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순조 30) 정규한의 아들 정수린(鄭秀麟)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1830년에 쓴 송흠대(宋欽大)의 서문, 권말에 1825년에 쓴 정재풍(鄭在豊)의 발문이 있다. 서문에 따르면 저자는 문장이 부섬(富贍)했으면서도 문장을 내세우지 않았고 학문이 정밀하고 독실했음에도 학문을 내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6권 3책. 목활자본. 장서각 도서와 규장각 도서 등에 있다. 규장각 고도서본은 9권 4책으로 서문은 없고 권말에 발과 동일한 정재풍의 지(識)가 있는 필사본이다. 장서각 도서에도 목활자본 6권 5책이 있다.
권1에 사(詞) 7편, 부(賦) 2편, 시 185수, 권2∼4에 서(書) 22편, 권5에 서(序) 6편, 기(記) 7편, 발(跋) 1편, 잡저 7편, 잠(箴) 2편, 명(銘) 9편, 송(頌)·전(箋)·전책(殿策) 각 1편, 상량문 3편, 권6에 제문 20편, 축문 2편, 행록 4편, 묘갈명 1편, 전(傳) 1편, 부록으로 행장·묘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사 가운데 「신추재야경(新秋齋夜景)」은 보살만(菩薩蠻)에 가사를 넣은 것이다. 시에는 주희(朱熹)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의 영향을 받은 작품인 「추유화양동(秋遊華陽洞)」 10수가 있다. 성리학 연구에 전념한 인물답게 철학적인 기풍이 강하다. 「관물(觀物)」로 제목을 붙인 작품이 자주 보이는 것도 이에 연유하며, 화산(華山)에서 은거하며 성리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성정(性情)을 노래한 시가 많다. 「팔음시(八音詩)」나 「십이진시(十二辰詩)」 등의 이체시(異體詩)도 들어 있다.
서(書)는 주로 성리학·『주역』·예학에 관한 것으로, 박종열(朴宗悅)·송환기(宋煥箕)·정만석(鄭晩錫)·정재면(鄭在勉)·정재풍·정재응(鄭在應) 등에게 보낸 것이다. 그 가운데 박종열과의 편지에는 『주역』과 『중용』에 대한 성리 철학적 견해가 들어 있는데, 그 내용이 방대하여 당대인의 관심을 끌었다.
권4의 후반부에는 송환기의 시호에 대한 것, 유계(兪棨)·정시(鄭蓍) 등의 제사에 대한 것, 동산서원(東山書院)과 천동서원(泉洞書院)의 사액(賜額)에 대한 것들이 있다. 그 가운데 잡저는 성리 철학을 논하고 있거나, 훈학(訓學)·향약절목(鄕約節目)에 대한 것이다. 「전책」은 1790년(정조 14)에 지은 것으로, 당대인에게 널리 알려진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