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권 15책. 목판본. 이 책은 1761년(영조 37)에 손자 진응(震應)에 의하여 경상감영에서 간행되었다. 문인 윤봉구(尹鳳九)의 서문이 있다.
권1에 시 307수, 권2·3에 소(疏) 26편, 권4∼20에 서(書) 187편, 권21에 잡저 9편, 권22에 서(序) 3편, 기(記) 12편, 제발(題跋) 49편, 찬(讚) 2편, 권23에 제문 24편, 고문(告文) 8편, 축문 15편, 애사 3편, 권24에 신도비 13편, 정비(庭碑) 3편, 권25∼28에 묘갈 39편, 권29·30에 묘지 18편, 권31∼33에 묘표 65편, 권34에 행장 9편 등이 수록되었고, 연보 등이 1권으로 되어 있다.
수록 내용의 양이나 편수를 기준으로 보면 시와 서(書)가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고, 묘갈·제문류가 그 다음으로 많다. 그의 학문적 업적이나 사상사적 위치는 서(書)와 잡저에서 그 내용을 볼 수 있다.
권4의 <상우암선생 上尤庵先生>·<답박세채 答朴世采>, 권10의 <답어유봉 答魚有鳳>, 권11의 <답성만징 答成晩徵>·<답이이근 答李頤根>, 권12의 <답한원진 答韓元震>·<답윤봉구 答尹鳳九>·<답최징후 答崔徵厚>·<답이간 答李柬>·<답현상벽 答玄尙璧> 등의 서간문은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는 학파적 계통과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그의 문인 한원진과 이간이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라는 주제를 놓고 각각 대립된 주장을 전개하였다. 이 때 그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는 이간의 학설을 반대하고, 인물성이론을 주장하는 한원진의 학설을 지지하여, 이른바 ‘호락시비(湖洛是非)’라는 학파적 성격의 논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조선 후기 유학사에 학술토론문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으며,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을 잇는 기호학파 계승의 일인자가 되었다.
권21의 잡저 중 <태극도설시계문겸시현석 太極圖說示季文兼示玄石>·<논성설 論性說>·<사칠호발변 四七互發辨> 등에는 태극·음양·심성이기(心性理氣)·사단칠정에 관한 그의 견해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숭현서원통론중외문 崇賢書院通論中外文>은 송시열을 봉향할 때 돌린 통문이다. <기사행중어록 己巳行中語錄>은 기사환국 때 남인에 의해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기 전에 남긴 말을 기록한 것이다. <초산어록 楚山語錄>은 그 해 6월 8일 송시열이 사사되었을 때, 그에게 도통을 이어주고 후사를 부탁한 말들을 기록한 것이다.
권2의 소 가운데 <변우암선생피무소 辨尤庵先生被誣疏>는 스승 송시열에 대한 변무소(辨誣疏)로, 스승에 대한 절절한 경모(敬慕)의 정을 나타낸 글이다. 송시열의 제자에는 윤증(尹拯)·김창협(金昌協) 두 계통이 있는데, 윤증은 송시열과 견해차로 인해 이른바 소론(少論)으로 분파되었으며, 김창협은 학문과 문예에 뛰어났으나 후진 양성에는 권상하에 미치지 못하여 계통을 잇지 못하였다.
≪한수재집≫은 조선 후기 유학사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이며, 권상하의 학파 계통을 정리하는 가장 귀중한 문헌 자료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조용승(曺龍承)에 의해 단행본으로 영인되었다. 이 영인본에는 유묵·유상(遺像)과 행장·묘지명·묘표·변사무소(辨師誣疏)·황강문답(黃江問答) 등의 기록들이 보완되었다. 규장각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