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성초(性初). 초명(初名)은 윤선원(尹善元). 윤기장(尹起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진(尹震)이다. 아버지는 윤의형(尹義衡)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강희경(姜熙卿)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615년(광해군 7)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가 몇개월 후 봉교로 승진하였다. 사관(史官) 추천일로 이조정랑 박홍도와 언쟁을 벌였으나 전례에 따른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듬해 정언 재직 시 부수찬 유효립(柳孝立)의 탄핵으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듬해 분병조(分兵曹)좌랑으로 제수되었다가 이후 문학·수찬을 역임하였다. 수찬으로 재직하던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를 서궁에서 폐출하는 일에 가담하였다가 다시 예조정랑, 문학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부수찬을 거쳐 교리·수찬으로 승진하였다.
1620년(광해군 12)에는 진휼청에서 구휼을 위해 영남지역에 종사관으로 파견되었으며, 그 뒤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려 체차되었다. 이어 부수찬·필선·수찬·장령·보덕·부수찬을 역임하던 중 인조반정으로 삭탈, 관작되었으며, 그 뒤 1633년(인조 11) 대사령(大赦令: 왕의 명령으로 많은 죄인을 사면함.)으로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