸여 있다. 동경 129°08′∼129°14′, 북위 40°39′∼40°43′에 위치하며, 면적 62.75㎢, 인구 9만 4172명(1945년 현재)이다.

본(本) · 욱(旭) · 행(幸) · 남(南) · 쌍포(雙浦) · 서(西) · 성현(城峴) · 양호(楊湖) · 흥평(興坪) · 농성(農城) · 송중(松中)의 11개 동이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본동이다.

자연환경

이 시의 주위에는 소규모의 성진평야가 전개되어 있고, 시의 동부 동해안은 성진만을 형성하며, 서부는 마천령산맥의 영향이 미치는 낮은 산지이다.

이 시는 학두산(鶴頭山)을 진산(鎭山)으로 하며, 시가의 중심부를 한천천(漢泉川)이 동류하면서 시를 남북으로 나누고, 시의 북쪽에는 쌍포천(雙浦川)이 시계를 이루면서 동류하여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성진항은 남쪽의 청학반도(靑鶴半島)와 북쪽의 유진단(楡津端)이라는 육계도인 교구반도(交龜半島)의 사이에 있어 간만의 차와 풍파가 적고 수심이 깊으며 겨울에는 얼지 않는 천연의 양항이다. 기후는 해안에 있으므로 비교적 온난하다. 연평균 기온 8℃, 1월 평균 기온 -6℃, 8월 평균 기온 22℃이며, 연 강수량은 696㎜이다.

역사

[고 대]

신석기시대의 유물인 빗살무늬토기가 시내에서 나온 바 있고, 두만강변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었다. 인접지인 경성 · 청진 등지의 해안에서 조개무지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이 지역에도 최소한 신석기 시대 이후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숙신(肅愼) · 읍루(읍婁) · 예맥(濊貊) · 옥저(沃沮) · 말갈(靺鞨) · 부여(夫餘) 등 여러 종족이 활동하는 영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는 이들을 완전히 통합하면서 영토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668년(보장왕 27)에 멸망한 이후에는 한때 당(唐)나라의 지배에 들어갔으나 얼마 뒤 고구려 유민을 중심으로 발해가 건국되면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고 려]

후삼국시대를 거쳐 한반도를 다시 통일한 고려의 영토는 황해도 북계에서 동해의 원산만에 이르는 선의 이남 지역이었으므로, 이 지역은 고려 건국 초기에는 고려 세력권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해가 거란(契丹)에 의하여 멸망한 뒤에는 거란의 영역이 되었다. 발해가 멸망할 때 이탈한 일부 말갈족 집단인 여진(女眞)이 강성해져서 거란을 멸망시키고 금(金)을 건국하자 그 영토가 되었다. 다시 몽고족에 의하여 원(元)나라가 건국되자 역시 그 관할하에 있게 되었다.

한편 금나라가 멸망한 뒤 여진족은 두만강 유역으로부터 점차 함경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고려의 국경 부근에서 자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고려 말엽 원나라가 쇠퇴하고 1368년 명(明)나라가 건국되면서, 고려의 북진정책이 실효를 거두어 여진을 몰아내니 그 세력 범위는 두만강 하구에 이르렀다. 과거 여진의 소파온성(所坡溫城)이 있던 이 고장은 동북면(東北面)의 길주(吉州)에 속하여 있었다.

[조 선]

1398년(태조 7) 정도전(鄭道傳)으로 하여금 북도의 행정구역을 분정하게 할 때 이곳은 길주목 성진첨사(城津僉使) 관하의 성진진(城津鎭)이었다.

1614년(광해군 6) 소파온고성 자리에 석성을 쌓고 첨사(僉使)를 두었다가 1701년(숙종 27)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였다. 1749년(영조 25)에 첨사로 하여금 방수장(防守將)을 겸직하게 하였다가 1895년에 폐지되었다.

[근 대]

1898년에는 길주군 성진첨사 관하의 성진진과 동해면 일부 및 함경남도 단천군 이하면 좌측을 합한 지역을 분할하여 성진군으로 독립되었다. 다음해 마산 · 군산과 더불어 개항장(開港場)이 됨에 따라 외국인 거류 구역이 설정되면서 일개 어촌이 차츰 항구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길주군에서 독립되자 성진 주민 중 일부와 길주 군민이 합세하여 성진군의 분리를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키자 다시 군이 합쳐지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1904년 완전히 독립되었다.

지금의 성진시는 당시 성진군 관하 7개 면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이 분규가 종식되자 러일전쟁이 일어나 러시아 군대가 이곳을 점령하고 포대를 구축하였으므로 한때 크게 전화를 입기도 하였으나, 종전과 더불어 차츰 개항장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였다. 특히, 일찍부터 외국인 선교사들이 정착하여 여러 가지 교회 사업을 펼치면서 종교도시로서도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성진항은 천혜의 양항으로서 항내에는 일반 부두와 어항 저목장 등이 각각 따로 건설되어 도시 발전의 중요 여건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1931년 지정면에서 읍으로 승격하였다.

다시 배후지의 지하자원과 임산 개발에 의한 광석과 목재의 집산항으로 발전함과 동시에 고주파 제강 공장 및 마그네사이트 · 내화연와 공장(耐火煉瓦工場) 등이 잇따라 건설됨에 따라 공업도시로서도 크게 번창하여 1943년에는 인접지인 학성면 · 학상면 · 학중면 등의 일부 동리를 병합하여 성진시로 승격되었으며, 성진군의 나머지 각 면은 학성군이 되었다. 1945년 당시 호구는 1만 7741호 9만 4172명에 달하였다.

유물 · 유적

근대 이전에는 한적한 어촌이었던 이 지역에는 특별한 유적이 없다. 다만 온고성(溫古城)이라 칭하는 너비 2m, 길이 666m의 토성지가 과거의 성진심상고등학교 소유인 임야에 남아 있었다.

또한, 1614년에 축성하였다는 석성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이 성곽은 과거 성진진에 속한 성지였다고 한다. 성진진의 외성으로는 성진진의 뒷산 산정에 좌우로 나뉘어 540m씩 석축이 남아 있을 뿐이다.

교육 · 문화

조선시대에는 길성현에 속하였으므로 이곳의 교육은 길주에 있던 길성현의 향교에서 담당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1년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Grierson, R.)이 남녀공학인 보신학교(普信學校)와 협신중학교(協信中學校)를 최초로 설립하였다. 1907년 성진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고, 이어 보신여학교가 개교하였다.

1940년을 전후하여 성진공립중학교와 성진공립여학교 및 나병기(羅秉箕)가 설립한 성진실천고등여학원(城津實踐高等女學院), 김성우(金聲宇)가 설립한 중앙보육학원 등이 개교하였다. 1945년 현재 학교 상황을 보면 유치원 3개소,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2개교 등이 있다.

이 고장은 1898년에 개항되어 여러 번 행정구역의 변천을 거듭한 신흥도시라 향토적 민요의 발전을 보지 못하였고, 다만 근대요(近代謠)로 불리고 있는 노래가 유행될 뿐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대평아리랑」과 「 애원성(哀願聲)」을 들 수 있다.

「대평아리랑」은 이 지방의 자연환경과 부녀자의 생활을 나타낸 것으로, 그 가사를 1절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리 아리랑 시리 시리랑/아라리가 났네/어정 얼시고 젊어지게 노자/아리 아리랑 시리 시리랑/아라리가 났네/두둥실 둥실 산채 뿌리 맛보자.”

또한, 「애원성」은 이 고장의 역사가 말해 주듯이 만남과 헤어짐의 애환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노래의 가사 중 1절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에헤에 얼사 좋다/어럴럴 거리고 상사디야 에헤에/술 취한 강산에 호걸이 춤추고/돈 없는 천지에 영웅도 우노나/에헤에 어허얼사 좋다/어럴럴 거리고 상사디야.”

이 고장에 전승된 민속놀이로는 지난날 사자놀이와 횃불놀이 등이 있었으나 근대도시로 발전함에 따라 옛 민속은 사라지고 오직 세시풍속으로 윷놀이 · 널뛰기 · 그네뛰기 · 연날리기 · 씨름 등이 일부 지역에서 행하여지고 있다.

을 중심으로 겨울에는 윷놀이가 대표적이고 널뛰기 · 연날리기도 있으며, 단오에는 그네뛰기와 널뛰기가 성행되고, 추석에는 특히 씨름 · 연날리기 · 그네뛰기 등을 볼 수 있다.

윷놀이에 있어서의 윷가락은 함경북도 일대가 콩윷을 쓰고 있으나 이곳에서는 대부분 나무윷을 쓰며, 북부 지방은 실내 오락으로 국한되어 있으나 옥외에서도 많이 행해진다.

그리고 부녀자들은 달맞이윷점이라는 것이 있어서 소반 위에 청아수를 떠 놓고 한쪽 면을 깎아 흰 칠을 한 4가락의 윷과 『당년수책』이라는 점서(占書)를 준비한 다음 연령순으로 보름달에 절하고 윷 세 번을 굴려 나온 백면의 수를 가지고 점서에 의하여 그해의 길흉을 가린다.

이곳에는 지난날 전통적인 민간 신앙으로 농촌에서는 산천제(山川祭)를, 어촌에서는 용신제(龍神祭)를 지내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시가지 주변의 순농촌에서만 산천제의 풍습이 남아 있고, 어촌의 용신제는 풍어제(豊漁祭)로 그 모습이 변모되었다.

산천제는 마을에 괴질이나 맹수의 피해가 없도록 산천신의 가호를 비는 치성으로서, 매년 정월 중순경 택일하여 부락 내 정결한 곳에 임시로 제단을 만들어 행사한다.

재가에서 소임 몇 사람이 제수를 마련하며 소나 돼지를 잡고 예주 · 시루떡 · 백미 · 백초 · 과일 등을 제물로 바친다. 의식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음복하고 수육은 집집마다 나누어 먹는다.

산업 · 교통

이 지역은 관북 지방의 주요 항구도시로서, 1930년대 일본의 중국 동북 지방 개발에 따라 대륙과 일본 간의 물자 반출입 및 중화학공업 지역으로 급격히 발전하였다.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보리 · 콩 등을 생산한다.

근해에서는 명태 · 대구 · 정어리 · 고등어 · 방어 · 가자미 · 낙지 등의 어획이 많으며, 통조림 · 어유 등 수산 가공업도 활발하다. 광업으로 인상흑연 · 마그네사이트 · 고령토 · 석탄 등이 산출된다.

공업은 배후지의 광산 개발과 더불어 풍부한 전력을 이용한 고주파 제강 공장, 마그네사이트 · 내화벽돌 공장, 몰리브덴 · 텅스텐 등의 금속 · 제련 · 제재 및 유지 화학을 비롯한 중화학공업이 발전하였다.

1928년 함경선이 개통되고 개마고원의 개발을 위한 혜산선이 개통됨에 따라 길주 · 명천 · 무산 · 단천 · 이원 · 북청 · 풍산 · 갑산군 등이 성진의 상권에 포함되면서 성진은 이들 지역에서 생산되는 콩 · 한우 · 목재의 대일본 수출항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나진 · 청진이 점차 교역항으로 발전하자 성진은 무역항으로서의 구실보다는 중화학공업 제품과 수산물의 수송항으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지난날의 융성하였던 우시장이나 곡물 시장은 자취를 감추고 매일장인 성진공설시장이 형성되었다.

이곳에서는 곡류 · 야채 · 신탄 · 일용 잡화와 생선 · 염어 · 건어 · 곤포류 등의 각종 도산매가 성황을 이루며, 인근 학성군 내의 산간지대에서 송이 · 산채 · 약재 등 임산 부산물이 집하되기도 한다.

교통은 서울과 웅기를 잇는 국도가 마천령을 지나 성진에 이른 뒤 길주로 이어지며, 함흥경성을 잇는 함경선 철도가 시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여 길주에서 혜산선과 연결된다. 해운은 성진에서 단천 · 청진 및 일본 서안으로 통하는 항로가 있다. 그리고 시의 동쪽 청학반도에는 청학공원이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

청학반도는 동해에 돌출한 작은 반도의 형상이 학과 같다 하여 청학단(靑鶴端)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노송이 울창하고 노송 사이사이에 벚나무가 우거져 동해의 푸른 바다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명승지이다.

공원 한쪽 높은 절벽 위에는 망양정(望洋亭)이 있고, 그 옆에 소나무가 서 있다. 함북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공원으로 석기시대의 유적 산채(山寨)와 많은 유물을 포함하는 지층이 분포되어 있으며, 러일전쟁 당시의 포대가 있다.

광복 후 변천

1951년 12월 성진시와 학성군이 김책군으로 바뀌었으며, 1961년 12월 김책군이 김책시로 되어 종전의 학성군까지 김책시로 편입되었다.→김책시

참고문헌

『길주군읍지, 함북대관』(금성덕, 정문사, 1967)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1985)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함경북도지』(함경북도지편찬위원회,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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