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 우재(尤齋) · 문정(文正)이다. 아버지는 강릉참봉(康陵參奉)을 지낸 송갑조(宋甲祚), 어머니 선산곽씨(善山郭氏)는 임진왜란 때 조헌(趙憲)과 함께 금산에서 전사한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1607년(선조 40) 외가인 충청도 옥천 구룡촌(九龍村)에서 태어났다.
1613년(광해군 5) 곽지인(郭志仁)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부터 3년간 회덕(懷德) 송촌(宋村) 송이창(宋爾昌)의 집에 머물며 그 아들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 소학(小學)』과 『 가례(家禮)』 등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에게 배사(拜謝)한 일로 금고(禁錮)되어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을 배우며 주희(朱熹)와 이이(李珥)의 학문을 모범으로 삼았다. 1625년(인조 3) 이색(李穡)의 후손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결혼하였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맏형 송시희(宋時熹)와 자형(姊兄) 윤염(尹爓)을 잃었다.
1630년(인조 8)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 · 김집(金集) 부자에게 종유하며 본격적인 학문의 길에 들어선 뒤, 1632년(인조 10) 회덕으로 이사하여 송준길과 함께 강학에 전념하였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서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근거하여 성리학적 우주론을 해명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로 장원을 차지하였다.
1636년(인조 14)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의 사부(師傅)가 되어 『주역(周易)』과 『서경(書經)』을 가르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였다. 삼전도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물러나 은거하며 평생토록 산림(山林)으로 자처하였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올라 북벌(北伐) 의지를 표명하자 스승 김집 및 송준길 · 이유태(李惟泰) · 권시(權諰) 등 동료들과 함께 출사하였다. 그리고 주자학의 존천리(存天理) 거인욕(去人欲)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대청복수(對淸復讎)의 당위성을 제기한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렸다. 그러나 1650년(효종 1) 조정 관료들과의 갈등 및 김자점(金自點)을 비롯한 친청 세력의 견제로 고향으로 물러났다. 이후 김장생의 행장(行狀)을 찬술하고, 이이의 연보(年譜)를 교정하는 등 스승들의 학문적 업적을 정리하며 서인 도통(道統을 수립하는 일에 앞장섰다.
1657년(효종 8)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 아래 북벌의 선결 과제를 제시한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리고 다시 출사하였다. 1658년(효종 9) 이조판서의 직임을 맡아 공안(貢案) 개정 및 호포제(戶布制 시행 등 내수(內修)의 방도를 건의하였고, 독대(獨對)와 밀찰(密札)을 통해 효종과 더불어 북벌의 계책을 은밀히 논의하였다. 그러나 1659년(효종 10) 효종이 갑자기 죽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현종 즉위 직후 효종의 국상을 치르는 과정에서 재궁(梓宮) · 산릉(山陵) · 지문(誌文) 등의 사안을 주관하였는데, 효종의 업적을 폄하하고 예법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남인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두고 서인의 기년설(朞年說)과 남인의 3년설(三年說)이 대립한 기해예송(己亥禮訟)이 일어났다. 이때 『 의례(儀禮)』 주소(註疏)의 체이부정설(體而不正說)에 근거한 그의 기년설은 허목(許穆) · 윤휴(尹鑴) · 윤선도(尹善道) 등으로부터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라 비판받았다.
1662년(현종 3) 중국 남부에서 명나라 황실의 명맥을 이어가던 남명(南明) 왕조마저 멸망하여 북벌의 가능성이 사라지자, 현종 말년까지 관직을 버리고 속리산 화양동(華陽洞)을 비롯한 고향 인근에 머물며 존주대의(尊周大義)의 수호를 자임하는 가운데 강학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1664년(현종 5) 병자호란 때 죽은 할머니를 이유로 청사(淸使) 접대를 거부한 김만균(金萬均)의 출처를 둘러싸고 조정에서 논란이 벌어지자, 주자의 5세복수설(五世復讎說)을 내세워 청에 대한 복수의 의리를 옹호하였다. 1667년(현종 8)에는 제주도에 표류한 한인(漢人)들을 청으로 강제 압송한 조정의 결정을 비판하며 통탄하였다.
1668년(현종 9) 온행(溫幸)을 왔던 현종을 따라 상경하여 경연에서 『 심경(心經)』을 강론하는 한편, 태조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부묘(祔廟) 및 노산군(魯山君)과 사육신(死六臣)의 추숭을 건의하였다. 1671년(현종 12)에는 호란 때 척화론을 주도하다 청에 끌려가 죽은 홍익한(洪翼漢) · 윤집(尹集) · 오달제(吳達濟)의 전기인 『삼학사전(三學士傳)』을 지었다. 1674년(현종 15)에는 제자 민정중(閔鼎重)이 베이징에서 구해 온 숭정제의 어필 ‘비례부동(非禮不動)’을 화양동 절벽에 새기고 환장암(煥章菴)을 세웠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죽음을 계기로 복제 논쟁이 재연되면서, 서인의 대공설(大功說)과 남인의 기년설(朞年說)이 충돌한 갑인예송(甲寅禮訟)이 일어났다. 이때 현종이 기해예송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설을 비판하고 인선왕후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제를 기년복으로 정함으로써, 효종의 국상에 예를 잘못 적용했다는 오례(誤禮)의 혐의를 받게 되었다.
숙종 즉위 후 ‘그릇된 예론으로 국가의 통서(統緖)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고, 1675년(숙종 1)부터 5년간 함경도 덕원(德源) 및 경상도 장기(長鬐) · 거제(巨濟) 등에서 유배 생활을 겪었다. 그동안 남인은 효종에 대한 오례와 불충을 넘어 소현세자에게 정통을 돌리고 그 후손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모역(謀逆)의 혐의를 제기하며 송시열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제수된 뒤, 조선 왕조의 중화주의적 정체성을 강조하며, 효종의 존주대의를 계승할 것을 숙종에게 당부한 「진수당주차(進修堂奏箚)」를 올렸다.
1681년(숙종 7) 주희를 비롯하여 주돈이(周敦頤) · 정호(程顥) · 정이(程頤) · 장재(張載) · 소옹(邵雍) 등 6명의 송대 도학자들을 정전(正殿)에 올리고 ,학행에 흠결이 있는 순황(荀況) 등을 출향(黜享)하는 한편, 서인의 숙원이던 이이와 성혼(成渾)의 종사(從祀)를 포함하는 문묘(文廟) 개혁을 주도하였다. 1683년(숙종 9)에는 태조의 위화도 회군에 담긴 존주대의를 선양하여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고, 북벌을 추진한 효종의 공적를 기려 세실(世室)로 삼을 것을 핵심으로 하는 종묘(宗廟) 전례의 개정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경신환국 이후 훈척(勳戚)들의 기찰(譏察)에 대한 인식 차이 및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 등으로 인해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기하자, 노론의 영수로서 존주대의의 현양과 주자학의 수호를 내세우며 남인 · 소론과 대립하였다.
1689년(숙종 15) 희빈장씨(禧嬪張氏) 소생의 원자(元子) 정호(定號)를 미룰 것을 청한 일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자 동궁을 무함하고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다는 죄목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전라도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송시열은 주나라의 예악문물(禮樂文物)로 상징되는 유교 문명의 계승[존주(尊周)] 및 송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 사상의 수호[위주(衛朱)]를 평생의 과업으로 자임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이이의 성리설(性理說), 김장생의 예설(禮說), 김상헌(金尙憲)의 척화론(斥和論) 등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지만, 금나라의 침략에 직면했던 남송 시기 주희의 학문에 기반하여 1644년 이후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동아시아 질서의 대변동 속에서 조선 왕조의 유교적 정체성을 재확립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그 시대적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양란 후유증의 극복이라는 과제에 직면하였던 17세기 후반 조선의 상황 속에서, 송시열의 정치사상은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의 유교적 인륜 질서를 근간으로 삼아 조선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는 내수(內修)의 이념과, 이적(夷狄)인 청나라의 침략으로 말미암은 남한산성의 치욕을 복수하고 붕괴된 중화(中華) 질서를 회복하려는 외양(外攘)의 염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의 내수외양론은 유교적 화이론(華夷論)에 이론적 토대를 두고 있었다. 중화를 높이고[존중화(尊中華)] 이적을 배척하는[양이적(攘夷狄)] 화이분별론은 중국 고대부터 존재해 왔는데, 중화와 이적을 구분하는 지역 · 혈통 · 문화 등 기준 가운데 후천적 · 가변적 요소인 문화를 가장 중시하였음이 유교적 화이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다. 이때 문화란 예의(禮義)와 인륜(人倫)을 핵심으로 하는 유교 문명을 의미하였다.
송시열은 소중화(小中華)로 자부해 온 조선 왕조가 이적이 세운 청나라에 사대하게 된 병자호란 이후의 상황을 개탄하며, 천리(天理)의 실현이라는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청에 대한 복수설치(復讎雪恥)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금나라의 침략을 겪었던 남송대 주희의 학문을 새롭게 해석하며 17세기 조선 사상계의 전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효종의 죽음과 남명(南明)의 멸망으로 중원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진 현종 대에 들어서는 문화적 화이론에 입각하여 주나라로 상징되는 유교 문명의 부흥을 자신의 책무로 자임하였다. 특히 조선 왕조의 정체성을 유학의 의리론적 전통 위에 수립하려는 새로운 역사의식으로 표출되었다. 은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킨 기자(箕子)에 대한 존숭과 원나라에 신복(臣服)했던 고려 말의 역사에 대한 비판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태조비 신덕왕후의 부묘 및 단종과 사육신 추숭을 통하여 태종과 세조가 부자 및 군신 의리를 저버렸던 도덕적 과오를 바로잡고 조선 왕조의 의리론적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왕조의 차원을 넘어 유교 문명의 계승이라는 문제의식을 담은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으로 확대되었다.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병하여 소중화를 지켜준 만력제(萬曆帝)와 나라가 망하자 자결을 선택한 숭정제의 의리를 추모하며, 북벌을 통해 화이분별의 의리를 실천하고자 했던 효종을 그 계승자로 설정한 유교 문명의 새로운 계보를 제시하였다.
이처럼 명 멸망 이후 조선이 중화의 적통을 계승하였다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의 이념은 명 멸망 60주년인 1704년(숙종 30)에 이르러 제자 권상하(權尙夏)가 화양동에 건립한 만력제와 숭정제의 사당 만동묘(萬東廟)를 통해 상징화되었다. 또한 같은 해 숙종이 창덕궁 북원(北苑)에 대보단(大報壇)을 건립하여 만력제에 대한 제사를 거행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국가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송시열의 조선중화주의는 그간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매몰된 관념적 · 비주체적 사대주의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명대의 정치와 문화 전반에 대하여 부정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황제 중심의 전제정치와 환관의 발호로 집약되는 명의 정치제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였을 뿐 아니라, 양명학(陽明學)이 주류를 이루던 명의 사상 역시 배척하였다.
아울러 “나는 평생 명나라의 글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며 16세기 후반 이후 조선에 풍미하던 명의 문풍을 배격하고, 명 학자들의 예학 또한 주자의 본뜻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혹평하였다. 요컨대, 송시열의 중화주의는 혈통(한족) 또는 왕조(명나라)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아니라, 예의를 핵심으로 하는 유교적 문화 가치에 대한 존숭 및 계승 의식을 의미하였다.
송시열의 학문은 송대 신유학(新儒學)을 집대성한 주희에 대한 절대적 존신(尊信)에 기반하였다. 천리의 보편성과 인간의 도덕적 자각을 전제로 의리(義理)과 정통(正統)의 가치를 강조하였던 주희의 학문과 행적을 통하여, 양란 직후 조선 사회가 직면한 혼란을 극복할 전범(典範)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특히 요순삼대(堯舜三代) 이후 유학의 종지(宗旨)가 공자(孔子) · 맹자(孟子) 이후 송대 도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주희의 도통론(道統論)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숙종 대 문묘 개혁에서 볼 수 있듯이 한 · 당 유학자들에 대한 배척으로 드러나는 한편, 주희를 비롯한 송대 학자들이 남긴 방대한 저술의 핵심을 요약하고 상호모순된 언설을 교감 · 정리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물로는 『주자대전(朱子大全)』 가운데 의심스럽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뽑아 해설을 덧붙인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이정전서(二程全書)』의 내용을 주제별로 분류한 『정서분류(程書分類)』, 주희 문인들이 기록한 『주자어류(朱子語類)』의 내용을 교감하여 재편집한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송 이방자(李方子)의 『주자연보(朱子年譜)』와 명 대선(戴銑)의 『주자실기(朱子實紀)』를 통합하여 정리한 『기보통편(紀譜通編)』, 이황(李滉)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정경세(鄭經世)의 『주문작해(朱文酌海)』를 합치고 보완한 『절작통편(節酌通編)』, 『논어』와 『맹자』에 대한 주희의 초기 견해를 조목별로 정리한 『논맹혹문정의통고(論孟或問精義通考)』 등이 있다.
한편, 송시열은 주자 이후 조선의 도학 전통을 정리하며, 고려 말 절의의 상징인 정몽주(鄭夢周)와 유교적 이상국가를 수립하려 했던 조광조(趙光祖)를 거쳐 이이와 성혼(成渾) 그리고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도통론을 제시하였다.
또한 이이 · 성혼을 비롯하여 정철(鄭澈)과 조헌(趙憲) 등 16세기 후반 서인의 결집을 주도한 주요 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하며, 선조 대 동서분당(東西分黨) · 기축옥사(己丑獄事) · 임진왜란 당시 그들의 처신이 정당하였음을 옹호하였다. 이는 이황을 정점으로 삼아 학문적 정체성을 견고하게 다져오며 일원적 도통의식을 형성해 온 남인과 비교하여, 17세기 전반까지도 명확하지 못했던 서인의 학문 계보를 주자학적 도통관에 입각하여 정비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이의 입산(入山) 행적을 거론하며 그의 이기설(理氣說)을 가리켜 불교와 육상산(陸象山)의 영향을 받은 이단(異端)이라 규정한 남인들과 여러 차례 충돌하였다. 또한 주희의 경서 주석을 따르지 않았던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지목하고, 윤휴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보인 친구 윤선거(尹宣擧)마저 주자학의 배신자로 비난한 일은 숙종 연간 노소 분기의 중요한 원인을 이루었다.
송시열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정치적 공과와 사상적 위상에 대한 평가는 노론과 소론 · 남인 사이에서 벌어진 정쟁의 주요한 주제로 부각되었다. 각 붕당은 자신들의 성리학적 정통성을 입증하려는 의도 아래 송시열에 대한 포폄(褒貶)을 가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한 뒤 송시열의 관작이 복구되고, 수원 매곡서원(梅谷書院), 정읍 고암서원(考巖書院), 충주 누암서원(樓巖書院), 덕원 용진서원(龍津書院) 등 그를 제향한 서원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1695년(숙종 21)에는 특명에 의하여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화양서원(華陽書院)의 건립과 사액이 이루어졌다. 뒤이어 1696년(숙종 22)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조광조와 함께 병향(並享)되었다. 그리고 1704년(숙종 30) 대보단 설립으로 송시열이 제기한 조선중화주의가 국가이념으로 확립된 뒤, 1716년(숙종 42) 숙종은 이른바 병신처분(丙申處分)을 통해 윤선거 · 윤증 부자의 관작을 추탈함으로써 노소 분기 이후 송시열과 노론의 정당성을 천명하였다.
숙종에 이어 즉위한 영조는 1749년(영조 25) 대보단을 증수하고 만력제와 더불어 홍무제와 숭정제를 추향(追享)하였으며, 병자호란 120주년이 되던 1756년(영조 32) 송시열을 문묘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세손 시절 주희와 송시열의 주요 저술을 함께 수록한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을 편찬하여, 주희의 정통적 계승자로서 송시열의 도통적 위상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즉위 직후 송시열을 종묘의 효종 묘정에 배향하고 화양서원에 치제(致祭)하는 한편, 1785년(정조 9) 효종의 영릉이 있는 여주에 송시열 사당의 건립을 명하고 대로사(大老祠)라 사액하였다.
한편, 송시열이 사망한 직후부터 제자 권상하의 주도 아래 그의 유문(遺文)에 대한 수집과 정리가 시작되어, 1691년(숙종 17) 무렵 문집의 초고인 이른바 황강본(黃江本)이 처음 만들어졌다. 그리고 병신처분 이듬해인 1717년(숙종 43) 숙종의 명에 따라 『우암선생문집(尤菴先生文集)』의 편찬이 시작되어, 1719년(숙종 45)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되었다.
그 뒤로 문인들이 빠진 글들을 수습하여 『우암선생후집(尤菴先生後集)』을 편찬하는 한편 증손 송무원(宋婺源)이 『경례문답(經禮問答)』과 『우암선생연보(尤菴先生年譜)』를 정리하였고, 1787년(정조 11) 『우암선생문집』에 누락된 글들을 보충하고 재정리한 『송자대전(宋子大全)』이 평안감영에서 간행되었다.
이후 후손들을 중심으로 보완을 거듭하여, 1866년(고종 3) 8대손 송근수(宋近洙)가 『송자대전』의 해설집이라 할 수 있는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를, 1872년(고종 9) 9대손 송병선(宋秉璿)이 『송자대전』에 수록하지 못한 글을 모은 『송서습유(宋書拾遺)』를 편찬하였다. 그리고 1907년 일본군이 화양서원을 불태울 때 함께 소실된 『송자대전』 목판을 다시 제작하는 과정에서 1929년 9대손 송병기(宋秉夔)가 『송서속습유(宋書續拾遺)』를 간행하였다.