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화사(玄化寺)는 고려 현종(顯宗)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 안종(安宗)과 어머니 헌정왕후(獻貞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021년 창건한 절이다. 현종의 아버지 안종은 경종의 비이자 성종의 누이인 헌정왕후와 사통하여 현종을 낳았는데, 이 때문에 사천(泗川)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현종은 즉위 후인 1017년(현종 8) 4월, 사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근처로 이장하였고, 이후 명복을 빌기 위해 현화사를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1020년(현종 11) 8월 현종이 안서도(安西道)에 명하여 둔전(屯田) 1,240결(結)을 이 절에 주게 하였고, 9월에는 새로 조성한 종을 직접 타종하였다.
1021년(현종 12)에 절이 완공되자 창건 내역 등을 적은 비를 세웠는데, 제액(題額)을 현종이 직접 쓰는 등 큰 관심을 기울였다. 비문에는 절의 창건 목적과 공사, 전각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공사 감독은 최사위(崔士威: 961~1041)가 담당하였다. 절의 주지는 삼천사(三川寺) 주지였던 법경(法鏡)에게 맡겼고, 왕사(王師)로 삼았다. 절의 서북쪽에는 진전(眞殿)을 지어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의 진영(眞影)을 안치하였다. 1020년 10월에 어머니의 고향 황주 남쪽에서 진신사리가 나타났고, 아버지 안종의 능 근처 보명사(普明寺)에서 신령한 어금니가 나타나자, 현종이 사찰에 7층 석탑을 조성하게 하여 사리와 어금니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듬해 4월에는 상주 중모현(中牟縣)에서 사리 500여 과가 출현해, 이를 가져와 일부는 현화사 주불(主佛) 중심에 안치하고 나머지는 내전(內殿) 도량(道場)에 안치하였다. 처음에는 절의 강당과 금전(金殿) 터를 닦던 중에도 각각 흑색과 자색 수정 구슬을 습득하였다고 한다.
절이 완공된 후에는 중국 황제에게 표를 올리고 대장경을 청하여 들여왔다. 비문에서 확인되는 사찰 건물은 불상을 모신 금전과 진전(眞殿) 외에도 숭경전(崇慶殿), 봉래전(蓬萊殿), 회랑 등이 있다. 또 나라가 성대해지고 사직이 안녕하기를 빌기 위해 매년 봄 4월 8일부터 3일 밤낮으로 미륵보살회(彌勒菩薩會)를 열게 하였고, 부모의 천도를 위해 7월 15일부터 3일 밤낮 동안 미타불회(彌陀佛會)를 열었다.
현종이 사망한 후에는 현화사를 현종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1032년(덕종 1) 5월에 덕종이 현종의 휘신도량(諱辰道場)을 개설하였고, 1047년(문종 1)에는 문종이 다시 현종의 휘신도량을 개설하였으며, 1052년 3월에 반승(飯僧)을 베풀었다. 1054년(문종 8)에는 해린(海麟: 9841070)이 현화사 주지가 되었다. 1067년(문종 21) 9월 해린이 노환을 이유로 산으로 돌아가려 하자, 문종이 절에 들러 다약(茶藥)과 금은기(金銀器) 등의 보물을 전달하였다. 1070년(문종 24)에는 왕자 탱(竀)을 이 절에 보내어 해린 문하로 출가시켰다. 1095년(헌종 1) 태후가 선종의 소상재(小祥齋)를 베풀었고, 1102년(숙종 7)에는 숙종이 『은자유가현양론(銀字瑜伽顯揚論)』의 경찬법회(慶讚法會)에 참석하기 위해 이 절에 오기도 하였다. 이후 정종(靖宗) 대에 정현(鼎賢: 9721054), 선종 대에 소현(韶顯: 10381096), 인종 대에 천상(闡祥: ?1141), 인종 대에 덕겸(德謙: 10831150), 예종 대에 상지(尙之), 명종 대에 각관(覺觀: 11211174) 등이 이 절의 주지직을 맡았다.
개인의 명복을 현화사에서 빌었던 경우도 있었다. 정종 대~문종 대에 최항(崔沆: ?~1024)의 공적을 기려 나라에서 비용을 대고 기신재(忌晨齋)를 열었다. 최항은 현화사가 완공된 직후 금전의 기문(記文)을 지은 인물이다. 의종은 이곳에 자주 행차하여 반승과 무차대회(無遮大會), 나한재(羅漢齋) 등을 베풀었으며, 주1하기도 하였다. 현화사 장흥원(長興院)에서 과시(科試)를 보았고, 유희를 위하여 이곳 동령(東嶺)에 청녕재(淸寧齋)라는 별관을 건립하였다. 강종이 사망한 후에는 강종의 신위(神位)를 현화사에 두고 진전을 지었던 것 같다. 강종의 신위는 1216년(고종 3)에 안종 · 현종의 신위와 함께 숭교사(崇敎寺)로 옮겨졌으나, 진전은 그대로 현화사에 남겨 두었다. 1225년(고종 12) 8월 강종의 기일에 현화사의 강종 진전에 행향(行香)하고 반승을 하였다고 한다. 1276년(충렬왕 2)에는 왕이 공주와 함께 절에 와서 승지에게 불전(佛殿)을 보수하라 명하였고, 1283년에도 절을 중수할 것을 명하였다.
현화사의 폐사 연대 및 이유는 전해지지 않는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시집인 『허백당집(虛白堂集)』에서 ‘고려 현종 대 현화사를 건설한 사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큰 비석만 산기슭에 있다’고 하여, 15세기 후반에는 상당히 쇠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1485년(성종 16)에 개성을 방문하고 쓴 「송경록(松京錄)」에는, 현화사에 갔다가 승려에게 곡식을 시주하고 흰밥을 대접받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또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황해도 우봉현(牛峯縣) 불우(佛宇) 조에도 간단하나마 기록되어 있다. 김육(金堉: 1580~1658)이 1607년(선조 40)에 쓴 「천성일록(天聖日錄)」에도 현화사에 가서 사찰 건물들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17세기 초까지는 절이 유지되었던 것 같다.
현화사의 절터에는 사찰의 내력을 기록한 비석을 비롯하여 현화사 칠층석탑(玄化寺 七層石塔), 석등 등이 있었다. 현재 현화사비(玄化寺碑)는 북한 국보급 문화재 제151호이고, 현화사 칠층석탑은 북한 국보급 문화재 제139호이다. 모두 개성시에 있는 고려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석등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현화사는 고려시대에 현종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창건한 유가종의 중심 사찰이다. 고려 여러 왕들의 진전이 있었고, 왕실에서 중요시하였으며, 왕이 자주 행차하기도 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유가종의 중요 인물들이 이 절의 주지직을 지내는 등 유가종의 융성을 주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