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김지형"
검색결과 총 21건
강인택은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홍원군 3·1운동에 참여하고, 체신부장관, 감찰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2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홍원군 천도교 신자들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에는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참여하였고, 1929년에는 신간회 경성지회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광복 후 독립촉성국민회 후생부장, 체신부장관, 감찰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강인택 (姜仁澤)
강인택은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홍원군 3·1운동에 참여하고, 체신부장관, 감찰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2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홍원군 천도교 신자들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에는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참여하였고, 1929년에는 신간회 경성지회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광복 후 독립촉성국민회 후생부장, 체신부장관, 감찰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송인상은 재무부장관, 수출입은행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경제인, 관료이다. 1914년 강원도 회양군에서 태어났다. 1957년 6월 부흥부장관, 1959년 3월 재무부장관에 임명되었고, 1960~1970년대에 정부의 경제 개발 정책 추진에 적극 관여하였다. 1976년 5월에는 새로 발족된 한국수출입은행 초대 은행장에 임명되었다. 1981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86년 4월 한국능률협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송인상 (宋仁相)
송인상은 재무부장관, 수출입은행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경제인, 관료이다. 1914년 강원도 회양군에서 태어났다. 1957년 6월 부흥부장관, 1959년 3월 재무부장관에 임명되었고, 1960~1970년대에 정부의 경제 개발 정책 추진에 적극 관여하였다. 1976년 5월에는 새로 발족된 한국수출입은행 초대 은행장에 임명되었다. 1981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86년 4월 한국능률협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양성봉은 기독교계에서 활동하다가 부산부윤, 경상남도지사, 농림부장관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1900년 경상남도 동래부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기독교계에서 활동하였고, 미군정기에 부산부윤을 지냈다. 정부 수립 후에는 강원도지사, 경상남도지사, 농림부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4·19혁명 직후 반민주행위자로 지목되어 심사청구자 명단에 오르기도 하였다.
양성봉 (梁聖奉)
양성봉은 기독교계에서 활동하다가 부산부윤, 경상남도지사, 농림부장관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1900년 경상남도 동래부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기독교계에서 활동하였고, 미군정기에 부산부윤을 지냈다. 정부 수립 후에는 강원도지사, 경상남도지사, 농림부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4·19혁명 직후 반민주행위자로 지목되어 심사청구자 명단에 오르기도 하였다.
유완창은 미군정청 신한공사 부총재, 중앙토지행정처 처장, 관재청장, 초대 부흥부장관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1906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광복 후 미군정청 신한공사 부총재를 지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는 중앙토지행정처 처장, 관재청장 등을 역임하고, 1955년 초대 부흥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56년 5월 의원면직 형태로 하차하였다. 1960년 4·19혁명 후 서울시 공민권 제한 대상자 조사위원회에서 소환장을 발부한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다.
유완창 (兪莞昌)
유완창은 미군정청 신한공사 부총재, 중앙토지행정처 처장, 관재청장, 초대 부흥부장관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1906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광복 후 미군정청 신한공사 부총재를 지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는 중앙토지행정처 처장, 관재청장 등을 역임하고, 1955년 초대 부흥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56년 5월 의원면직 형태로 하차하였다. 1960년 4·19혁명 후 서울시 공민권 제한 대상자 조사위원회에서 소환장을 발부한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다.
윤기익은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고 미군정 고문 등으로 활동한 광산업자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광산학을 배운 후 1906~1908년 궁내부 관리로 일하였다. 또한 독립협회 활동을 후원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내내 광산업에 종사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미군정이 위촉한 고문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윤기익 (尹基益)
윤기익은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고 미군정 고문 등으로 활동한 광산업자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광산학을 배운 후 1906~1908년 궁내부 관리로 일하였다. 또한 독립협회 활동을 후원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내내 광산업에 종사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미군정이 위촉한 고문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전규홍은 미군정청 사법부 행정차관, 제헌국회 초대 사무총장, 주프랑스 공사, 서독 특명전권대사 등을 역임한 공무원이다.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본과 미국에서 법학 등을 전공하였고, 미주 흥사단 시카고지부에 입단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청 사법부 행정차관, 입법의원 사무총장, 제헌국회 초대 사무총장, 총무처장, 주프랑스 공사, 서독 특명전권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5·16 직후 정치정화법에 따라 강제로 사회 활동을 정지당하였다.
전규홍 (全奎弘)
전규홍은 미군정청 사법부 행정차관, 제헌국회 초대 사무총장, 주프랑스 공사, 서독 특명전권대사 등을 역임한 공무원이다.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본과 미국에서 법학 등을 전공하였고, 미주 흥사단 시카고지부에 입단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청 사법부 행정차관, 입법의원 사무총장, 제헌국회 초대 사무총장, 총무처장, 주프랑스 공사, 서독 특명전권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5·16 직후 정치정화법에 따라 강제로 사회 활동을 정지당하였다.
전용순은 금강제약소 사장, 미군정 고문, 서울시 참의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으로 활동한 기업인이자 정치인이다. 1901년 경기도 개성부에서 태어났다. 도쿄에서 약학을 배웠으며, 1930년대 경성에서 금강제약소를 경영하는 등 제약업으로 성공하였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위촉한 11명의 고문 중 한 명으로 활동하였다. 1960년 제5대 서울시 참의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민주당 구파 동지회의 원내총무로 활동하였다. 1961년 4월에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당선되었다.
전용순 (全用淳)
전용순은 금강제약소 사장, 미군정 고문, 서울시 참의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으로 활동한 기업인이자 정치인이다. 1901년 경기도 개성부에서 태어났다. 도쿄에서 약학을 배웠으며, 1930년대 경성에서 금강제약소를 경영하는 등 제약업으로 성공하였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위촉한 11명의 고문 중 한 명으로 활동하였다. 1960년 제5대 서울시 참의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민주당 구파 동지회의 원내총무로 활동하였다. 1961년 4월에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당선되었다.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은 1960년 4 · 19 혁명 직후 진보적 청년들이 서울과 부산 등지를 중심으로 조직한 통일 운동 단체이다. 김배영, 김영광, 우홍선 등이 참여하였으며 혁신 정당인 사회당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한미경제협정 반대 운동, 2대 악법 반대 운동, 남북학생회담 지지 운동 등 사회 운동, 통일 운동을 적극 주도하였다. 이듬해 5 · 16 군사정변 세력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구성원들이 투옥되었다.
통일민주청년동맹 (統一民主靑年同盟)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은 1960년 4 · 19 혁명 직후 진보적 청년들이 서울과 부산 등지를 중심으로 조직한 통일 운동 단체이다. 김배영, 김영광, 우홍선 등이 참여하였으며 혁신 정당인 사회당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한미경제협정 반대 운동, 2대 악법 반대 운동, 남북학생회담 지지 운동 등 사회 운동, 통일 운동을 적극 주도하였다. 이듬해 5 · 16 군사정변 세력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구성원들이 투옥되었다.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南朝鮮解放戰略黨事件)은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공안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권재혁 등 13명에 대하여 “국가 전복을 꾀하는 조직을 만들었다.”라는 혐의를 적용하였고, 주모자로 지목된 권재혁을 이듬해 11월 사형 집행하였다. 2009년 4월, 진실화해위원회는 중앙정보부가 이 사건을 조작했다고 발표하였으며, 2011년 1월 14일 재심 결과, 사건 관계자 4인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南朝鮮解放戰略黨事件)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南朝鮮解放戰略黨事件)은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공안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권재혁 등 13명에 대하여 “국가 전복을 꾀하는 조직을 만들었다.”라는 혐의를 적용하였고, 주모자로 지목된 권재혁을 이듬해 11월 사형 집행하였다. 2009년 4월, 진실화해위원회는 중앙정보부가 이 사건을 조작했다고 발표하였으며, 2011년 1월 14일 재심 결과, 사건 관계자 4인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주도한 세력이 만든 정치 조직이다. 쿠데타 직후 만들었으며, 사흘 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장도영 육군중장을 위원장으로 내세웠으나 실질적인 책임자는 박정희 소장이었다. 헌법적 근거가 전혀없는 쿠데타 세력의 임의 조직으로서 강제로 입법, 사법, 행정권을 장악하고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 (軍事革命委員會)
군사혁명위원회는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주도한 세력이 만든 정치 조직이다. 쿠데타 직후 만들었으며, 사흘 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장도영 육군중장을 위원장으로 내세웠으나 실질적인 책임자는 박정희 소장이었다. 헌법적 근거가 전혀없는 쿠데타 세력의 임의 조직으로서 강제로 입법, 사법, 행정권을 장악하고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도예종은 8·15광복 이후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전개한 진보적 활동가이다. 4·19혁명 직후 대구 지역에서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도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964년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이듬해 사형당하였으나, 2007년 재심 결과 무죄 판결을 받았다.
도예종 (都禮鍾)
도예종은 8·15광복 이후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전개한 진보적 활동가이다. 4·19혁명 직후 대구 지역에서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도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964년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이듬해 사형당하였으나, 2007년 재심 결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서도원은 민주화, 통일운동을 전개한 진보적 사회운동가이다. 1950년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4.19혁명기에 조직된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경상북도연맹 결성시 초대위원장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 여러 차례 공안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바 있으며,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2007년 1월 서도원 등에 대한 재심 결과,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혐의 등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었다.
서도원 (徐道源)
서도원은 민주화, 통일운동을 전개한 진보적 사회운동가이다. 1950년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4.19혁명기에 조직된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경상북도연맹 결성시 초대위원장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 여러 차례 공안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바 있으며,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2007년 1월 서도원 등에 대한 재심 결과,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혐의 등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었다.
5·18 특별법은 1995년 12월 19일에 여야 합의에 따라 국회가 제정한 12 · 12군사반란 및 5 · 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특별법이다.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라고 한다. 1980년대 이후 이어져온 5·18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에 따라 1988년부터 국회 차원의 진상 조사와 관련 청문회가 진행되었으며, 1993년 김영삼 정부 등장 후부터 본격적인 사회적 논의가 전개되면서 1995년 12월에 5·18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5·18특별법 (五一八特別法)
5·18 특별법은 1995년 12월 19일에 여야 합의에 따라 국회가 제정한 12 · 12군사반란 및 5 · 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특별법이다.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라고 한다. 1980년대 이후 이어져온 5·18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에 따라 1988년부터 국회 차원의 진상 조사와 관련 청문회가 진행되었으며, 1993년 김영삼 정부 등장 후부터 본격적인 사회적 논의가 전개되면서 1995년 12월에 5·18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남북공동유해발굴사업은 1950년 6.25전쟁 당시 사망한 남북한 참전 군인들의 유해를 남과 북이 공동으로 발굴하는 사업이다. 공동 발굴 합의 후 실제로 북한이 호응하지 않음으로써 남측 단독으로 진행하였다. 1차로 화살머리고지에서 발굴 사업을 마친 데 이어 2차로 백마고지에서 발굴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남북공동유해발굴사업 (南北共同遺骸發掘事業)
남북공동유해발굴사업은 1950년 6.25전쟁 당시 사망한 남북한 참전 군인들의 유해를 남과 북이 공동으로 발굴하는 사업이다. 공동 발굴 합의 후 실제로 북한이 호응하지 않음으로써 남측 단독으로 진행하였다. 1차로 화살머리고지에서 발굴 사업을 마친 데 이어 2차로 백마고지에서 발굴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남북군사공동위원회는 1991년 남북 불가침 보장과 군사적 신뢰의 조성 및 군축을 실현하기 위해 추진된 남북 간 협의 기구이다. 1992년 5월에 개최된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채택한 '남북군사공동위원회 구성 · 운영에 관한 합의서'에 따라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과 준수를 위해 마련되었다. 그리고 남북기본합의서 제2장의 남북 간 불가침 조항을 보장하기 위한 남북 공동 위원회의 성격을 띠었다.
남북군사공동위원회 (南北軍事共同委員會)
남북군사공동위원회는 1991년 남북 불가침 보장과 군사적 신뢰의 조성 및 군축을 실현하기 위해 추진된 남북 간 협의 기구이다. 1992년 5월에 개최된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채택한 '남북군사공동위원회 구성 · 운영에 관한 합의서'에 따라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과 준수를 위해 마련되었다. 그리고 남북기본합의서 제2장의 남북 간 불가침 조항을 보장하기 위한 남북 공동 위원회의 성격을 띠었다.
남북협력기금은 1990년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남북 교류 및 협력을 위하여 조성하는 공적 자금이다. 1990년 8월 1일 제정된 「남북협력기금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자금을 확보, 공급하고자 조성하였다. 정부, 통일부가 남북 교류 협력 사업에 긴요한 지원 자금을 마련하는 데 출연금 또는 차입 등의 방식으로 기금을 조성할 수 있다.
남북협력기금 (南北協力基金)
남북협력기금은 1990년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남북 교류 및 협력을 위하여 조성하는 공적 자금이다. 1990년 8월 1일 제정된 「남북협력기금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자금을 확보, 공급하고자 조성하였다. 정부, 통일부가 남북 교류 협력 사업에 긴요한 지원 자금을 마련하는 데 출연금 또는 차입 등의 방식으로 기금을 조성할 수 있다.
남북화해공동위원회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해 구성하기로 합의한 남북 간 운영 기구이다. '남북기본합의서' 제1장에서 합의한 남북 화해 분야의 이행을 위해 구성, 운영하기로 하였다. 1991년 12월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1992년 2월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이를 발효하였다. 더 나아가 1992년 9월 제8차 회담에서 '남북화해공동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 발효하였다.
남북화해공동위원회 (南北和解共同委員會)
남북화해공동위원회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해 구성하기로 합의한 남북 간 운영 기구이다. '남북기본합의서' 제1장에서 합의한 남북 화해 분야의 이행을 위해 구성, 운영하기로 하였다. 1991년 12월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1992년 2월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이를 발효하였다. 더 나아가 1992년 9월 제8차 회담에서 '남북화해공동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 발효하였다.
고난의 행군(苦難의 行軍)은 1996년부터 1999년까지 경제적, 대외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북한의 대응 태세이다. 1994년 김일성 사망과 경제난 이후 발생한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설정하였다. 북한은 역사적으로 세 차례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 번째는 1938년 김일성 항일 빨치산 부대의 100일 가까운 행군, 두 번째는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전후한 시기, 세 번째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인데, 흔히 고난의 행군은 가장 최근의 경험인 세 번째 사례를 지칭한다.
고난의 행군 (苦難의 行軍)
고난의 행군(苦難의 行軍)은 1996년부터 1999년까지 경제적, 대외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북한의 대응 태세이다. 1994년 김일성 사망과 경제난 이후 발생한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설정하였다. 북한은 역사적으로 세 차례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 번째는 1938년 김일성 항일 빨치산 부대의 100일 가까운 행군, 두 번째는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전후한 시기, 세 번째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인데, 흔히 고난의 행군은 가장 최근의 경험인 세 번째 사례를 지칭한다.
'우리 민족끼리'는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을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북한의 선전 구호이다. 북한은 2000년 6·15공동선언 합의 직후부터 이 구호와 표현을 적극 내세우기 시작했으며 남북 간 공조 및 연공(聯共)의 의미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남북관계와 통일문제 해결에서 자주적 성격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로 쓰인다.
우리민족끼리 (우리民族끼리)
'우리 민족끼리'는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을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북한의 선전 구호이다. 북한은 2000년 6·15공동선언 합의 직후부터 이 구호와 표현을 적극 내세우기 시작했으며 남북 간 공조 및 연공(聯共)의 의미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남북관계와 통일문제 해결에서 자주적 성격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로 쓰인다.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은 1993년 4월 7일 북한 김일성이 제기한 대남 통일 강령이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 회의에서 총리 강성산의 보고 형식으로 발표되었으나, 실은 김일성이 직접 제기한 것이다. 이 강령의 정식 명칭은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에 발표된 점에서 당시 대남정책의 성격을 띠었다.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 (全民族大團結十大綱領)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은 1993년 4월 7일 북한 김일성이 제기한 대남 통일 강령이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 회의에서 총리 강성산의 보고 형식으로 발표되었으나, 실은 김일성이 직접 제기한 것이다. 이 강령의 정식 명칭은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에 발표된 점에서 당시 대남정책의 성격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