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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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령은 전북특별자치도 임실 지역의 옛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거사물현이었으나 통일신라시대인 757년에 청웅현이 되었다. 신라 10정의 하나였던 거사물정이 있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거령현으로 불렸으며, 영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의 오수면, 삼계면, 지사면 일대가 해당한다. 전북특별자치도의 장수군·남원시·순창군과 행정구역을 접하며,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남원시를 연결하는 순천완주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거령 (居寧)
거령은 전북특별자치도 임실 지역의 옛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거사물현이었으나 통일신라시대인 757년에 청웅현이 되었다. 신라 10정의 하나였던 거사물정이 있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거령현으로 불렸으며, 영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의 오수면, 삼계면, 지사면 일대가 해당한다. 전북특별자치도의 장수군·남원시·순창군과 행정구역을 접하며,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남원시를 연결하는 순천완주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광덕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지역의 지명이다. 광덕이라는 지명은 부처의 덕을 널리 베푼다는 뜻으로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광덕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757년 수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후기인 1290년 유청신이 원나라로부터 호두나무의 열매와 묘목을 처음 들여온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광덕면이 되어 천안군에 편입되었고, 1963년에 천원군 광덕면이 되었다. 1995년 천안시 광덕면이 되었다가 2008년에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으로 개편되었다.
광덕 (廣德)
광덕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지역의 지명이다. 광덕이라는 지명은 부처의 덕을 널리 베푼다는 뜻으로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광덕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757년 수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후기인 1290년 유청신이 원나라로부터 호두나무의 열매와 묘목을 처음 들여온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광덕면이 되어 천안군에 편입되었고, 1963년에 천원군 광덕면이 되었다. 1995년 천안시 광덕면이 되었다가 2008년에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으로 개편되었다.
담진은 고려 전기에 예종의 왕사·국사로 활동한 선종 승려이다. 생몰년 미상이며, 언제 누구에게 출가하였는지도 알 수 없다. 문종 연간에 송에 유학해 정인 도진의 법을 전수받았다. 예종 대에는 왕사와 국사를 역임하며, 선을 강설하는 등 여러 법회를 주관하였으며, 왕명으로 요본대장경을 들여오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하산하여 정혜사를 창건하고 그곳에서 지내다 입적하였다.
담진 (曇眞)
담진은 고려 전기에 예종의 왕사·국사로 활동한 선종 승려이다. 생몰년 미상이며, 언제 누구에게 출가하였는지도 알 수 없다. 문종 연간에 송에 유학해 정인 도진의 법을 전수받았다. 예종 대에는 왕사와 국사를 역임하며, 선을 강설하는 등 여러 법회를 주관하였으며, 왕명으로 요본대장경을 들여오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하산하여 정혜사를 창건하고 그곳에서 지내다 입적하였다.
보천사는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매봉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하였다고 추정되는 절이다. 고려 충렬왕의 아들 왕소군이 요양한 곳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1959년 절터에서 석조 여래 좌상이 발견되어 보호각을 세운 뒤 여러 건물들을 신축하였다. 석조 여래 좌상은 구미 해평리 석조여래좌상이라는 이름으로 1968년 12월 19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관리, 운영되고 있다.
보천사 (寶泉寺)
보천사는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매봉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하였다고 추정되는 절이다. 고려 충렬왕의 아들 왕소군이 요양한 곳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1959년 절터에서 석조 여래 좌상이 발견되어 보호각을 세운 뒤 여러 건물들을 신축하였다. 석조 여래 좌상은 구미 해평리 석조여래좌상이라는 이름으로 1968년 12월 19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관리, 운영되고 있다.
순천시는 평안남도 중부 대동강 중류 연안에 있는 시이다. 고려시대 정융군이 설치됐고, 983년 외적의 침입을 막아 편안하게 되었다는 뜻을 담아 순주로 개칭하고 방어사를 파견하였다. 1413년 순천군으로 개칭했고, 1983년 순천시로 승격하였다. 주요 산업은 농업과 제조업이다. 농업은 벼와 옥수수를 중심으로 한 곡물 생산 위주로 이루어지며, 공업은 풍부한 석회석 자원을 기반으로 한 시멘트공업과 채굴, 화학공업이 주를 이룬다. 2008년 기준 면적은 368㎢, 인구는 29만 7317명이다. 행정구역은 21동, 11리로 구성되어 있다.
순천시 (順川市)
순천시는 평안남도 중부 대동강 중류 연안에 있는 시이다. 고려시대 정융군이 설치됐고, 983년 외적의 침입을 막아 편안하게 되었다는 뜻을 담아 순주로 개칭하고 방어사를 파견하였다. 1413년 순천군으로 개칭했고, 1983년 순천시로 승격하였다. 주요 산업은 농업과 제조업이다. 농업은 벼와 옥수수를 중심으로 한 곡물 생산 위주로 이루어지며, 공업은 풍부한 석회석 자원을 기반으로 한 시멘트공업과 채굴, 화학공업이 주를 이룬다. 2008년 기준 면적은 368㎢, 인구는 29만 7317명이다. 행정구역은 21동, 11리로 구성되어 있다.
억정사는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에 있었던, 고려 전기에 창건한 절이다. 대지 국사 찬영이 머물다 입적하였으며, 그 후 그의 제자인 선진 대선사가 주석하였다. 1424년 불교 종파의 통폐합과 함께 전국에 36개 사찰만 남기는 사찰 혁파 조치가 내려졌는데, 이때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관련 문화유산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가 있다.
억정사 (億政寺)
억정사는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에 있었던, 고려 전기에 창건한 절이다. 대지 국사 찬영이 머물다 입적하였으며, 그 후 그의 제자인 선진 대선사가 주석하였다. 1424년 불교 종파의 통폐합과 함께 전국에 36개 사찰만 남기는 사찰 혁파 조치가 내려졌는데, 이때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관련 문화유산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가 있다.
묘향산 보현사 영산전은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 보현사 경내에 있는, 1875년에 개축한 사찰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배집이다. 보현사 동쪽으로 약 500m 있었던 건물을 현재 위치로 옮겨 왔다. 조선 전기의 건축양식이 잘 나타나 있는 건물이다.
묘향산 보현사 영산전 (妙香山 普賢寺 靈山殿)
묘향산 보현사 영산전은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 보현사 경내에 있는, 1875년에 개축한 사찰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배집이다. 보현사 동쪽으로 약 500m 있었던 건물을 현재 위치로 옮겨 왔다. 조선 전기의 건축양식이 잘 나타나 있는 건물이다.
의주군은 평안북도 북서단에 있는 군이다. 동쪽은 삼봉산을 경계로 삭주군과 접하며, 남동쪽은 천마군과 접한다. 서쪽은 신의주와 접하고, 남쪽은 소리개령과 백마산을 사이에 두고 피현군과 접한다. 북쪽으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동북 지방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420㎢, 인구는 2008년 기준 11만 18명이다. 행정구역은 1읍, 2노동자구, 17리를 관할하고 있다.
의주군 (義州郡)
의주군은 평안북도 북서단에 있는 군이다. 동쪽은 삼봉산을 경계로 삭주군과 접하며, 남동쪽은 천마군과 접한다. 서쪽은 신의주와 접하고, 남쪽은 소리개령과 백마산을 사이에 두고 피현군과 접한다. 북쪽으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동북 지방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420㎢, 인구는 2008년 기준 11만 18명이다. 행정구역은 1읍, 2노동자구, 17리를 관할하고 있다.
『해동조계복암화상잡저』는 고려 후기 승려 충지의 표, 소, 서간 등을 모아 편찬한 문집 성격의 책이다. 목판본으로 언제 발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충지가 쓴 표 5편, 소 47편, 왕복 서간 6편, 기타 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감국사가송』에 없는 글들이 포함되어 있어 충지가 남긴 글을 보충하며, 원 간섭기 충지의 대원 인식을 추가하여 살펴볼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해동조계복암화상잡저 (海東曹溪宓庵唵和尙雜著)
『해동조계복암화상잡저』는 고려 후기 승려 충지의 표, 소, 서간 등을 모아 편찬한 문집 성격의 책이다. 목판본으로 언제 발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충지가 쓴 표 5편, 소 47편, 왕복 서간 6편, 기타 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감국사가송』에 없는 글들이 포함되어 있어 충지가 남긴 글을 보충하며, 원 간섭기 충지의 대원 인식을 추가하여 살펴볼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강서구(부산광역시)는 부산광역시의 서부에 위치한 구이다. 낙동강의 본류와 지류인 서낙동강 등을 경계로 서부산권을 형성하고 있다. 가야가 건국된 후 가야 문화권에 속하였다. 1978년 부산직할시의 시역 확장에 따라 북구에 편입됐고, 1983년 부산직할시 강서출장소로 독립하였다. 1989년 경상남도의 김해군 가락면·녹산면과 의창군 천가면을 편입해 강서구로 승격하였다. 2024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182.16㎢, 인구는 14만 2789명이다. 행정구역은 9개 행정동, 22개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서구청은 대저1동에 있다.
강서구(부산광역시) (江西區(釜山廣域市))
강서구(부산광역시)는 부산광역시의 서부에 위치한 구이다. 낙동강의 본류와 지류인 서낙동강 등을 경계로 서부산권을 형성하고 있다. 가야가 건국된 후 가야 문화권에 속하였다. 1978년 부산직할시의 시역 확장에 따라 북구에 편입됐고, 1983년 부산직할시 강서출장소로 독립하였다. 1989년 경상남도의 김해군 가락면·녹산면과 의창군 천가면을 편입해 강서구로 승격하였다. 2024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182.16㎢, 인구는 14만 2789명이다. 행정구역은 9개 행정동, 22개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서구청은 대저1동에 있다.
사자빈신사는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에 있었던, 고려 전기에 창건된 절이다. 고려 후기~조선 전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022년에 건립한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이 남아 있는데, 현재 4층까지 존재한다. 네 모서리에 각 1마리씩, 4마리의 사자가 탑신을 받치고 있다. 사자의 안쪽 공간에 두건을 쓰고 지권인을 결한 인물 좌상이 놓여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은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사자빈신사 (師子頻迅寺)
사자빈신사는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에 있었던, 고려 전기에 창건된 절이다. 고려 후기~조선 전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022년에 건립한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이 남아 있는데, 현재 4층까지 존재한다. 네 모서리에 각 1마리씩, 4마리의 사자가 탑신을 받치고 있다. 사자의 안쪽 공간에 두건을 쓰고 지권인을 결한 인물 좌상이 놓여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은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현화사는 1021년 고려 현종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황해북도 장풍군에 창건한 절이다. 현화사 앞의 ‘대자은’은 자은종, 즉 유가종 소속의 사찰이었음을 명시한 것이다. 현종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창건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왕들이 이 절을 찾았다. 고려 중기 유가종의 중심인물들이 현화사의 주지를 지내는 등 유가종의 중심 사찰로 자리매김하였다. 17세기 초까지는 사찰이 유지되었던 것 같으나, 이후 언제 어떤 연유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화사 (玄化寺)
현화사는 1021년 고려 현종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황해북도 장풍군에 창건한 절이다. 현화사 앞의 ‘대자은’은 자은종, 즉 유가종 소속의 사찰이었음을 명시한 것이다. 현종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창건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왕들이 이 절을 찾았다. 고려 중기 유가종의 중심인물들이 현화사의 주지를 지내는 등 유가종의 중심 사찰로 자리매김하였다. 17세기 초까지는 사찰이 유지되었던 것 같으나, 이후 언제 어떤 연유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가정신문』은 1946년 3월 21일 이취성이 가정은 국가의 기본이라는 기치를 내걸며 발행한 일간지이다. 독자층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창간호에 "가정은 국가의 기본이요, 민족은 가족의 연장이다"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1946년 9월 26일 휴간, 1947년 3월 26일 속간되었으나 7월 26일 종간되었고, 이후 『대한일보』로 개칭, 발간되었다. 이승만을 지지한 우익지로 실질적 사장은 이종형이었다.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발행되었는데, 1면은 사설, 정치, 외신, 2면은 여성 관련 기사가 실렸다.
가정신문 (家政新聞)
『가정신문』은 1946년 3월 21일 이취성이 가정은 국가의 기본이라는 기치를 내걸며 발행한 일간지이다. 독자층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창간호에 "가정은 국가의 기본이요, 민족은 가족의 연장이다"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1946년 9월 26일 휴간, 1947년 3월 26일 속간되었으나 7월 26일 종간되었고, 이후 『대한일보』로 개칭, 발간되었다. 이승만을 지지한 우익지로 실질적 사장은 이종형이었다.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발행되었는데, 1면은 사설, 정치, 외신, 2면은 여성 관련 기사가 실렸다.
『부녀일보』는 1946년 7월 15일 구자권이 대구에서 창간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간지이다. 중도노선의 성격을 띠었다. 구자권이 사장겸 발행인이었고, 편집국장은 초기에는 최해룡, 후기에는 최석채 그리고 서석범으로 바뀌었다. 대구 지역에서 발행된 『부녀일보』는 일천오백만 여성의 계몽운동과 여성의 권익을 향상시키는데 분투 노력하기 위해 창간하였다고 밝혔다. 한달 정도 휴간 후 1946년 10월 23일 속간되었으며, 1947년 12월 24일 종간되었으며 총 발행 호수는 319호이다.
부녀일보 (婦女日報|The Lady Daily News)
『부녀일보』는 1946년 7월 15일 구자권이 대구에서 창간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간지이다. 중도노선의 성격을 띠었다. 구자권이 사장겸 발행인이었고, 편집국장은 초기에는 최해룡, 후기에는 최석채 그리고 서석범으로 바뀌었다. 대구 지역에서 발행된 『부녀일보』는 일천오백만 여성의 계몽운동과 여성의 권익을 향상시키는데 분투 노력하기 위해 창간하였다고 밝혔다. 한달 정도 휴간 후 1946년 10월 23일 속간되었으며, 1947년 12월 24일 종간되었으며 총 발행 호수는 319호이다.
『부인신문』은 1949년 2월 24일 박순천이 대한부인회를 결성하며 기존의 『부인신보』를 계승하여 발간한 여성을 대상으로한 일간지이자 대한부인회 기관지이다. 편집국장은 박주환이었다. 신문 판형은 타블로이드판 2면제였다. 1면은 정치 기사와 국제정세 관련 기사가 실렸으며 2면에는 사회, 문화, 여성단체 활동, 가정란을 비롯하여 여성 독자들을 위해 연재소설 등이 실렸다.
부인신문 (婦人新聞)
『부인신문』은 1949년 2월 24일 박순천이 대한부인회를 결성하며 기존의 『부인신보』를 계승하여 발간한 여성을 대상으로한 일간지이자 대한부인회 기관지이다. 편집국장은 박주환이었다. 신문 판형은 타블로이드판 2면제였다. 1면은 정치 기사와 국제정세 관련 기사가 실렸으며 2면에는 사회, 문화, 여성단체 활동, 가정란을 비롯하여 여성 독자들을 위해 연재소설 등이 실렸다.
『부인신보』는 1947년 5월 3일 박순천이 독립촉성애국부인회 기관지의 성격을 지니며 여성의 정치 참여를 목표로 여성을 대상으로 발간한 신문이다. 창간호에는 여성의 계몽과 단결의 도구이자 전달과 향상의 사도를 자처하며 여성의 해방의 선구자요, 조국재건에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한 종이 되고자 한다고 하였다. 일간지로서 판형은 타블로이드, 2면이었다. 1면에는 정치 관련 기사를 싣지 않고 가정, 문화 등의 기사를 실었다. 2면에는 정치, 경제, 사회 기사 등을 실었으며, 1949년 2월 『부인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부인신보 (婦人新報)
『부인신보』는 1947년 5월 3일 박순천이 독립촉성애국부인회 기관지의 성격을 지니며 여성의 정치 참여를 목표로 여성을 대상으로 발간한 신문이다. 창간호에는 여성의 계몽과 단결의 도구이자 전달과 향상의 사도를 자처하며 여성의 해방의 선구자요, 조국재건에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한 종이 되고자 한다고 하였다. 일간지로서 판형은 타블로이드, 2면이었다. 1면에는 정치 관련 기사를 싣지 않고 가정, 문화 등의 기사를 실었다. 2면에는 정치, 경제, 사회 기사 등을 실었으며, 1949년 2월 『부인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성공론』은 1946년 1월 1일 한국 여성의 해방과 계몽의 필요성을 내걸고 이경환의 주도로 창간된 좌익 계열의 여성 종합잡지이다. 1947년 7월 20일까지 총 4호가 간행되었는데, 창간 목적은 1천 5백만 여성의 계급의식 및 민족의식과 의무의 고양임을 내세웠다. 월간지를 표방하였으나 2년간 총 4호만 발행되었다. 잡지의 주요 필진으로는 유영준, 이정순, 이순금, 이주상, 한철, 이북만, 김종억 등이 좌익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여성공론 (女性公論)
『여성공론』은 1946년 1월 1일 한국 여성의 해방과 계몽의 필요성을 내걸고 이경환의 주도로 창간된 좌익 계열의 여성 종합잡지이다. 1947년 7월 20일까지 총 4호가 간행되었는데, 창간 목적은 1천 5백만 여성의 계급의식 및 민족의식과 의무의 고양임을 내세웠다. 월간지를 표방하였으나 2년간 총 4호만 발행되었다. 잡지의 주요 필진으로는 유영준, 이정순, 이순금, 이주상, 한철, 이북만, 김종억 등이 좌익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여성신문』은 1947년 4월 20일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부위원장인 황기성이 『부녀신문』을 계승하여 발행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간지이다. 황기성은 독립촉성애국부인단의 초대 회장,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부위원장, 전국여성단체총연맹의 부회장 등 여성 단체의 대표를 맡아 활동한 인물이다. 신문 판형은 타블로이드 2면판으로 발행되었으며 여성 문제에 대한 각종 칼럼과 해설, 여성 단체의 동정, 생활 정보 등의 내용은 2면에 실렸다. 창간 4개월 만인 1947년 8월경에 종간되었다.
여성신문 (女性新聞)
『여성신문』은 1947년 4월 20일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부위원장인 황기성이 『부녀신문』을 계승하여 발행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간지이다. 황기성은 독립촉성애국부인단의 초대 회장,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부위원장, 전국여성단체총연맹의 부회장 등 여성 단체의 대표를 맡아 활동한 인물이다. 신문 판형은 타블로이드 2면판으로 발행되었으며 여성 문제에 대한 각종 칼럼과 해설, 여성 단체의 동정, 생활 정보 등의 내용은 2면에 실렸다. 창간 4개월 만인 1947년 8월경에 종간되었다.
『여성일보』는 1960년 9월 1일 주간 『여성민보』를 계승하여 발행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신문이다. 김한우가 창간하였는데, 여권 확립과 사회 비판에 중점을 두고, 편파성을 배격하고 공정 신속한 보도 사명 완수를 표방하며 발간된 일간지이다. 주간지였던 『여성민보』를 계승하여 일간지로 전환하였으며, 1961년 5월 28일자가 종간호였다. 신문 발행 형태는 대판 4면의 16단제를 채택하였고, 1단 11자 체제였다.
여성일보 (女性日報)
『여성일보』는 1960년 9월 1일 주간 『여성민보』를 계승하여 발행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신문이다. 김한우가 창간하였는데, 여권 확립과 사회 비판에 중점을 두고, 편파성을 배격하고 공정 신속한 보도 사명 완수를 표방하며 발간된 일간지이다. 주간지였던 『여성민보』를 계승하여 일간지로 전환하였으며, 1961년 5월 28일자가 종간호였다. 신문 발행 형태는 대판 4면의 16단제를 채택하였고, 1단 11자 체제였다.
『여성주보』는 1960년 2월 10일, 김정례 주도로 창간되어 주간으로 발간된 여성 계몽지이다. 김정례가 발행·편집 겸 인쇄인이었고, 여성 교육, 여성 직업 보도, 가정 생활 과학화, 윤락 여성의 구호 등을 목적으로 창간한 주간지였다. 신문 판형은 대판 4면의 주간신문으로서 16단제에 1단 13자 체제를 채택하였다.
여성주보 (女性週報)
『여성주보』는 1960년 2월 10일, 김정례 주도로 창간되어 주간으로 발간된 여성 계몽지이다. 김정례가 발행·편집 겸 인쇄인이었고, 여성 교육, 여성 직업 보도, 가정 생활 과학화, 윤락 여성의 구호 등을 목적으로 창간한 주간지였다. 신문 판형은 대판 4면의 주간신문으로서 16단제에 1단 13자 체제를 채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