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 전기, 왕의 의식(衣食)과 관련된 일이나 종실의 보첩(譜牒)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청.
설치 목적
기능과 역할
이후 명칭 및 직제 개편을 토대로 조선시대에는 종부시(宗簿寺)로 정착되어 『선원보첩(璿源譜牒)』을 편찬하고, 종실의 허물과 잘못을 규찰하는 관청으로 존속하였다.
변천사항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에 목종(穆宗) 때에 전중성이 있고, 그곳에 감(監), 소감(少監), 승(丞), 내급사(內給事) 등을 두었다고 나온다. 하지만 984년(성종 3)에 전중승(殿中丞), 990년(성종 9)에는 전중감(殿中監)의 사례 등을 찾을 수 있어, 다른 관서들과 같이 중국의 제도를 대폭 수용한 983년(성종 2) 무렵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 뒤 고려의 문물제도를 완성한 문종(文宗) 때 전중성의 직제는 판사(判事, 정3품) · 전중감(종3품) · 전중소감(殿中少監, 종4품) · 전중승(종5품) ·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종6품) 등의 관원으로 되어 있었다. 이속(吏屬)으로는 주사(主事, 4인) · 영사(令史, 4인) · 서령사(書令史, 4인) · 기관(記官, 4인) · 산사(算士, 1인) 등을 두어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전중성의 명칭은 그 뒤 전중시(殿中寺)로 바뀌기도 하였고, 1298년(충렬왕 24)에는 다시 종정시(宗正寺)로 개칭되었다. 이는 고려 후기 원(元)나라의 내정 간섭으로 실시된 관제 개혁에 의해 고려의 전통적인 관부 명칭이 소멸되고 격하된 것이다.
1310년(충선왕 2)에는 종정시가 다시 종부시(宗簿寺)로 바뀌고, 친족의 보첩만 관장하게 되었다. 그 뒤 공민왕(恭愍王)이 국권 회복을 위한 개혁 정치의 일환으로 관제 개혁을 여러 차례 실시했으나, 전중성만이 고려의 전통적인 명칭과 그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고 관부 명칭에서 전중성이라는 이름은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경국대전(經國大典)』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 『원사(元史)』
단행본
- 박용운, 『『고려사』 백관지 역주』(신서원, 2009)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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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모시어 받듦.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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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고려 시대에 둔 육국(六局)의 하나. 포설을 맡아보던 관아로 충렬왕 34년(1308)에 사설서로 고쳤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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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유복친 안에 들지 않는, 같은 성을 가진 일가붙이.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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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어떤 사람이 속한 국적이나 본적.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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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족보로 된 책.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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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모두 거느려 다스리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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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술과 과일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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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
: 조선의 왕실 및 그 일족(一族)의 보첩.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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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9
: 고려 시대에, 왕실의 족보를 맡아보던 관아. 목종 때에 전중성을 고친 것으로, 충렬왕 24년(1298)에 종정시로 고쳤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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