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임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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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협은 고려대학교 총장, 문교부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관료이다. 1920년 전북 부안 출생으로 일본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정치과를 졸업했다. 해방 후 고려대학교 교수로 지내며 문교부 장관, 동아일보사 이사를 지냈다. 고려대학교 제6대 총장으로 취임하고 1982년 국무총리가 되었다. 대학적십자사 총재로 재임하며 1985년 남북적십자회담을 개최하고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의 교환 방문을 성사하였다. 고려대 명예총장직을 수행하다 1995년 사망했다. 국민훈장모란장, 수교훈장 광화대장 등을 받았다.
김상협 (金相浹)
김상협은 고려대학교 총장, 문교부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관료이다. 1920년 전북 부안 출생으로 일본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정치과를 졸업했다. 해방 후 고려대학교 교수로 지내며 문교부 장관, 동아일보사 이사를 지냈다. 고려대학교 제6대 총장으로 취임하고 1982년 국무총리가 되었다. 대학적십자사 총재로 재임하며 1985년 남북적십자회담을 개최하고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의 교환 방문을 성사하였다. 고려대 명예총장직을 수행하다 1995년 사망했다. 국민훈장모란장, 수교훈장 광화대장 등을 받았다.
백두진은 해방 이후 재무부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08년 황해도 신천 출생으로, 1934년 일본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한 후 해방까지 조선은행에서 근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외자총국장, 1951년 재무부 장관, 1953년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재무장관 시절인 1951년 「임시토지수득세법」을 통과시켰으며, 1953년 통화팽창을 수습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이후 민의원, 국회의원, 국회의장 등을 역임하였고, 10·26사건 이후 공직에서 물러난 후 1993년 사망하였다.
백두진 (白斗鎭)
백두진은 해방 이후 재무부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08년 황해도 신천 출생으로, 1934년 일본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한 후 해방까지 조선은행에서 근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외자총국장, 1951년 재무부 장관, 1953년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재무장관 시절인 1951년 「임시토지수득세법」을 통과시켰으며, 1953년 통화팽창을 수습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이후 민의원, 국회의원, 국회의장 등을 역임하였고, 10·26사건 이후 공직에서 물러난 후 1993년 사망하였다.
신형식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건설부 장관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26년 전남 고흥 출생으로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흥지역구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되자 다음 날 유신이 새로운 역사의 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지지 의사를 밝혔다. 1976년 12월 4일 개각을 통해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었다가 197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79년 10·26사건의 여파로 1980년 8월 사회정화사업에 따라 모든 재산을 헌납하고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신형식 (申泂植)
신형식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건설부 장관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26년 전남 고흥 출생으로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흥지역구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되자 다음 날 유신이 새로운 역사의 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지지 의사를 밝혔다. 1976년 12월 4일 개각을 통해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었다가 197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79년 10·26사건의 여파로 1980년 8월 사회정화사업에 따라 모든 재산을 헌납하고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용문은 해방 이후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수도사단장, 남부지구 경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다. 1916년에 태어나 1953년에 사망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주둔 참모본부인 대본영에서 근무하였다. 남방전선으로 전속되었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현지인의 도움으로 풀려나 귀국하였다. 귀국 후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48년 육사 제8기 특대생으로 소령에 임관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군의 중립을 내세우며 병력 차출 명령을 거부하였다가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1953년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지휘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이용문 (李龍文)
이용문은 해방 이후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수도사단장, 남부지구 경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다. 1916년에 태어나 1953년에 사망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주둔 참모본부인 대본영에서 근무하였다. 남방전선으로 전속되었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현지인의 도움으로 풀려나 귀국하였다. 귀국 후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48년 육사 제8기 특대생으로 소령에 임관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군의 중립을 내세우며 병력 차출 명령을 거부하였다가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1953년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지휘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최두선은 해방 이후 민주국민당 부위원장,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언론인, 교육자이다. 1894년 서울 출생으로 육당 최남선의 동생이다. 1917년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 졸업 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이 되었고, 조선어연구회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독일 유학 후 귀국해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복임했다. 1947년 동아일보사 사장, 1953년 민주국민당 부위원장, 1963년 제3공화국 초대 내각의 총리로 활동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와 1968년 와세다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2년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수여 받았다.
최두선 (崔斗善)
최두선은 해방 이후 민주국민당 부위원장,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언론인, 교육자이다. 1894년 서울 출생으로 육당 최남선의 동생이다. 1917년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 졸업 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이 되었고, 조선어연구회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독일 유학 후 귀국해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복임했다. 1947년 동아일보사 사장, 1953년 민주국민당 부위원장, 1963년 제3공화국 초대 내각의 총리로 활동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와 1968년 와세다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2년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수여 받았다.
1965년 일반의약품인 진통제 속에 합성마약 메사돈(Methadone)이 포함되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사건.
메사돈마약사건 (methadone麻藥事件)
1965년 일반의약품인 진통제 속에 합성마약 메사돈(Methadone)이 포함되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사건.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대회에서 채택한 선언.
자유언론실천선언 (自由言論實踐宣言)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대회에서 채택한 선언.
한미 미사일 양해각서는 1979년 한국이 미국에게 미사일 개발 제한을 약속하면서 써준 각서이다. 미국은 한국의 미사일 개발에 필수적인 기술과 부품을 지원하면서 사거리 180km 이상은 개발하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한국은 지대지 미사일 백곰을 발사하여 성공했지만 이 각서에 의해 미사일과 로켓 시스템 개발에 막대한 제약을 받았다. 이후 1996년 대량살상무기 비확산정책협의회를 통해 사거리 300㎞로 합의하였고, 2001년 이 양해각서를 공식적으로 폐기하였다. 한국은 MTCR에 정식 가입하였고, 미사일의 사정거리가 늘어났으며 탄두 중량의 제한도 없어졌다.
한미 미사일 양해각서 (韓美 missile 諒解覺書)
한미 미사일 양해각서는 1979년 한국이 미국에게 미사일 개발 제한을 약속하면서 써준 각서이다. 미국은 한국의 미사일 개발에 필수적인 기술과 부품을 지원하면서 사거리 180km 이상은 개발하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한국은 지대지 미사일 백곰을 발사하여 성공했지만 이 각서에 의해 미사일과 로켓 시스템 개발에 막대한 제약을 받았다. 이후 1996년 대량살상무기 비확산정책협의회를 통해 사거리 300㎞로 합의하였고, 2001년 이 양해각서를 공식적으로 폐기하였다. 한국은 MTCR에 정식 가입하였고, 미사일의 사정거리가 늘어났으며 탄두 중량의 제한도 없어졌다.
한일각료회담은 한·일 관계 전반에 관한 사항을 비롯해 국제정세, 안전보장문제 등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국의 관계 각료들이 참석해 개최한 회담이다. 1967년 「정-사토 회담」을 통해 합의하여 1차는 8월 도쿄, 2차는 이듬해 8월 서울에서 열렸다. 이후에도 한·일 간의 외교 갈등으로 연기, 취소되기도 했으나 매년 서울과 도쿄에서 번갈아 열렸다. 이 회담을 통해 한·일 양국은 경제협력문제와 무역불균형문제, 재일한국인 법적 지위문제 등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으며, 재일한국인 지문날인제 폐지 등의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한일각료회담 (韓日閣僚會談)
한일각료회담은 한·일 관계 전반에 관한 사항을 비롯해 국제정세, 안전보장문제 등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국의 관계 각료들이 참석해 개최한 회담이다. 1967년 「정-사토 회담」을 통해 합의하여 1차는 8월 도쿄, 2차는 이듬해 8월 서울에서 열렸다. 이후에도 한·일 간의 외교 갈등으로 연기, 취소되기도 했으나 매년 서울과 도쿄에서 번갈아 열렸다. 이 회담을 통해 한·일 양국은 경제협력문제와 무역불균형문제, 재일한국인 법적 지위문제 등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으며, 재일한국인 지문날인제 폐지 등의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한일협력위원회는 1969년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발족한 민간기구이다.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두 나라의 현안문제를 논의하는 강력한 협력체제의 필요성에 따라 설립되었다. 창립총회와 제1회 합동위원회는 도쿄에서 개최되었는데, 정계·재계·학계·문화계의 유력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현안문제를 구체적으로 시정하거나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1970년 중국 저우언라이의 ‘4원칙’이 발표된 것을 계기로 점차 그 존재가 약화되었다.
한일협력위원회 (韓日協力委員會)
한일협력위원회는 1969년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발족한 민간기구이다.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두 나라의 현안문제를 논의하는 강력한 협력체제의 필요성에 따라 설립되었다. 창립총회와 제1회 합동위원회는 도쿄에서 개최되었는데, 정계·재계·학계·문화계의 유력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현안문제를 구체적으로 시정하거나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1970년 중국 저우언라이의 ‘4원칙’이 발표된 것을 계기로 점차 그 존재가 약화되었다.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에 남측 수석대표로 참여한 변영태 외무장관이 5월 22일 제출한 통일방안.
한국 통일에 관한 14개 원칙안 (韓國 統一에 關한 十四個 原則案)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에 남측 수석대표로 참여한 변영태 외무장관이 5월 22일 제출한 통일방안.
1955년 4월 22일과 5월 2일, 서울에서 대한민국 외무부 장관과 주한미대사관 대리공사 간의 각서 교환을 통해 체결·발효된 ‘한미 간 민간구호 활동에 관한 협정’의 약칭.
한미 민간 구호 협정 (韓美 民間 口號 協定)
1955년 4월 22일과 5월 2일, 서울에서 대한민국 외무부 장관과 주한미대사관 대리공사 간의 각서 교환을 통해 체결·발효된 ‘한미 간 민간구호 활동에 관한 협정’의 약칭.
공해추방운동은 공해추방을 위한 환경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사회운동이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공해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했다. 그러나 정부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공해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공해문제 해결을 위한 환경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88년 결성된 공해추방운동연합은 환경운동을 본격적인 궤도로 진입시켰다. 공해추방운동연합은 1993년 전국의 8개 민간 환경단체와 통합해 환경운동연합을 창립했다.
공해추방운동 (公害追放運動)
공해추방운동은 공해추방을 위한 환경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사회운동이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공해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했다. 그러나 정부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공해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공해문제 해결을 위한 환경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88년 결성된 공해추방운동연합은 환경운동을 본격적인 궤도로 진입시켰다. 공해추방운동연합은 1993년 전국의 8개 민간 환경단체와 통합해 환경운동연합을 창립했다.
대마관리법은 국민보건향상에 기여하기 위하여 1977년 1월부터 시행한 대마의 관리과 유출 방지 관련 법률이다. 대마에는 THC가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이 체내로 흡수될 경우 환각작용이라는 정신이상증세를 일으킨다. 이러한 기능 작용으로 인해 대마는 환각제로 이용되어 왔다. 1970년 「습관성의약품관리법」에 대마의 주성분인 ‘테트라하이드로칸나비놀’이 습관성의약품 항목으로 명시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 일부 연예인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 법안은 2000년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폐지되었다.
대마관리법 (大麻管理法)
대마관리법은 국민보건향상에 기여하기 위하여 1977년 1월부터 시행한 대마의 관리과 유출 방지 관련 법률이다. 대마에는 THC가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이 체내로 흡수될 경우 환각작용이라는 정신이상증세를 일으킨다. 이러한 기능 작용으로 인해 대마는 환각제로 이용되어 왔다. 1970년 「습관성의약품관리법」에 대마의 주성분인 ‘테트라하이드로칸나비놀’이 습관성의약품 항목으로 명시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 일부 연예인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 법안은 2000년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폐지되었다.
1956년 12월 27일과 1961년 12월 23일의 서울특별시조례에의해 설치된 영세 근로자 합숙소.
서울시립근로자합숙소 (서울市立勤勞者合宿所)
1956년 12월 27일과 1961년 12월 23일의 서울특별시조례에의해 설치된 영세 근로자 합숙소.
노동운동을 위하여 학생운동 출신의 대학 졸업자나 중퇴자들이 학력이나 경력 따위를 감추고 직업을 잡아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는 취업행위.
위장취업 (僞裝就業)
노동운동을 위하여 학생운동 출신의 대학 졸업자나 중퇴자들이 학력이나 경력 따위를 감추고 직업을 잡아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는 취업행위.
재일동포북송반대전국대회는 1959년 2월 21일과 6월 18일 재일한인북송반대전국위원회 주최로 개최된 재일교포 북송반대 집회이다.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결성 이래 재일교포 북한 송환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959년 2월 13일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재일교포의 북송 실시를 각의 양해했다. 이에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이를 저지하기 위한 범국민적 반대운동을 벌이기로 하여 1959년 2월 16일 국민총궐기대회와 6월18일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재일교포북송반대 국민운동은 실질적으로 북송을 저지하지는 못 했다.
재일동포북송반대전국대회 (在日同胞北送反對全國大會)
재일동포북송반대전국대회는 1959년 2월 21일과 6월 18일 재일한인북송반대전국위원회 주최로 개최된 재일교포 북송반대 집회이다.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결성 이래 재일교포 북한 송환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959년 2월 13일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재일교포의 북송 실시를 각의 양해했다. 이에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이를 저지하기 위한 범국민적 반대운동을 벌이기로 하여 1959년 2월 16일 국민총궐기대회와 6월18일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재일교포북송반대 국민운동은 실질적으로 북송을 저지하지는 못 했다.
조선일보사와 일본 마이니치신문사[每日新聞社]가 1995년부터 매년 공동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의 환경 보전과 환경의식을 높이는데 기여한 개인과 단체를 발굴해 수여하는 국제환경상.
한일국제환경상 (韓日國際環境賞)
조선일보사와 일본 마이니치신문사[每日新聞社]가 1995년부터 매년 공동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의 환경 보전과 환경의식을 높이는데 기여한 개인과 단체를 발굴해 수여하는 국제환경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