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아버지는 윤보은(尹輔殷)이다.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진출해, 강서현감(江西縣監)과 호서지역의 고을을 다스리는 동안 형벌을 남용해 여러 사람을 살상케 했고, 탐욕과 포학으로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모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여러 차례 받았다.
그 뒤 1599년(선조 32) 호조정랑을 제수받아 경직으로 서용되었다. 이어 사복시첨정 때 정언 이성록(李成祿)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600년(선조 33)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묘산(墓山)이 국장에 적합한 명당자리라는 행 호군 조정지(趙庭芝)의 무고 상소를 뒤에서 조정해 문제를 일으켰다. 그 뒤 1602년(선조 35) 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606년(선조 39) 한성부서윤에 임용되었으나, 서윤은 예로부터 관례상 문관만이 제수되었고, 또 형장(刑杖)을 남용한 자가 재직해서는 안 된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체차(遞差: 관직이 교체됨)되었다. 선조말 괴산군수 때 공물 독촉이 과중해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자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승진하였다.
숙천 고을을 다스리는 동안 군정을 위반한 죄로 훈련도감의 탄핵을 받아 파면의 위기에 처하자, 아전과 주민 등 10여 명을 동원해 부사 유임을 원한다는 소를 올리도록 조종하였다. 그러나 결국 장오죄(臟汚罪: 부정한 재물을 탐한 깨끗하지 못한 행위로 얻은 죄)로 파직, 추고되었다.
1614년(광해군 6) 사이가 벌어진 조광선(趙光璿)을 무고하기 위해, 칠서지옥(七庶之獄, 곧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도망다니던 평난공신(平難功臣) 박충간(朴忠侃)의 서자 박치의(朴致毅)가 조광선의 집에 숨어있다는 고변으로 역옥을 일으켰다. 국청이 열리자 김수잠(金守潛)이라는 노인으로 하여금 거짓 증언케 했다가 탄로나, 가깝게 지내던 이이첨(李爾瞻)의 무리들과도 사이가 멀어졌다.
당시 역옥을 맡은 추국청 및 삼사에서 삼적(三賊)을 반좌율(反坐律: 무고로 남에게 죄를 입힌 자는 그 죄로 당한 만큼의 죄과를 받는 형률)에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계속 대두했으나, 광해군은 관작만 삭탈한 채 보방(保放: 보증을 세우고 방면함. 즉 보석 처리)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무고죄로 주살되고, 아들 윤신(尹伸)은 왕자의 처부인 관계로 남방에 위리안치에서 감형되어 이배(移配)되었다.
당시 무고와 옥사가 잇따라 일어났는데, 김덕룡(金德龍)·김언춘(金彦春)·윤삼빙(尹三聘) 등 세사람의 무고사건을 삼적의 옥이라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