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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연(經筵)

    조선시대사제도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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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명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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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조선시대사
    유형
    제도
    성격
    교육제도
    시대
    조선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일.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경악(經幄) 또는 경유(經帷)라고도 한다. 임금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쳐 유교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왕권의 행사를 규제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기원은 중국 한나라 때 유학자들이 황제에게 오경을 강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나라 때는 한림원에 시강학사와 시독학사(侍讀學士)를 두는 등 어전 강의가 제도화되었다.
    유학이 발달한 송나라 때는 경연관직이 더욱 정비되고 강의 교재가 풍부해졌으며 격일제 강의 일정도 확립되었다. 원·명·청 나라 때에는 경연 강의가 형식적인 의식으로 변질되었다.
    우리 나라는 고려 때 예종이 경연을 처음 도입했으나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무신집권 때는 경연이 폐지되었다. 원나라의 지배 아래에서는 명칭이 ‘서연(書筵)’으로 격하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 경연이 부진했던 원인은 대체로 불교가 성하고 유학이 위축되었던 데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숭유 정책을 실시하면서 경연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태조는 경연청을 설치했고, 정종과 태종도 각각 경연을 실시하였었다. 세종은 즉위한 뒤 약 20년 동안 매일 경연에 참석했으며, 집현전을 정비해 경연관을 강화하였다.
    특히 성종은 재위 25년 동안 매일 세 번씩 경연에 참석, 여러 정치 문제를 협의하기도 해 경연이 바야흐로 정치의 심장부가 되기도 하였다. 경연은 세조와 연산군에 의해 폐지되기도 했으나 곧 부활되어 고종 때까지 존속하였다.
    경연관의 직제는 고려와 조선이 달랐다. 고려 예종과 인종 때의 경연 강의는 한림원의 학사들과 보문각(普文閣)의 학사와 대제(待制) 및 다른 관청에서 선발한 학자들이 담당하였다.
    원나라가 지배하던 때의 서연관의 직제는 알 수 없다. 다만, 우왕과 창왕 때 있었던 영사(領事)·지사(知事)·시독(侍讀) 등의 관직이 원나라의 경연 관제를 모방한 것이다.
    공양왕 때 이성계(李成桂) 일파가 서연을 다시 경연으로 승격시키고 직제도 개편해 영사 2인, 지사 2인, 동지사(同知事) 2인, 참찬관(參贊官) 4인, 강독관(講讀官) 2인, 검토관(檢討官) 3인 등을 두었다. 조선 초에 세종과 성종이 직제를 다시 개편해 『경국대전』에 실었다.
    경연관은 당상관과 낭청(郎廳)으로 구성되었다. 당상관은 영사 3인, 지사 3인, 동지사 3인, 참찬관 7인이다. 영사는 삼정승이 겸하고 지사와 동지사는 정2품과 종2품에서 각각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였다. 참찬관은 여섯 승지와 홍문관부제학이 겸직하였다.
    그 밖에 성종 말년에 특진관을 두었는데, 1·2품의 대신 중에서 임명했으며, 정원은 없었다. 낭청으로는 시강관·시독관·검토관이 있었는데 모두 홍문관원이 겸임하였다. 시강관은 직제학·전한·응교·부응교가 겸했고, 시독은 교리·부교리가 겸했으며, 검토관은 수찬·부수찬이 겸하였다.
    사경(司經)·설경(說經)·전경(典經)은 참외직(參外職)으로 홍문관의 박사·저작(著作)·정자(正字)가 각각 겸임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벼슬하지 않는 유학자를 경연관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강의 방식도 세종과 성종 때에 대체로 확립되었다. 세종 때는 승지 1인, 경연낭청(집현전) 2인, 사관(史官) 1인이 입시(入侍)하였다. 성종은 어린 나이로 왕이 되었을 때부터 하루에 세 번 조강·주강·석강에 참석했는데, 성년이 된 뒤에도 계속하여 새로운 전통이 되었다.
    조강에는 영사·지사(또는 동지사)·참찬관 각 1인, 낭청(홍문관) 2인·대간(臺諫) 각 1인, 사관 1인(뒤에는 2인), 특진관 2인 등 모두 10인 이상이 참석하였다. 주강과 석강의 참석자는 세종 때와 같았다. 좌석의 배치는 왕이 북쪽에 남향해 앉고, 1품은 동편에 서향, 2품은 서편에 동향, 3품 이하는 남쪽에 북향해 부복(仆伏)주 01)하였다.
    강의 교재는 사서와 오경 및 역사책인 『자치통감』·『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이 기본서였다. 그 밖의 교재로 『성리대전 性理大全』·『근사록 近思錄』·『소학』·『심경』·『대학연의 大學衍義』·『정관정요 貞觀政要』·『국조보감 國朝寶鑑』 등도 사용하였다.
    강의는 한 사람이 교재의 원문을 음독, 번역, 설명하고 나면, 왕이 질문도 하고 다른 참석자들이 보충 설명을 하였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정치 문제도 협의하였다. 특히, 대신과 대간이 참석한 조강은 협의체로서의 기능이 컸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뒤 경연청에 홍문관과 예문관을 합했고, 이듬해 경연청을 없애고 경연원(經筵院)을 신설해 시강 1인과 시독 4인을 두었다. 1897년에는 다시 경연원을 홍문관으로 개칭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고개를 숙이고 엎드림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권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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